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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뒤란 / 유은희

가짜시인! 2020. 3. 6. 16:03

뒤란

 

                  유 은 희

 

 

넓은 등에 업히고 싶을 때면 뒤란으로 갔다

뒤란은 집의 등이어서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맘 상할 때면

어린 나를 등 뒤로 숨겨 주었다

 

내 귀는 가지처럼 길어져서

앞마당을 엿듣고도 못 듣는 척했다

 

담장 밑으로 뱀 허물 잦아들고

지붕의 박꽃 얼굴이 우는 듯해 보이면

어김없이 저녁은 왔다

 

앞마당 소리들이 톡톡 분질러져

굴뚝 연기로 피어오르면

마음이 매캐하고도 먹먹해졌다

 

두어 번의 부르는 소리가

뒤란으로 난 문턱에서 끊기곤 했다

 

아무도 날 찾지 못하는 곳에 숨는다 해도

누군가는 찾아줄 거라 믿었다

 

모르는 척 나가지 않는 것을

후회하면서도 번번이 숨을 일이 많았다

점점 나를 들키기 좋은 곳으로 숨기는 방법을 알아갔다

 

사는 일로 인해 맘 다칠 때 문득 뒤란을 생각한다

 

등이 넓은 뒤란이 없다는 걸 안 후부터

누가 부르지 않아도 두 손 들고 마당으로 나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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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란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이 시에 끌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공유하지 않던, 유년의 한 시절을 소환해내는 공공연한 비밀의 장소.  

 

나에게도 뒤란이 있었다.  제발로 갔거나 가끔 쫒겨나서 몇 시간이고 나뭇가지로 흙을 긁고 있으면 다저녁에야 겨우 햇볕 한 줌 드나들던 그 곳은 온식구들의 한숨에서 나오는 습기가 한데 모였는지 언제나 축축한 곳이었다

.

내 사색의 절반은 뒤란이었다. 어떤날은 형이 있었고, 또 어떤날은 누나가 죽담에 앉아 생각을 키우던 그곳에서 우리들의 유년은 영화의 장면처럼 흘러갔다.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 곳에서는 엄마의 눈물도 아버지의 한숨도 집의 그림자처럼 그늘졌으리라.

 

어느 것으로부터도 도망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자꾸만 돌아다 보이는 것이 뒤란이다. 이제 어느 곳에도 몸을 숨길 수 없는 천형같은 삶을 나는 살아가면서 고향집과 부모님과 혼자만의 시간을 모르는 척 눈감아주던 뒤란이 자주 그립다.

 

- 가짜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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