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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그 비뚤어진 논공행상 / 구재기 시인의 글을 읽고

가짜시인! 2012. 11. 27. 09:37

[한밭춘추] 문학상, 그 비뚤어진 논공행상 / 대전일보

 

구재기 시 인

 

고사성어에 '논공행상(論功行賞)'이라는 말이 나온다. '삼국지'에 나오는 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나라 문제 조비는 병으로 죽기 며칠 전에 조예를 황태자로 정할 때에 장군이자 일가가 되는 조진과 조휴, 유교와 법에 정통한 진군, 원로인 사마의 등 4명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죽자 오나라와 촉나라는 위나라를 공격할 기회를 잡게 되면서 조예가 명제로 등극한 지 석 달 후 오나라 손권이 먼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 강하군을 공격하였다. 태수 문빙이 공격을 막아내고 조정에서는 응원군을 보내 문빙을 지원하려 했지만 명제는 조정 중신들의 건의는 듣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는 전통적으로 수전에 강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배를 버리고 육상의 싸움에 도전한 것은 우리 쪽의 무방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무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지칠 것이다. 지금 문빙의 군대가 잘 버티고 있으니 공수의 세력이 뒤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문제의 말대로 얼마 후 과연 손권은 후퇴를 하게 되었다. 오나라 장군 제갈근과 장패도 위나라를 공격해왔지만 대장군 사마의가 선전해 격파하고 장패의 목을 베었다. 용장 조휴도 오나라의 별동대를 격파하였다. 싸움에서 승리하고 나자 문제는 위나라 장병들의 공에 따라 각각에게 합당하게 포상을 했다(論功行賞各有差). 바로 여기에서 '논공행상'이라는 말이 유래된 것이다.

무릇 상(賞)이라는 것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상이라는 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는 의식이 만연되어지고 있다. 남이야 어찌 생각하거나 말거나 내 스스로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니 상을 달라고 손부터 내미는 일이 요즈음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받아야겠다'는 일념 아래 천신만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마침내 상을 받고 나면 조금은 개운치 않은 시상 후문이 남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열심히 상을 타겠다고 정치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끝에 상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기조차 하다.

'벌은 자손에게까지 미치지 않고 상은 자손에게 연장하여야 한다'는 율곡 이이 선생의 말씀마저도 이제는 수정되어야 할 판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어느 문학단체에서 문학상 하나를 놓고 양자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투표로 수상 대상자를 뽑았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온다. 특히나 당연히 문학상이니 만큼 수상 대상자의 문학 경력이나 문학작품을 내놓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의견으로 시종일관 점철하다가 마침내는 수상자의 인신공격에 이르기까지 하였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문학상은 다른 상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앞에 '문학'이라는 두 글자가 붙는 상을 놓고 인신공격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실로 비뚤어진 논공행상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서든지 공과에 따라 상을 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므로 엄정하고 분명한 심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선행상이라면 그 '선행'이 가장 중요한 심사 내용이어야 하고, 문학상이라면 그저 '문학'의 모든 범주 아래에서 심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문학상은 '문학' 그 자체만으로 상이 주어져야 모든 문학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짜시인의 단상

 

문학은 정치가 아닌데...

기발한 상상력과 얽매이지 않는 생각, 그리고 고정관념의 해체, 마지막으로 인간본성의 회복을 외치는 '문학'의 공간이 어쩌면 가장 경직된 사고와 서열 매김이 있는 곳이 아닐까 여겨진다. 편가르기와 줄세우기, 입김 작용, 자기 제자 표시나게 챙겨주기 등의 단어가 낯설지 않은 곳이 된 것도 같다. 중앙이든 지방이든 논공행상은 크게 다르지 않나 보다. 상의 권위와 중량감의 차이 이겠으나 그 과정의 불협화음이 경향을 따지지 않고 자주 불거지고 마는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