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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나의 편린들/버린 詩(발표) (30)
하루하루
겉흙이 마르면 물을 준다꽃에게 눈물을 가르치는 중이다눈물에 발을 적신 채 꽃은눅어진 슬픔의 말을 배우고소리 없이 우는 법을 배운다 너의 그늘을 사랑한 적이 있다어디서 햇살 한줌 얻어와 어둔 표정 앞에 놓아두고 싶었지만눈가가 겉흙처럼 마를 때까지가만히 기다리기로 한다 슬픔이 더는 은밀해지기 전에너의 비밀을 적셔야 했다눈물에 젖지 않으면어떤 화분도 꽃을 궁리하지 않는다 월간 『모던포엠』 24년 9월호
늙음이 추함이 되지 않도록이쯤에서 끝이라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한순간 안간힘을 버린다 산다는 게 그저 세상을 기웃거릴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면 들숨과 날숨 어디쯤에서 팽팽하던 집착의 가닥들을 툭툭 끊어도 볼 일 샤워를 마친 거울 앞 참 볼품없이 나이 먹은 이방인 하나 그 처연한 장면을 한참 목도하다가 문득 소멸의 자세를 생각한다 더는 삶과 실랑이하지 말고 세상의 복판에서 비켜서야 할 시간 하찮은 기억처럼 잊고 또 잊혀지다보면 나는 없는 듯 있는 사람 마침내 투명처럼 사라질 존재 『용인문학』 41호(2023년 10월)
죽음은 현상이 아니라 어쩌면 방향일지도 모릅니다 몸이 멎으면 생각은 몸을 놓고 홀로 가던 길을 갑니다 집요하게 당신의 행방을 쫓던 슬픔들이 일제히 한쪽을 바라봅니다 혼자 가지기엔 너무 많은 슬픔 같아서 문득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슬픔의 표정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족속 같습니다 맹지 같던 삶에는 슬픔만 무성하게 자라나서 버리고 떠나도 하나 아깝지 않겠습니다 몸을 멈추고 탈피를 완성한 당신을 향해 오늘 같은 밤은 축배를 들어야 하는데 남겨진 내가 당분간 함께 할 슬픔을 괜스레 자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당신이 사라진 쪽으로 꽃 한 송이 가지런히 놓는 일뿐입니다 『시흥문학』 33호(2023)
사랑초가 죽었다스무 해 가까운 목숨이었다 신혼집 베란다 작은 화분에 미신처럼 엄마가 몰래 묻어두고 간 사랑 한 뿌리 찬기가 오면 거실에 들였다가 경칩 지나면 볕 좋은 곳에 내어 놓았다 꽃이 먼저 오고 이듬해에 큰아이가 왔다 입하 못 미쳐 엄마가 죽었는데 빈손이었다 그때부터 이 집의 겨울엔 안으로 들여야 할 생각들이 하나씩 늘어났고 미처 들이지 못한 것들은 집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잊혀졌다 꽃기린 무늬벤자민 군자란 당신을 기억하는 목숨들은 다 데려가고 잊어가는 사람들만 여기 남아서 상한 속에 생각을 들였다 내놓으면 아이는 한 뼘씩 키가 자랐다 계간 『시와 징후』 2023년 겨울호
안부 오래 잊고 지냈습니다 오늘 이 골목을 지나다가 문득 어떤 기억과 마주칩니다 울고 있었지요 얼른 슬픔을 밀치고 손을 내밀었지만 당신은 끝내 다 슬프고 난 후에야 낭자한 눈물을 짚고 혼자 일어섰지요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당신이 마음을 절며 막 돌아서던 골목 어귀 쪽으로 뒤늦게 일어난 슬픔이 엉거주춤 따라가던 모습을요 나는 슬픔의 반대쪽으로 걸었습니다 만약 당신도 슬픔보다 더 오래 슬펐더라면 슬픔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테지요 지금쯤 당신과 슬픔은 각자의 길을 가고 있을까요 아니면 어느 선술집에서 서로에게 길을 물으며 긴 어둠을 또 함께 지새우고 있을까요 간혹 슬픔을 마주치는 날엔 당신을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당신, 잘 있습니까 나는 잘 있습니다 계간 『시와 징후』 2023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