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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8년 신춘문예 당선 시의 양상과 현대시의 흐름-유창섭 前) 월간 모던포엠 주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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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8년 신춘문예 당선 시의 양상과 현대시의 흐름-유창섭 前) 월간 모던포엠 주간)

가짜시인! 2018. 1. 25. 09:02

<2018년 신춘문예 당선 시 작품 읽어보기>

 

2018년 신춘문예 당선 시의 양상과 현대시의 흐름

-----시인 유창섭 (전 월간 모던포엠 편집주간)

 

 

 

매년 그랬듯이 신춘문예 당선 시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 2018년에는 26개 신문사의 신춘문예 시 당선작품을 중심으로 전체를 조망하고 앞으로의 방향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매년 같은 반복적인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춘문예작품에 대한 기대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뜻도 되겠다.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많은 당선작품()를 읽어보며 그 시대적 흐름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짚어보기도 하면서 전체를 조망하여 본다는 일은 아무렇거나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러한 매년의 행사에서 그 시적 변화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전반적인 개선이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도 정리해 보면서 우리 시문학이 발전하게 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믿음은 여전하다.

이미 월간 모던포엠에 신춘문예 당선 시를 펼쳐보는 시도를 하고, <신춘문예 당선 시 작품 읽어보기>시작한지도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런 시도를 해온 필자도 매년 어떤 매너리즘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여 이 내용의 변화를 시도하려고 하고 있지만, 계속성이라는 형태나 또한 비교나 자료의 정리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다른 형태로 부분적인 변화를 크게 주기에는 부족하였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1. 금년 신춘문예 작품의 경향

 

1) 산문시의 비중 증가

 

작년까지만 해도 당선작품이 자유시 형식을 가진 시가 대부분이었고 산문시가 주춤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금년에는 25개 신문사의 당선작품---영주신문은 당선작을 내지 않음으로 제외---14개 신문사의 작품이 자유시 형식으로 파악되었고, 11개 신문사의 작품이 산문시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산문시적 경향이 다시 강화되는 조짐을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시의 형식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경향은 시적 전개방식이나 이미지의 투사방법이 다소 차이를 보이는 것이므로 형식적 경향도 중요한 변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2) 시적 내용의 변화

 

익숙함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혹은 낯설게하기를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새로운 시도가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그렇다보니 시적 진술이 거칠어지고 건조한 산문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시창작을 지도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그런 방향으로 끼어든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시 속에서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우리말의 음보율이나 내재율조차도 벗어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르지만 시적 운율은 고사하고 매끄럽고 단단하게 쓸 수 있는 시적 문장도 가급적이면 거칠고 건조하게 표현하려는 풍조가 엿보인다. 이것은 매우 표피적인 일탈로서 시적 본질과는 어울리는 일도 아니다.

또한 당선작품 중에서도 다시 난해한 언술의 비틀기나 환상적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장치하려는 움직임도 부분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앞으로 시적 실험이나 변화가 다시 난해함을 무장하여 시의 난해함을 부추기게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1980년대의 해체시나 2000년대의 환상성, 엽기성, 난해성으로 치장된 언술로 기존의 문법으로는 도저히 독해되지 않는 시를 선보였던 유사성을 가진 새로운 시도가 등장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매년 그러한 시도가 몇 군데서 발견된 적이 있다는 점은 기억되지만 뚜렷하게 그 경향을 읽어내지 못할 정도로 난해한 비틀기가 등장한 적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금년에 나타나는 그런 경향은 다소 난독의 수고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할만하다고 생각한다.

 

 

2. 심사위원들의 세대교체

 

자주 언급되었던 심사위원들의 쏠림현상은 다소 정리되어 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직도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2018년에는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위원이 전년 이전에 비해 상당히 세대교체가 되고 있다는 긍정적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26개 신문사의 심사위원 중 2곳에서 중복되는 심사위원(밑줄)도 나희덕, 손택수, 정호승, 정찬일 등 4인이 다른 회사의 심사위원을 겸하고 있다는 면은 부정적 현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의 면면을 보기 위해 심사위원 명단을 정리하여 본다.

