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하루하루

겉절이_ 우리시회 이동훈 시인 본문

나의 편린들/돌아온 시

겉절이_ 우리시회 이동훈 시인

가짜시인! 2023. 9. 18. 17:03

https://cafe.daum.net/urisi/CWTb/3743?svc=cafeapi

 

겉절이 / 권상진

겉절이 / 권상진 어느 현장에서 품을 팔았는지낡은 봉고차가 식당 앞에한 무더기 일당쟁이를 부려 놓는다 땅거미가 하루의 노동에서 건져낸 저들을척척 국숫집 의자에 걸쳐 놓으면시멘트 바

cafe.daum.net

 

겉절이 / 권상진

 

어느 현장에서 품을 팔았는지

낡은 봉고차가 식당 앞에

한 무더기 일당쟁이를 부려 놓는다

 

땅거미가 하루의 노동에서 건져낸 저들을

척척 국숫집 의자에 걸쳐 놓으면

시멘트 바닥으로 주르륵 흐르는 노을

 

하얀 거품을 저녁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국수가 삶아지는 동안

그들은 종일 다져 온 양념으로 서로를 버무린다

 

잘근잘근, 오늘의 기분을 씹으며

겉절이 한 잎을 반으로 찢는다

너무 길거나 폭이 넓은 슬픔은

적당한 어디쯤에 젓가락을 쑤셔 넣고 주욱 찢어야

비로소 먹기에 알맞은 크기가 된다

 

반쯤 숨이 죽은 채

하루가 치대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국수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

아직은 어디에라도 곁들여지고 싶은

절여진 겉들

 

ㅡ『노을 쪽에서 온 사람』, 걷는사람, 2023.

 

감상 – 봉고차에서 노을 쪽 식당으로 부려진 사람들. 아침 인력시장의 사람들이었을까. 해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저녁 국수를 대접받는 자리였을까. 대개 중간에 참을 내오곤 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고용인이 저녁을 사는 경우는 드물다. 오늘 익힌 일감을 내일도 부탁한다는 뜻으로 국수를 살 수는 있겠다. 혹시나, 적은 일당으로 일을 너무 고되게 시킨 게 미안해서 통 크게 국수를 사는 것일까. 저녁 공기마저 따스해지는 상상이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면, 땀을 함께 흘렸던 일용직 동지끼리 의기투합한 것일까. 이것도 인연인데, 공복에 늦은 저녁에 대어갈 게 아니라 국수 한 그릇 하고 헤어지자는 것이다.

권상진 시인의 시를 읽고 나니, 맛난 국수 한 그릇 제대로 먹은 기분이 든다. 일상의 이야기를 시로 형상화하는 과정에 이렇게 저렇게 그림을 그려 보게 하는 상황을 시집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그 그림에 한참 앉았다가 가면 시집을 읽는 시간이 지체 되겠지만 그로 인해 마음은 더욱 뜨듯해질 것으로 믿는다.

「겉절이」도 한참 머무르게 되는 시다. 국수 먹으러 들른 집, 시인이 주목한 것은 뜻밖에 겉절이다. 겉절이는 배추, 상추 등을 절여서 곧바로 무쳐 먹는 반찬이다. 절이기는 절이되 일반 김치처럼 푹 절이지 않고 양념을 묻혀 겉만 절이고 먹는 식이다.

시장한 사람들 앞에선 국수가 나오기도 전에 겉절이가 팔려나간다. 먹기 편하게 젓가락으로 찢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럿이 고루 나누어 먹기 위해서라도 찢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너무 길거나 폭이 넓은 슬픔”마저도 반으로, 반의반으로 줄어들게 하는 사람살이의 인정스런 모습까지도 시인은 놓치지 않고 그려내고 있다.

하루의 노동에 지친 사람들, 저녁을 나누며 노동을 위로하고 동료를 위하는 사람들 속에 “곁들여지고 싶은/ 절여진 곁들”이란 결구를 만나게 되면, 대충 절이고 만 것이 아니라 폭 삭이고 절인 맛을 다시 느끼게 된다. “것들”이 와야 할 자리지만 “겉들”이 와서 원래 자기 집인 양 너무나 자연스레 앉아 있게 한 것은 시인의 감각이라기보다는 평소 시인의 유머이고 세상을 보는 시선에 닿아 있다.

중심이지 못한 ‘겉들’이나 대우받지 못하는 “것들”이 한데 모인 저녁노을 앞, 겉들과 것들은 어느 누구 부럽지 않은 만찬을 누리고 있다. 그곳에 슬며시 끼여 겉절이를 찢는 권 시인 대신 막걸리를 한 잔 비우고 싶은 마음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