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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기쁨

가짜시인! 2014. 6. 8. 15:18

 

영하의 날들

 

  

                       권 상 진

 

 

이 골목은 열대의 모세혈관

쪽문 깊숙한 곳까지 폭염을 나르던 적도의 시간들이

출구를 헤매는 골방에서

노인은 지팡이와 함께 싸늘하게 발견 되었다

 

직립의 시간은 끝난 지 이미 오래인 듯

폭염을 등에 진 채 골방에 ㄱ 자로 누운,

저 경건한 자세가 되기까지 열대의 밤은

블랙홀처럼 폭염을 빨아들였을 것이다

 

극한의 외로움은 영하의 온도를 지녔다

버려진 시선들만 싸락눈처럼 쌓이는 골목 어귀는

외로움의 온도가 연일 기록적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홑청 같은 그의 피부에 살얼음이 얼던 날

맹렬하게 그의 체온을 데우던 열대의 밤은 결국

조등인 양 달을 대문 밖에 내걸었다

 

열대의 대륙에서 견뎌야 했던 영하의 날들이 저문다

강변 공원에 삼삼오오 몰려든 사람들

시린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폭염을 견디던 그들은

부의처럼 더운 심장을 강바닥에 내려놓고

자정이 지나도록 돌아갈 줄 모른다

 

빙하기 지층처럼 견고하던 얼굴에서

겹겹의 표정들이 차례로 녹아내린다

사람의 끝에서도 꽃이 피다니,

오래전 퇴적된 노인의 미소가 환하게 한 번 피었다 진다

 

생의 아슬한 등고선에 기대 사는 지표 인간들

빈방이 하나씩 늘어나면서부터

여기까지가 사람의 경계라는 듯

골목은 폭염을 다시 들이고

인적 없던 골방마다 간간이 낯선 인기척들

걱정스레 쪽문을 밀치고 있다

 

 

 

이 시를 읽은 지 오래 되었다. 2013년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이다. 만일 시인의 책무가 부여되어 있다면 이 시는 현실의 문제에 눈 돌리지 않는 증언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고 보여진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냉정한 시각으로 현장을 스케치하는 시인의 내공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현란한 비유의 함정에 빠져 시의 말을 공허하게 휘발시키는 시들이 몰려다니는 요즘 세태에 묵직하게 시심을 눌러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시를 읽은 지 오래 되었으나 함부로 글을 올리기가 두려웠다. 1916년 병진년 생인 아버지의 고독한 죽음이 떠오르고, 고독사가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그날부터 시작된 천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몽골 평원의 유목민처럼 죽음을 앞둔 부모를 광야에 버려두고 떠나는 자식들과 하늘을 우러르며 독수리에게 제 몸을 던져주며 죽어간 사람들의 마지막 운명의 순간이 겹쳐지며 뇌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용기 있는 삶이다.

 

 

- 나호열 시인님이 블러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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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면서 몇 번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 처음은, 근 10년 전 쯤 되었을까? 경주 문예대학에서 난생 처음 시 공부를 하고 졸업 작품집을 냈을 때, 이름도 성도 모르는 이미 등단한 선배께서 연락처를 찾아 문자 메세지를 주었다. 시가 참 좋다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단문의 메세지 였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지금까지 시를 포기하지 않고 나를 지탱해 온  힘의 근원이었을 거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 선배는 머지않아 시조로 전향을 하고 각종 전국 규모의 백일장을 평정하고 천강문학상을 수상하고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백점례 시인이다. 아직까지도 힘들거나 그냥 생각힐 때 연락을 주고 받거나 만나서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이로 힘이 되어주고 계시는 분이다.

 

두번째는 성기조 시인께서 발행인으로 있는 계간 「문예운동」에 신인추천 되었을 때였다.경주문예대학을 수료하고 5년 후 은사이신 이근식 시인님께서 갑자기 원고 10편을 준비해서 댁으로 오라 하셨다. 영문도 모른 채, 그때까지 시에 대한 갈증을 풀지 못하고 혼자서 되든 안되든 시의 즙을 짜고 있던  나는 습작시 중 몇편을 추려서 선생님 댁에 가져다 드렸고 며칠 후, 공부한 시간도 어느정도 되었고 이제 등단해도 욕은 먹지 않을 정도는 되는 것 같으니 추천을 하시겠다 말씀하셨다. 사실 좀 더 큰 꿈이 있었지만 은사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고 또, 혼자 힘으로 등단하기란 영원히 불가능 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또한 순간 결정을 하게하는 요인이 되었다. 물론 추천한다고 모두 신인 당선이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지만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몇일 잠을 설쳤던 기억이 아련하다.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성기조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이근식 선생님 댁으로 찾아갔을 때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기본은 가르쳤으니 이제 쓰고 싶은 시를 마음대로 한번 써보란 말씀은 아마도 시를 쓰는 내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말씀으로 남을 것 같다. 배움의 단계에서 받는 시의 형식과 표현, 단어 구사에 구애 받지 말고 내가 의도하는 대로 써 보라시는 말씀을 듣는 그 순간이 참으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번째는 경주문예대학 무슨 행사에서였던 것 같다. 시낭송의 기회가 있어서 낭송을 마치고 자리에 앉는 순간 누군지 모르는 여성(아마 후배 기수 였던 것으로 생각 됨) 한 분이 내게로 와서 낭송 시가 인쇄된 유인물의 나의 졸시 페이지를 펼쳐 들고 사인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 당해본 일이라 얼떨결에 이름 석 자를 적어준 것이 전부 였지만 정말 묘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네번째 기쁨은 블러그 활동과 함깨 찾아온 월간 「모던포엠」전형철 발행인님을 만난 것이다. 그 분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간에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참으로 귀한 분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공모전도 스스로 재주없음을 인정하고 거의 포기할 때였으므로 그간 써온 습작들을 정리나 해 둘 요량으로 블러그에 올리고 정리하던 때에 우연히 전형철 발행인님께서 내 블러그를 방문하신 것이다.그리고 얼마 후 전화 통화 요청을 하셨고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드린 것이 그 분과의 인연이 시작 된 것이다. 그 해 4월호에 이달의 시인 지면을 주셨다. 지방에 이름없는 가짜시인으로 살고있던 내게 큰 지면을 주신 것에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혹시나 짧은 글이 모던포엠에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 분은 더불어 용기까지 함께 덤으로 주신 것이다. 그 후 몇편 써두었던 글들을 모던포엠에 매월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내 글은 장롱에서 지면으로 그 자리를 옮겨 갈 수 있었다. 첫번 째 포기의 순간에 나를 지켜주신 분이기에 마음 속으로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며 지내고 있다.