강원일보(이영춘, 고진하) 경남일보(이광석, 배한봉) 경상일보(이건청) 경인일보(김명인, 김윤배) 경향신문(장석남, 최정례) 광남일보(이대흠) 광주일보(나희덕) 국제신문(정일근, 조향미, 손택수) 농민신문(곽재구, 함민복) 대전일보(이시영, 이정록) 동아일보(김혜순, 조강석) 매일신문(송재학, 이광호) 무등일보(김준태) 문화일보(황동규, 정호승) 부산일보(강은교, 강영환) 불교신문(고은) 서울신문(이문재, 나희덕) 세계일보(최동호, 황인숙) 영남일보(이하석, 장옥관) 영주일보(정찬일, 김효선) 전북도민일보(소재호) 전북일보(이운룡, 박남춘) 조선일보( 문정희, 정호승) 한경신문(김수이, 문태준, 박상수) 한국일보(박상순, 손택수, 김민정) 한라일보(김광렬, 정찬일)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 많은 시인이나 평론가들이 존재하는데도 그 중에 그 심사위원이 중복되어 심사에 참여하게 되는 일도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심사위원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여 자제하는 문학적 풍토를 형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3~4십년 이상 심사위원을 독식하고 있는 시인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그리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까지 몇 십 년 동안 그 정도로 군림하였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스스로 사양하고 명예를 지키며 물러나는 지혜를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3. 심사의견을 통해 유추類推해 보는 좋은 시의 시사점示唆点

 

몇 몇 신문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시적 다양한 시적 발현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 속에서 자기만의 오롯한 시적 세계를 개척해 내는 일이 시인들에겐 중요한 일이다.

내용도 사드문제, 세월호, 노마드('떠돌이'로 표현되는 현대 직업사회의 군상들), 디아스포라(국내로 들어오는 고려인 혹은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가족들), 사랑과 평화, 자연과 인생, 노동문제, 농촌과 공동체 사회의 붕괴,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개인적 정서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트럼 속으로 '불나비'처럼 날아드는 각양각색의 문제를 포착하는 작품들이 많았다(무등일보)고 평가하고 있는 공통점이 보인다.

그렇다면 시인들이 시를 창작하면서 앞으로도 더욱 치열하게 탐구해야할 내용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러한 관점 또한 신춘문예를 통해 스스로 고민하고 터득해 나가야할 덕목이 아닐까 생각하여 각 신문사의 심사위원이 심사의견에서 피력한 부분 중에 새겨둘만한 내용을 14가지로 정리하여 보았다.

 

1) 삶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과 새로운 진술로 승화시키는 힘을 가진 시

시가 얼만큼 문학적 진정성을 획득하고,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과 새로운 진술로 승화시키고 있는가 (강원일보)

2) 서정적·전원적 상상력을 보여주거나 삶을 성찰하는 작품이 많았고, 사회적 문제나 문명 비판적 의식을 담은 작품, 실험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적었다.

신인의 시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개성과 패기가 있는 참신한 상상력이다. .....가장 큰 문제는 관념과 감정의 과잉이었다. 묘사가 산만하고, 시적 긴장감이 느슨한 시, 주제 의식이 치밀하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경남신문)

3) 절실한 직관이나 영감을 잘 짜여진 언어로 구조화해내는 특이한 말하기의 방법

시는 독창적인 말하기 방법의 하나다.....지극히 절실한 직관이나 영감을 잘 짜여진 언어로 구조화해내는 특이한 말하기의 방법이다......응모작들이 너무 헤프게 말들을 쓰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쓰다 보니 시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시의 길이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꼭 필요한 말들의 결집이어야 하는 것이다. 시는 무잡한 상념의 나열이나 욕구불만의 배설물이어서도 안 된다.(경상일보)

