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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눈물 이후』(2018, 시산맥)

가짜시인! 2018. 8. 6. 13:15

 

 

 

슬몃 등을 돌려 마지막 인사를 대신한 사람이 있다

미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 생각들이 차곡한

등은, 그가 한 생애 동안 써온 유서

일생을 마주보고 건네던 가벼운 말들이

서로에게 가 닿거나 때론 우리의 간격 사이에서 흩어지는 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등이다

인연이 다한 뒤에야 당도하는 말들이 있다

 

바람이 불어 허연 억새의 가녀린 등이 굽는다

지난밤에는 어둠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새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고

나는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못한 내 등이 궁금하다

 

이제사 돌아서는 것들의 등이 보인다

내게 오려던, 모든 수사가 지워진

간결한 주어, 목적어, 서술어

 

반가운 이를 만나고 헤어질 때

잠시 돌아서서 그의 등을 읽는 버릇이 생긴 것은

그날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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