 

다섯번째가 전태일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시 공부를 시작한 지 10년이 가까워 오는 시점에서 혼자 하는 공부는 스스로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시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그래서 이래저래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그 때까지의 내 위치를 알 수 있는 지표란 계간「시인세계」예심 통과가 전부 였고, 두어 번 도전해 본 공모전이나 신춘은 그 소식이 없어 포기까지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다행이 그해 초에 지인들과 스터디 모임을 잠시 가지면서 시와 연을 끊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중도하차를 해야 했었다. 그러던 중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투고한 전태일문학상이 내게 새로운 전환점을 선사해 주었다. 마치 사막에서 얻은 한 줄기 생명수와 같은 느낌이랄까. 나의 무능과 시적 재능 없음을 비관하며 글을 놓으려 할 때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나를 붙들어 준 정말 귀한 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쁨과 함께 어떤 다른 절망감도 함께 내게 주고 말았다. 나중에 어떤 시기가 오면 나는 이것에 대해 말 할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 부분은 묻어 두기로 한다. 

 

마지막은 나호열 시인님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이 글을 적는 것 또한 그 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블러그 활동을 하면서 자료를 찾던 중 선생님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 분의 성함은 이미 지면을 통하여 알고 있던 터라 찬찬히 그 분을 읽고 느낀 후에 인사겸 친구신청을 했는데 받아 준 것이었다. 시를 쓰면서 가장 힘든 일은 소외감을 느끼는 일이다. 연도 없고 줄도 없는 지역 시인이, 읽어줄 이 없는 시를 혼자 쓰다가 고뇌하다가 지쳤다가 쓰러져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생면부지의 촌뜨기 어린 시인 지망생은 힘겨울 때마다 그 블러그를 찾았고 가끔은 푸념을 또 가끔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왔는데  선생님께서는 정말 신기하게 그럴 때마다 내 어깨를 다독여 주셨다. 물론 선생님께 나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마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느꼈는가 하는 것이다. 아직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고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지만 그냥 마음으로 의지가 되는 그런 분이다. 야생화가 아름다운 것은 누군가에게 발견 되었을 때이다. 너른 들판이나 깊은 산속에 제아무리 아름답게 피어있은들 그것은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 의해 읽혀지지 못하는 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뿐이다. 다만 쓴 사람의 자기위안 정도가 아닐까. 적어도 시인의 시는 발표 되어 독자에 의해 읽혀졌을 때 호흡이 생기는 것이다. 치열하게 고민한 나의 시가 읽혀져 생명을 얻는 순간, 더불어 비평이나 호평을 부여받는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얻는다. 물론 비평일 경우에는 기쁨 보다는 존재감 정도를 느낄 뿐이겠지만 말이다. 졸시를 시간내어 읽고 감상을 써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것이 시를 하는 사람의 최고의 기쁨이란 것을 알았다.

 

위에 이름이 있는 분들께는 밥을 한번 사드리고 싶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있어 정말 중요한 일이다. 단체나 의례적인 일로 함께 먹는 밥이 아니라면 나는 이 밥 먹는 일 만큼은 아무나와 나누고 싶지 않다. 된장찌게나 값싼 자장면이나 국수 한 그릇을 먹더라도 마음이 가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서로를 잘 모르는 사람과 어색하게 앉아 밥을 먹는 상상은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말이다.

아직은 가짜시인이지만 언젠가 진짜시인이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시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읽힐 때 미안하지 않은 시를 쓰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본다. 시를 쓰는 기쁨이란 결국 누군가 나의 시를 읽어 주는 것이란 것을 알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다시 이런 글을 쓰기를 원한다. 고마운 이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나열하고 고마워하고... 그러기 위해서 읽을 만한 시를 먼저 써야 하는게 우선이다.

시를 쓰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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