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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스펙트럼/ 권상진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을 읽고_오정순 시인 본문
맛의 스펙트럼/ 권상진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을 읽고
<시인의 말>
돌이켜 보니
가장 진절머리 나는 것도
눈물 나게 그리운 것도
결국엔 사람이었다
-2023년 4월
가짜시인
첫인사에 그만 울컥한다. 나도 사람이 그리웠는데, 왜 나의 외침은 스르르 힘이 풀리는지. 진절머리 나게 그리워하지 않은 탓인가. 진절머리 나는 그리움은 무엇일까.
시집 두 권을 상재한 시인이 아직도 가짜이냐고? 언제까지 그 이름을 쓸 것이냐고 부디 묻지 마시라. 겸손도 아니고 더더욱 자기 폄하는 아닌, 프리즘처럼 시인의 몸을 통과한 은유와 역설에 빠질 거라는 시인이 보낸 초대장처럼 느껴진다. 나는 벌써 가짜시인의 동조자다. 시집을 펼치기도 전에……. 환장하게 사람이 그리운 날에 말이다.
숨은그림찾기
나는 은유된다
빛의 뒤편에서 혹은 너의 시선 너머에서
한 번도 속을 털어놓은 적 없는 나는
틈이 없는 사람
빛의 입자들이 던진 수많은 물음표가
내게 부딪혀 반대편 바닥으로 떨어진다
겉은 사실적으로, 속은 무채색으로
바람처럼 에둘러 지나갈 일인데
끝내 나를 넘어뜨려 놓고 가는
저 빛들, 시선들
저 '검은' 속에 '나 같은’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지
돌아앉아 속속들이 채색하고 싶은 날
프리즘처럼, 나를 관통한 시선이
주초남빨보노파
무지갯빛 그림자로 그려질 수는 없는 것일까
실패한 숨은그림찾기처럼
검은 나를
그냥 지나쳐 가는 저 사람들
나무의자
관절에 못이 박힐수록 의자는
점점 바른 자세가 된다
생각이 무거우면
부처도 자세를 고쳐 앉는데
의자라고
다리 한번 꼬고 싶은 순간이 없었겠는가
못은 헐거워진 생각을 관통하고
너머의 삶을 다시 붙잡는다
돌아눕고 싶은 밤이 있었고
돌아서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온몸에 박혀 올 때마다
나는 자세를 고치며 다시 살아 볼 궁리를 한다
하늘도 긴 날을 삐걱거렸는지
밤이면 못대가리들로 촘촘하게 빛난다
퇴고
버려야 할 것과 고쳐 써야 할 것
조금 불편하더라도
그냥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한 끼 밥이 차려졌다 물려지고
뜬금없는 생각을 새벽까지 받아 적다가
엎드려 잠든 몸을 받아 주던
소반의 한쪽 다리가 삐걱거린다
버릴까 고칠까 그냥 둘까
오래된 이와 시간을 나누다가
어긋나 버린 생각 때문에
반듯하던 감정을 그만 바닥에 쏟았다
고쳐 쓰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둘 수도 없어서
그날
그의 가슴에
못 하나 박고 돌아왔다
배웅
진료 소견서를 받아 들고 가는
4번국도는 어느 행성으로 가는 긴 활주로 같았다
불쑥 이정표들이 나타나
손짓을 하더니 금세 길의 뒤편이 된다
집과 동네와 사람들이 멀어져 간 사이드 미러에
저녁이 배웅처럼 따라붙는다
길가 쉼터에 차를 세우자
코스모스 화단에 걸터앉던 엄마
온통 붉은 서쪽을 바라본다
노을 쪽에서 온 사람처럼
노을 쪽으로 가는 이처럼
노을처럼
사위어 가는 당신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러쥔 옷섶에서 구름의 멍울들이 잡히고
눈뜨면 그 속에 가득한 별들
하늘 하나를 통째로 품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몸속 먹구름이 어느 기억을 지나고 있는지
내 눈동자 속으로 뚝뚝 떨어지던 별
입술로 미끄러져 내린 당신 별은
밤새도록 짜다
접는다는 것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힌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 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 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변용.
