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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꽃문 권 상 진 꽃잎인 줄 알았다 끝내 속으로만 피고 지던 마음 한 잎 툭하고 여자의 발끝에 흘린 것 같아 처음엔 내가 먼저 붉었다 식탁 옆자리에서, 구멍 난 스타킹 끝을 슬쩍 당겨 엄지와 검지 사이에 밀어 넣던 여자도 꽃같이 잠시 붉었다 당신이 슬며시 열어놓은 수줍은 쪽문 그 문을 밀고 들어가 발목에 닿고 그 흰 줄기를 다 올라가 꽃에 닿으면 내 마음이 비추던 방향으로 휘어져 오는 꽃대 그 위에 노을 지던 꽃잎, 비밀들 나는 나비처럼 꽃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당신의 저쪽까지 건너가 눈시울에서 빠져나오면 어느새 당신, 내 곁에 피어있었다 속내를 들킨 것 마냥 서로의 표정이 꽃문처럼 닫힐 때 여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꽃무늬 방석을 발끝에 올려 두었다
나무날개 권 상 진 다리가 없는 그는 겨드랑이에 나무날개를 끼운다 무너진 자세를 고치며 목발로 나서는 밤길 설화는 달밤에 시작된다 외딴집 마당에 새도 사람도 아닌 것이 어른거리던 날 마을에는 인면조를 보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소문의 꼬리는 그 집 가까운 골목에서 끝이 났다 밤마다 그 집 마당에는 달빛을 등진 검은 그림자가 앙상한 날개뼈를 한껏 움츠렸다 공중에 걸음을 놓아보지만 번번이 곤두박질쳤다 어쩌다 외발이 날개를 앞지를 때에는 새 그림자에서 몸을 빼려는 사람 그림자가 빈 다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푸드덕, 허공을 짚는 날개 소리에 달빛이 담장 가로 쓸려 나갔다 사람을 놓아야 새가 될 수 있었다 구겨진 깃을 털고 날개를 가지런히 모으면 새의 울음을 울 수 있었다 빼곡히 찍힌 발자국마다 별빛이 박혔다 별들..
교차로 권 상 진 도시의 기후는 건조합니다 아비를 따라 십 수년, 마른땅에 그를 묻고 어미를 따라 다시 몇 년, 그 사이 아내를 얻고 어린것들은 또 생겨나 풀을 뜯습니다 늙은 어미가 게르에서 풀이 무성한 쪽으로 머리를 누이고 잠들었을 때 다시 짐을 싸는 아내는 이미 완경에 가깝습니다 열세 번의 거처를 옮기며 우리는 이 도시의 모든 골목을 완주했지만 다시 슬픔의 역순으로 떠나야 합니다 슬픔의 입구는 풀밭에 던져진 통발 같아서 빤히 보이는 희망을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넓은 잎에 키 큰 나무 주변은 포식자들이 살고 경계를 따라 자라는 풀의 맛을 이어봅니다 전세는 전세끼리 월세는 월세끼리 오와 열을 맞춰 사막 입구로 뻗어갑니다 유목의 피가 흐르는 양 떼가 초원의 서열을 몸에 익히고 초원의 경계에서 고개를 누입..
당신의 바깥 권 상 진 자기가 삼킨 눈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안다 딱 그의 키만큼 울고 갔다 염장이가 그를 슬픔과 함께 단단히 묶고 눈물이 새 나가지 않도록 오동나무 관으로 경계를 두르는 동안 죽음을 빙 둘러선 사람들은 그에게 흘러든 어떤 구름에 대해 증언하거나 자신의 몸에 눈금을 그어 보이는 시늉을 했다 막잔을 비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코끝까지 차오른 눈물에 그가 술잔처럼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바깥에 서 있었다 울고 있었지만 아무도 당신이 술잔에 채워준 구름을 마시지 않았다 한 이틀 슬픔들이 속속 다녀가고 마지막 날엔 잘게 부서진 눈물이 항아리에 고였다 주목나무 아래 그를 뿌려두고 남은 이들이 출렁거리면서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디스코 팡팡 권 상 진 세상의 이목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오늘이 자주 덜컹거리기 때문이겠다 이럴 때는 균형을 잡는 일이 우선이어서 옷이 좀 흘러내리거나 신발 한 짝이 벗겨져도 넘어지지 않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팡팡, 디스코 리듬처럼 바닥은 출렁인다 시간이 엎질러진다 팡팡, 춤추고 싶지 않은데 나는 종이인형처럼 나부끼며 세상과 붙었다가 떨어진다 한 손으로 간신히 잡고 있는 밥줄을 놓치지 않으려면 남은 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식구들의 아슬한 앞섶을 가려주거나 있는 힘을 다해 대롱거리는 순간을 삶 쪽으로 힘껏 당겨 앉혀 주는 일 아무나, 아무거나 가릴 것 없이 곁을 잡아야 할 때 간혹 그게 가족이라면 참 민망할 때도 있었다 균형을 잃으면 주인공이 된다 들썩이고 휘청이고 뒤집히는 동안 이렇게 처절하게 매..
장편 권 상 진 서재에 들어섰을 때 죽음은 그의 결말을 읽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죽음과 나는 어스름한 그를 가끔 만지고 또 지켜보았다 그가 여린내기로 숨을 고르다 못갖춘마디로 말끝을 흐릴 때 흠칫 놀라 떨리는 입술에 귀를 대보던 죽음은 공중에 떠도는 마지막 말이 바닥에 내려앉기를 기다렸다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침묵을 가만히 당겨와 적요한 얼굴을 덮어주었다 순간 또 다른 목소리들은 공중에 생겨나 음악이 되고 젖은 악보에서 그가 다 쏟아져 나온 후에야 길을 내준다 한 때 그를 나눠 가진 이들은 함께 머물던 페이지를 다시 뒤적이며 국화꽃 책갈피를 꽂아 놓고 자리를 떴다 죽음이 그를 모두 읽는데 꼬박 칠십사 년이 걸렸다 그 길었던 서사의 마지막 장을 덮는 날 그가 서가 한 귀퉁이에 가지런히 꽂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