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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_ 사무엘 울만의 시를 읽다

가짜시인! 2013. 9. 3. 08:58

청춘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하지.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네.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이심전심의 안테나가 있어
사람들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雪]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氷]에 갇힐 때
그대는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대학을 쫓겨난 적이 있다. 그 당시 내 가슴을 불지폈던 문구는 '참된 청춘의 삶' 이었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옳다고 확신하는 것은 그 어떤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고야 말았던 시절 이었다.

그것이 청춘(청년)의 의무라 믿었다. 쫓겨난 학교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살아가는데 자주 불편을 주기는 하지만 후회를 해본 적은 없다.

나는 종북 좌파 세력도 아니었고, 노동운동을 하는 혁명가도 아니었다.

다만 옳고 그름에 대한 주관적 잣대를 가지고 세상에 요리조리 대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새파란 청년의 시절이 있었다.

 

청춘이란 말만 들어도 아직 가슴이 뛴다.

이 시는 저자가 78세에 쓴 글이란 내용을 어디서 본 듯하다.

청춘을 다만 추억하기에도 힘겨운 나이에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네'

라고 설파한 이 노인은 진정한 청춘임에 틀림없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는 시인.

반대의견도 적지 않을 것이나, 대체로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청춘이 나를 스쳐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청춘의 시기를 스쳐지나온 것일 뿐.

옛집을 찾듯 다시 청춘을 찾아 나서고 싶다.

아직 멀리 떠나오지 않았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도 거기에는 희망이 살고 있을까?

 

외국시를 즐겨 읽지 않는다.

읽는 맛이 없다.

시 적 문장을 번역하면서 경구[]로 만들어 버리는 실력이라니...

시집을 수상집이나 잠언집을 읽는 기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살 떨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