4) 정확한 문장을 통해 구체화되는 생각

엉뚱한 단어로 문장을 조립 교체하여 새로운 감각을 만들려는 시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적확한 단어가 놓일 마땅한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은 구체화되고 발전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다. 정확한 문장을 통해 구체화되는 생각, 그 생각이 이행 혹은 비약하면서 깊이를 얻고 새 길을 찾을 때 시에 힘이 생긴다.(경향신문)

5) 문장의 근본인 띄어쓰기에 서툴거나 문법적 결함을 보인다는 점

여러 투고작들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가, 시어의 운용에는 그럴 듯한 경지를 보여주면서도 문장의 근본인 띄어쓰기에 서툴거나 문법적 결함을 보인다는 점이다. 기본기가 안 되어 있으면서 시적인 언술을 익히는 연습에만 매달렸기에 그런 웃지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일 게다. .......

투고작들은 대체로 시대의식이나 거대 담론을 말하지 않았다. 언어 실험을 통한 언어 너머를 탐구한 작품도 별로 없었다. 리얼리티를 통해 현실을 묘사하거나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시 속에는 삶의 모습마저도 풍경으로 머물고 있었다. 견자의 시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상과의 거리가 일정한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 설령 시적 화자가 그 풍경 속에 있을 때도 바라보는 자의 시선만 남아 있었다. 삶이나 풍경에 투신하거나 그곳에서 뒤섞여 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광남일보)

6) 삶과 시에 대한 예각적 인식의 부족

수사의 과잉이 사물과 현실을 왜소하게 한다. 문장들은 매끄러우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미지는 넘치나 소비되기에 급급하다. 또한 전반적으로 삶과 시에 대한 예각적 인식보단 장황한 요설과 실험실에서 배양된 인위적 표현들이 유사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신문)

7) 노래가 되고 싶어서 춤까지 추는 언어를 찾아내는 일

사람의 눈에 닿으면 동행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말이 있다. 노래가 되고 싶어서 춤까지 추는 언어가 있다. 시인은 그 율려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런 노래는 시인의 깊은 마음 바닥을 짚고 나온다....... 때론 현란하고 모호했으며, 오랜 학습의 지층에 눌려 화석화된 문자도 있었다. 화장이 지나쳐서 돌비늘이 된 언어들도 있었다. 언어와 표현법 뒤에 숨지 않았다. (대전일보)

8) 다층적 은유에 의해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

소재를 다층적 은유에 의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여줬다. 시가 감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과장으로 치닫거나 지적 퍼즐로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도되는 이즈음에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지닌 신인에게 출발의 즐거움과 불쾌하지 않은 부담감을 함께 안겨주는 것이 제법 그럴듯한 일......(동아일보)

9) 특별한 발화법과 상상력을 보여주는 일

어떤 시는 더욱 특별한 발화법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가족과 모성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을 서사로 끌고 가지 않고 점묘법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부분마다 집중해서 전체를 보여주는 기법은 자신이 생성하는 이미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 (매일신문)

10) 자기만의 개성적 시의 세계를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컴퓨터'가 너무 범람하는 듯하여 염려스러웠다.

....... 이 단형에 너무 맛들이면 우선 다른 시들도 지나치게 '애매함(ambiguty)의 미학'에 빠지고 시를 이끌고 나가는 에너지, 대범성, 추진력이 쇠하게 되어...시작에 노쇠현상이 빨리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무등일보)

11) 시는 인간 삶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은 사고와 이해에서 나온다

시는 말과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은 사고와 이해에서 나온다는 점을 투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우리 삶과 유리된 채 공연히 초현실적으로 매끄럽게 톡톡 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이 앞선 작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일보)

12) 지나치게 비틀어서 소통 불가능할 정도의 문장이 많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이며 말초적인 작품들에서 삶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들이 상투적인 표현으로 흘러 미학적 성숙도도 많이 떨어지고 상상력의 고갈도 보여준다.(부산일보)

2000년대 이후 서정시의 갱신은 탈주체의 문제나 문법적 해체와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주체가 불분명한 진술들과 지나치게 비틀어서 소통 불가능할 정도의 문장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과 비약이 항상 새로움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서울신문)

13) 발상의 신선함과 표현의 적절성으로 삶을 바라보는 인식의 깊이가 필요.

