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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나의 편린들/버린 詩(발표) (30)
하루하루
기막힌 세계 -대장동 블랙커피를 마실 거야 검어질 수만 있다면 내 피를 검게 물들일 거야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빛의 이야기를 엿들었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모두가 함구하는 그 환한 생태계 우리가 희망이라 부르는 것들은 검은손들이 다 움켜쥐지 못한 빛의 부스러기들 네가 나를 무심히 지나쳐버릴지도 모르지만 검은인간이 될 거야 눈의 흰자위까지 어제 산 옷들은 모두 버려야 해 그건 이제 못 입는 생각 어제는 어제의 나 오늘은 오늘의 내가 필요해 블랙을 마실 거야 그곳은 모두가 한편 모든 색깔과 이념이 하나의 색으로 어우러지는 기막힌 세계 어둠의 플랫폼에서 걸어 나온 카멜레온들이 색을 바꾸며 여의도로 서초동으로 높고 화려한 빌딩 속으로 흩어진다 생각이 너무 맑으면 우린 투명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계간 『한국동서..
어느 한때 권 상 진 당신의 입술에서 꽃잎들이 흩날립니다 정원 어디에도 없던 꽃들 사전을 펼쳐 꽃말을 찾는 동안 눈가에 물든 단풍이 볼에 번집니다 어떤 꽃말에 밑줄을 긋다 말고 붉어진 당신을 따라나섭니다 온통 물결뿐이었던 나의 어느 한때 말없이 함께 일렁이던 당신처럼 이제 내가 당신의 뒤가 되어 묵묵히 파도를 받아 안겠습니다 여자를 그만두게 됐어 잠시 나를 바래다주고 올게 음표를 잃어버린 오선지처럼 당신은 말하고 나는 남습니다 장소만 있고 시간은 없는 약속처럼 모든 날 모든 때 모든 자리에서 내가 기다립니다 계간 『신생』 2021년 봄호
저글링 권 상 진 출근길에 생각 없이 들고 나온 자두가 하필이면 두 개 하나면 먹고 가고 세 개면 가서 먹을 텐데 어색한 동행이 되어버린 자두와의 출근길 책상은 세 개 자두는 두 개 인사 대신 하나 받아 든 앞자리 녀석이 자두 한 번 나 한 번 빈자리 한 번 보고 슬그머니 옆자리에 올려놓길래 다시 하나 던져주는 마음의 궤적 뒤늦게 들어선 여직원 곁눈질로 책상들을 살피다가 슬그머니 내 책상에 놓고 가는 눈인사와 자두 자두는 두 개, 사람은 세 명 이 책상 저 책상 옮겨 다니다 온종일 후숙 되는 자두와 마음 다음날 자두 한 개 들고 문을 열었더니 어쩌나, 사람은 세 명, 자두는 다섯 개 월간 『모던포엠』 2020년 10월호
마지막 퍼즐 권 상 진 완성된 그림을 기억하세요 이 장면은 영등포 쪽방골목 오르막길 리어카 노인이 그려진 조각 퍼즐들 새벽 4시가 되면 헝클어지는 퍼즐조각 점호처럼 시작되는 점등의 시간에 아직 깜깜한 창이 보이네요 자 이제 시작해 볼까요 아래쪽 테두리에 살짝 그려진 빌딩 근처에서는 조각을 들고 고민하지 마세요 그곳은 신성한 성지처럼 잠시 햇볕을 찾아 순례를 다녀오는 곳 차라리 해거름의 동토를 상상해 보아요 먹잇감을 놓쳐버린 늙은 북극늑대가 우두커니 서있는 저 언덕, 그 자리에 노인 한 분을 맞춰 봐요 파지와 리어카 조각을 맞추었다면 다시 그 앞에 등 굽은 노인 한 분 쪽방과 오르막은 같은 모양이라서 쉽게 맞출 수 있어요 아직 마지막 노인의 자리를 찾지 못하셨나요 저녁을 기다려 보세요 불꺼진 새벽의 그 창..
탑 - 황룡사 터에서 권 상 진 목탑이 있던 자리 허망한 역사의 뒤뜰에서 자라는 잡풀들 사이로 흩어진 석재가 더러는 묻히고 또 삭아진 땅 허물어진 금당 위로 마침내 몇 번의 왕조조차도 쓰러진 자리에 낮게 숨죽이며 버텨온 심초석 하나 탑은 어디로 갔을까 황량한 빈 터 어디에 묻혀 있을 탑 그림자는 이제 자신의 모습조차 잊었을 테지 시간의 앙금이 지층이 되도록 빈 터가 천년을 가두는 동안 층층이 허상만 그려 올리던 사람들 심초석 위에 기대앉아 본다 왜 몰랐을까 한 생각 접고 여기 앉으면 누구라도 탑이 된다는 것을 거닐던 사람마다 탑이 되어 솟는다 누웠던 그림자가 키를 맞추면 바람이 머리칼을 쓸며 탑돌이를 시작한다 반년간 『스토리문학』2020년 하반기호
젖무덤 권 상 진 여자를 벗고, 집 앞 골목을 나오는 사람 얇고 하얀 모시런닝 속 중력 쪽으로 기운 가슴에서 탄화된 시간이 설핏 비친다 나는 남자를 버리고 한참 동안 저 밋밋한 것을 바라본다 누가 이름 지었을까, 젖무덤이라는 말 그 속에 눈물이 한가득이다 가슴에 헛묘를 만들고 남몰래 욱여넣던 설움들이 부품하다 연고도 없는 저 무덤 앞에서 나는 경건해지고 저 여인 앞에서 숙연해진다 그런 나이가 온 것일까 등 뒤에서 팽팽하던 여자를 풀어 버려도 하나 남사스러울 것 없는 그런 나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일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양을 바꾸는 가슴이 건반을 벗어난 음표들처럼 자유롭다 계간 『시와 경계 』 2020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