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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시집 『시골시인-K』(2021, 걷는사람)

장편

가짜시인! 2021. 10. 13. 13:40

장편

 

               권 상 진

 

 

서재에 들어섰을 때

죽음은 그의 결말을 읽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죽음과 나는 어스름한 그를

가끔 만지고 또 지켜보았다

그가 여린내기로 숨을 고르다

못갖춘마디로 말끝을 흐릴 때

흠칫 놀라 떨리는 입술에 귀를 대보던 죽음은

공중에 떠도는 마지막 말이

바닥에 내려앉기를 기다렸다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침묵을 가만히 당겨와

적요한 얼굴을 덮어주었다

순간 또 다른 목소리들은 공중에 생겨나 음악이 되고

젖은 악보에서 그가 다 쏟아져 나온 후에야 길을 내준다

한 때 그를 나눠 가진 이들은

함께 머물던 페이지를 다시 뒤적이며 

국화꽃 책갈피를 꽂아 놓고 자리를 떴다

죽음이 그를 모두 읽는데 꼬박 칠십사 년이 걸렸다

그 길었던 서사의 마지막 장을 덮는 날

그가 서가 한 귀퉁이에 가지런히 꽂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