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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천천히 와 / 정윤천

가짜시인! 2019. 8. 16. 10:04

천천히 와 

                      

                     정윤천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귀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호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만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시집 『구석』(실천문학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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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했던 친구가 나타나지 않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전화를 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앞 선 마음은 걱정이겠으나,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면

누구는 빨리 안 온다고 핀잔을 주겠고, 어떤이는 먼저 준비하고 기다린 시간에 화도 치밀겠다.

하지만 천천히 오라는 말.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말이다. 너만 무사히 내 앞에 나타나 주기만하면 된다는 뜻이다.

너에게 한 말이지만 그 말, 해놓고 나니

다급한 너는 평온해지고, 말 한 나도 어느새 잔잔해지는

축복 같은 말이다. 

 

- 가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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