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하루하루

모던 브라운 본문

나의 편린들/버린 詩(발표)

모던 브라운

가짜시인! 2018. 12. 28. 09:14

모던 브라운

 

 

화단에 벗어 놓은 아버지의 구두가 두 계절을 마르고 있다

무거운 걸음이었던지 밑창에 눌려 누렇게 뜬 잡초 한 움큼이

똬리를 내리던 엄마의 편평한 정수리에서 본

색 바랜 머리카락 같다

 

살아온 어디쯤에서부터 무게를 만났을까

세상에서 머리부터 하얗게 지워져 가고 있는 엄마

시간을 돌려주고 싶었다

 

하양에 브라운을 덧칠하면 지워지는 시간

청춘마트에서 모던 브라운 염색약을 사서 기다리는 시간은 온통 브라운

삐걱거리는 시장 좌판도 칠이 벗겨진 낡은 대문도 브라운

덧칠하고 싶은 기억이 즐비한 골목의 뿌리 까지 염색을 마치고 나면

데생의 질감 보다 세밀한 슬픔이 어둠 저쪽에서 걸어온다

내일은 시장에 가지마 분 향을 폴폴 풍기면서 대리석이 깔린 백화점 바닥을 또각또각 걸어봐 테라스가 있는 2층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투샷을 주문하고 머리칼 촘촘한 아버지를 기다려야지 망설일 필요 없어 잊어버린 표정들을 떠올려 봐

 

엄마의 기억까지 물들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오래된 앨범 속 표정들을 뒤적인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는 작아지고 가벼워지다 마침내 사라지고

엄마의 미소는 점점 선명해진다

 

한숨과 눈물이 물때로 남은 세면대

아버지가 사라져버린 블랙홀 속까지 닿아 있는지

갈빛 물살이 소용돌이친다 밤이 지나면

모던해진 아버지, 맨발로 걸어 나와

저 구두를 신고 젠틀하게 대문을 넘으시려나

 

 

계간 『시현실』 2018년 겨울호

'나의 편린들 > 버린 詩(발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륜, 아내가 모른 체하는  (0) 2019.03.15
가시고기  (0) 2019.01.02
안경을 벗으며  (0) 2018.12.06
소리  (0) 2018.10.02
표적  (0) 2018.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