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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숨의 기원 / 고영민

가짜시인! 2013. 11. 19. 11:27

 

숨의 기원 / 고영민

 

1.

  이불 밖으로 나온 딸아이의 다리를 슬며시 이불 속으로 넣어줍니다.아이는 슬며시 눈을 떠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잠은 다시 딸아이의 눈을 감기고 가슴을 부풀려 숨을 고르고 세월을 만듭니다 숨소리는 영혼이 나갔다가 갈 곳이 없어 다시 제 집을 찾아오는 아득한 소리입니다 날숨은 어제 같고 들숨은 오늘 같습니다

 

 

2.

  팔을 뻗어 딸아이가 제 어미의 옷섶에 손을 찔러 넣습니다 아내가 잠결에 슬몃 눈을 뜨고는 벽에 기댄 채 무릎을 안고 있는 나에게 왜, 안자고 있어? 라고 물어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묻는 것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가만히 그러쥘 때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을까요 무언가를 가만히 쥐고 싶어 부러 빈손을 한번 움켜쥐는 밤입니다 나는 등으로 전해오는 냉기와 이불 밖으로 잠깐 삐져나왔던 딸아이의 한쪽 다리와 작은 손에 쥐어진 아내의 따듯한 유방을 생각합니다

 

3.

  딸아이도, 아내도 숨이 깊어집니다 일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합니다 아이의 숨은 짧고 아내의 숨은 더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발품입니다

 

  이제 앞강으로 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이 차갑게 알을 슬어놓고는 한 生을 전해주려 떠내려 올 시간입니다 방안은 온통 숨소리뿐입니다 나는 딸과 아내의 숨소리 사이로, 내 숨소리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어디를 갔다 오는 곡절입니까,

  기척입니까

 

 

♥가짜시인의 단상

 

시란 세상에 없는 것을 쓰는 일이 아니다.

존재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삶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당황하는 순간, 그것을 헤쳐나가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처럼 건네줄 수 있는 것이 시의 진정한 역할이 아닐까.

시인은 세상에서 한 발 물러설 수 있어야 한다.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한 생각을 쉬어야 하고 한 걸음 세상에서 멀어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시인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그렇지 못한 지친 이들의 허기와 갈증을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 소통이란 그런 것이다.

좋은 시란 밑즐을 그어가며 함수를 풀듯이 계산하고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맞아맞아'란 말과 저절로 끄덕여지는 고

개의 동작으로 판단되어져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영민 시인은 그것을 '시의 문'이라 말했다.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문을 시는 가져야 한다고... 문이 너무 크면 다 아는

이야기가 되고 너무 작으면 독자가 시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 시인은 독자를 배려해야 하는 미덕을 지녀야 한다.

'숨의 기원'을 대하면서 나는 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몇 줄 읽다보면 눈은 행을 달리고 있는데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시는 누구나 경험해 보았음직한 사소한 일을 소재로 삼았지만 그 순간을 매개삼아 생각을 확장하

고 사유의 깊이를 넓혔다. 경험 했기에 공감할 수 있었고 경험하지 못한 시인의 생각까지도 고개 끄덕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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