그냥
그냥, 이라고
네가 말하는 순간
그는 왼쪽에서 냥은 오른쪽에서
자동문처럼 스르르 닫히고
우리는 견고한 그냥의 앞과 뒤에 서 있다
손잡이가 없는 그냥 앞에
한 걸음 더 다가섰지만
당분가 아무도 인식하지 않겠다는 듯
미동도 없는 문
그냥을 바라보며
나는 슬픔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너는 그냥에 가만히 기댄 채
슬픔에 잘 길들여진 사람이라 대답한다
열 개의 사전과 백 개의 공식으로도 풀리지 않는
천 개의 의문 부호를 가진 말
사랑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냥
이라는 말을 해독할 수 있을 때까지
뒷맛
옆에서 불쑥 손을 내밀었을 때
하마터면 악수를 할 뻔했다
지금 우리는 낯선데
내게 손을 내미는 저의는 무엇인가
거절에 대해서 생각한다
뒷맛을 남기는 씁쓸한 손들에 대해
일치한 적 없는 손금 때문에
아귀가 맞지 않던 생각의 틈들
앞뒤 잴 것 없이 먼저 흔들고 온 날은
기분이 명랑해질 때도 있었다
정산할 수 있다면 몸을 숙이며
손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출구에서 알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내민 빳빳한 지폐가
차단기를 힘껏 들어 올린다
뉘엿한 말
의자를 옮겨 앉던 작은 별 소년처럼
석양을 좇아 차를 달리네
해는 기울고, 산등 같은 내가
먹먹하게 어두워지고 있네
어느 날 네가 내 귀에 걸어 놓고 간
뉘엿한 말을 생각하네
먼 말이었네
오래 내 귀를 물들이던 해 질 녘 같은 말이었네
누구나 슬픔에 잠기면
해 지는 모습을 좋아하게 되는 거라며*
빈 의자를 들고 저녁을 되짚어 오던 소년처럼
나는 저문 사랑에 머뭇거리다 까만 어둠이 되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빌려 옴.
***
권상진 시인의 시집을 읽고 ‘맛의 스펙트럼’이라는 생각을 한다. 시「숨은그림찾기」를 가장 먼저 소개한 이유이다. 스펙트럼이란 빛이나 복사선이 분광기分光器를 통과할 때, 파장의 순서에 따라 분해되어 배열되는 빛깔의 띠라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다.
프리즘처럼, 나를 관통한 시선이
주초남빨보노파
무지갯빛 그림자로 그려질 수는 없는 것일까
-시 「숨은그림찾기 」부분
시집『노을 쪽에서 온 사람』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다양한 관계의 맛이 등장한다. 눈물과 웃음과 불편함과 오독과 반목과 질시와 애잔함과 슬픔. 이별 등등을 달여서 우려낸 맛은 맛본 경험이 있거나 보편적으로 알고 있던 맛이다. 그러나 프리즘처럼 시인의 시선을 관통한 ‘주초남빨보노파’의 맛은 이전에 알고 있던 짭조름하고 비릿하고 쓰고 달고 매운 맛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입에 익은 듯하고, 잠시 잃었다가 찾은 맛이 분명한데 그 맛이 아니다.
사람의 관계도 밀고 당기며 간을 보는 것 같다. 결국 못 하나 박고 돌아서는 발걸음. 삶도 리셋이 가능하다면-내 관점에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성하고 싶지만- 가장 먼저 나를 퇴고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퇴고하는 게 아니라 나를 퇴고하는 것이다. 나에게 못을 내리치는 것이다. 시 「나무의자」의 1,2연 ‘관절에 못이 박힐수록 의자는 점점 바른 자세가 된다’처럼.
너머, 라는 시어에 주목한다. 소개한 시편들 두 곳에서 너머를 발견할 수 있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 주는 일(시 「접는다는 것」)중에서 시인은 숱한 뒷면의 감정들을 슬쩍 흘렸지만 역시 내 혀의 감각은 그 맛을 꼬집어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입 전체에 민트처럼 퍼지는 향기 때문에 그 너머는 은유와 역설의 만찬이라고 확신한다. 밑줄 긋고 오랫동안 음미한다면 권상진 시인이 왜 진짜 시인인지 알게 될 것이다.
감상 목련 오서윤
*권상진 시인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2013년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눈물 이후』, 합동시집 『시골시인 K』를 냈으며 2015년 복숭아문학상 대상, 2018년 경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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