흔히 보아왔던 개인적 발화에 가까운 소통부재의 언술이나 실험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책임방기(責任放棄)의 시편들이 확실히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신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편들보다 익숙함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 눈에 띄어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다. (영남일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상의 신선함과 표현의 적절성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삶을 바라보는 인식의 깊이다.

시는 정서의 고양(高揚)이다. 또한 시에서의 표현은 삶의 통찰력에서 오는 시인의 사유다. 그 사유의 세계는 일차원이 아닌 다양하게 뻗어나가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상력에 젖어들게 한다. (영주일보)

14) 추상적이고 몽환적인 언어의 춤이 지나치게 현란해 시의 본질을 잃고 있다

제재들은 자꾸 대칭하며 조화해 가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시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전북도민일보) 혹은 시들이 너무 어려웠다는 의견이다. 해독이 불가한 암호와도 같은 난독증을 일으키는 시들은 화성악을 내치며 유리창에 스티로폼을 긁어대는 것처럼 불편한 불협의 음을 차용해 시종 들이대는 난해한 음악을 읽는 것 같았다.(전북일보)

마치 아이돌 가수들이 현란한 춤 동작을 앞세우다 정작 노래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신춘문예 투고 시 또한 추상적이고 몽환적인 언어의 춤이 지나치게 현란해 시의 본질을 잃고 있어 안타깝다.(조선일보)

 

위에서 언급한 사항들은 앞으로 신춘문예작품에 응모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이라기보다 시인들이 시를 쓰면서 자주 놓치는 것들에 대한 반성의 한 덕목으로도 필요한 내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2018년 신춘문예에서 당선작으로 선택받은 시들이 모두 이런 기준점을 통과하고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새로운 시 세계를 열어가는 데에도 이러한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극복하여나가야 한다는 하나의 시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4. 신춘문예 당선 시에 대한 감상

 

신춘문예 당선시에 대한 개별적인 감상은 심사위원들의 감상이나 당선이 된 충분한 시적 깊이와 내용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심사평에 붙여져 있으므로 그러한 의견에 반하여 논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시를 보는 각 감상자의 가치관이나 시론에 따라 차이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므로 주어진 자료에 대한 감상평에 기대어 자신의 감상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이 좋은 감상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시 감상에 대한 정답은 없다.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시를 감상하는 것이므로 옳고 그름도 없다는 점을 밝힌다. 따라서 각각의 당선 시에 대한 필자의 관점을 담은 [덧붙이는 시 감상]이라는 형태로 붙여 보고자 한다.

 

 

5. 2018년 신춘문예 당선 시의 발췌와 심사평 요약 (26)

 

 

[2018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가위질은 이렇게' / 이인애

 

 

엄마의 엄지와 약지는

사이에서 놀고 있는 손가락들을

움직이게 하는 두 가닥의 힘이다

엄마는 매일 아침

낮은 간판 아래 무릎을 꿇는다

빠져나갈 구멍만 있으면, 하며 집을 나와

미장원 열쇠구멍이나 찾는 엄마

날이 마모된 커트용 가위가

정수리에서 밀려나온 머리카락을 씹는다

언젠가부터 밥알도 질기다던 아버지처럼

잘근잘근 이로 뭉갠 머리카락을 토한다

중심에서 멀어진 것들은 잘라내야 한다는 생각

아버지가 다니던 석재공장에서도

돌가루처럼 번져갔던 걸까

남편의 까맣고 윤기 나는 직장을 두 동강 내는

엄마의 가위질을 탓하는 점쟁이

눈 뒤집힌 말들, 미용실 바닥에 쌓인다

 

