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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꽃무릇 / 성영희

가짜시인! 2019. 12. 18. 18:00

꽃무릇

 

 

               성 영 희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 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 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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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이나 그림전을 일부러 찾아가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참여하는 행사장에 그런 전시회가 함께 열리면 거의 둘러보는 편이다. 딱히 그 분야에 조예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작가들이 포착한 그 순간의 의미를 상상해 보거나, 내 방식 대로 재해석해 보기 위한 것이다.

꽃무릇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나는 사진 한 장을 보고 있는 느낌을 얻는다. 그 사진을 성영희 시인은 이렇듯 잔잔하고 아름다운 문자로 풀어내고 있다. 시인은 마치 사진을 문자로 번역하는 기능을 지닌 분 같다. 한무리 피어있는 꽃무릇에서 '붉은 가슴'을 보고 '꽃을 두고 약속'하는 '헛된 일'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불러내 '파계를 부추키게' 하는 장면들을 상상해낸다. 또 꽃의 이름에서 '허망'을 읽어낸다. 하나의 장면에서 파생되는 사유의 가지들. 그것이 시를 쓰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시의 호와 불호는 시인이 풀어낸 시상과 말하고자 함이 내가 풀어낼 수 있는 그것을 넘어서는가 아닌가의 문제인 것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쓰고자 하는 바가 독자의 관심사와 일치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같은 꽃의 장면을 보고 '아름답다!'를 넘어 기억의 어느 한 부분을 소환해낼 수 있거나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할 수 있다면 모두는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좋은시가 되지 않을까.

 

-가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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