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새의 풍장 / 한교만 본문

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새의 풍장 / 한교만

가짜시인! 2013. 10. 28. 19:07

 

새의 풍장

  

                          한교만

 

 

푸조나무 밑에 여행가방 하나가 버려져있다 무정형의 폐기물 잠금장치

가  풀리지 않아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어느 저녁쯤에야 반쯤 열린

가방 안에는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목록들이 가방주인의 취향대로 꼼꼼

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공중을 날기 위해 모든 목록들은 초경량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이렇게

가벼운 것들만 넣고 다녔으니 여기까지 쉽게 날아올 수 있었으리라

 

실밥이 풀린 안주머니에는

기내식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는데

여독(旅毒)을 잘게 부수기 위한

옥수수 콘 몇 알과

출처가 불분명한 모래들

월동지의 메뉴가 소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차적응에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동거리를 재는 손목시계는 날짜변경선에 부딪치면서 가방 한쪽 구석

에 찌그러져 있었다   버려지기 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째깍거렸던  들

숨과 날숨이 동시에 멈춰있었다

 

긴 여행이 끝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가방의 잠금장치를 푼 바람이

내장을 말끔히 비우기 위해 좁은 통로를 들락거리고,

 

십진법의  아라비아 숫자들 몇 개 나무 그늘 밑에 떨어져 있다   비밀번

호를 해제하기 위해 여러 번 쪼았는지, 끝이 너덜너덜하게 해진 바람의

부리

 

 

[ 2013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수상작 ]

'나의 편린들 > 내가 읽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숨의 기원 / 고영민  (0) 2013.11.19
[스크랩] 시인 선서/ 김종해  (0) 2013.11.08
그 의자 / 박경조  (0) 2013.10.16
바람의 식사법 / 이종섶  (0) 2013.10.12
사십세 / 맹문재  (0) 201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