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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가짜시인! 2016. 4. 4. 11:18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희 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며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베껴 적는 내내 가슴이 시리다. 쉽게 뱉어내는 한번 만나자는 말, 밥 한번 먹자는 말, 한번 보고싶다는 말은

   이 시를 읽은 후로부터는 허투루 할 말이 아니다. 아마도 목련 그늘이 좋은 집에 놀러 오라는 말은 진심, 보고

   싶다는 말이었을게다. 살면서 자주 진심을 가볍게 여기고 마는 경우가 있다. 슬픈 감정은 그런 진심을 헤아리

   지 못한 것에 대한 지극한 반성일지도 모른다. 늦기 전에 내가 들었던 말과 했던 말에 대하여 움직여야 겠다.

   그렇지 못하면 그 아린 마음이 조등으로 걸려 생각 날 때마다 가슴속에서 흔들거릴지도 모를 일이고, 밤새 목

   련 지는 소리를 듣듯 아주 오래 생각의 소리를 들어야 할 지도 모른다.

   너무 늦지 않도록 인연있는 이들에게 달려가야겠다.

 

   - 가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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