가위질 하는 두 손가락 사이에서 졸고 있는

검지나 중지보다도 가늘어진 아버지를

자를 때가 왔다는 통보가 왔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다 오던 날

엄마는 가위가 돌아간다고 했다

손가락이 자꾸만 구멍에서 빠진다고

아버지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줬다고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서민적 삶의 애환 보편적인 정서로 잘 그려내

 

........ 시가 얼만큼 문학적 진정성을 획득하고,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과 새로운 진술로 승화시키고 있는가를 눈여겨봤다. .........이인애의 작품은 완성도가 높고, 체험을 바탕에 깔면서 서민적 삶의 애환을 보편적 정서로 잘 그려냈다. 젊은 감각과 번뜩이는 사유의 깊이를 내장한 20대 문청의 시를 세상에 내보내는 기쁨을 누렸다. ----[심사위원 ; 이영춘 . 고진하 시인]

 

[덧붙이는 시 감상]----곤궁한 삶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어머니가 미장원을 운영하여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녹아들어있다. 석재공장을 다니던 아버지가 타계하는 날의 모습까지의 삶의 애환을 감각적 필치로 잘 그려낸 시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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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등대- 유하문

 

 

지붕 낮은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엎드려 있는 작은 마을 앞 바다에 방파제가 두 팔 벌려 마을을 넘보는 거센 파도 막아 줍니다. 근심 끝에 파수병 하나 하얀 총 들고 서 있습니다.

 

멀리 부레옥잠처럼 떠 있는 형제 섬들 너머로 아침나절 조업나간 배들이 돌아오고, 서녘 하늘 피조개 속살 같은 노을이 만선한 어부들 얼굴에 단풍으로 피어났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면 보초선 이등병이 아직 귀환하지 않은 전우들을 위해 반딧불처럼 기별을 보내고, 육지에선 촛불이 활화산 마그마처럼 흘러 바다까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서서 어두워진 바다를 바라보며 소매 끝 눈으로 가져가는 노모와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우리들의 아버지는 작은 촛불 켜고 착착착 잘도 돌아옵니다.

 

아침에야 걱정 거두고 잠이 든 등대 안쪽 부두엔 옆구리 맞대고 늘어선 배들이 잠시 낮잠을 잡니다. 수협 앞에서 파시가 펼쳐지고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등 푸른 지갑을 엽니다. 돈 좀 챙긴 아버지들 소주 몇 잔 나누며 서울 간 자식 걱정에 한숨 자다가 또 바다로 나갑니다.

 

 

유하문 씨 약력 1958년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한국해양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수상 대전 재수종합반 학원 국어 및 논술 강의

 

 

 

[신춘문예 '' 심사평]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 집요하게 잘 살려

 

......... 서정적·전원적 상상력을 보여주거나 삶을 성찰하는 작품이 많았고, 사회적 문제나 문명 비판적 의식을 담은 작품, 실험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적었다.

신인의 시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개성과 패기가 있는 참신한 상상력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고유한 자기 세계를 힘차게 밀고나갈 때 다소 거칠고 모자라는 점이 있을지라도 그 가능성에 큰 신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응모작의 상당수가 신인다운 참신한 특징을 보여주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관념과 감정의 과잉이었다. 묘사가 산만하고, 시적 긴장감이 느슨한 시, 주제 의식이 치밀하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유하문씨의 등대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의 일상을 등대라는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 부분적으로 이미지의 낯익음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상상력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언어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신뢰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를 집요하게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 진입시키려는 노력이 시적 긴장을 유발시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붙잡았다. [심사위원 ; 이광석·배한봉]

 

[덧붙이는 시 감상].........섬을 지키며 길 잃은 배들을 인도하는 등대의 모습과 그 겨울 광화문 광장의 촛불이 마그마처럼 흘러넘치던 촛불 현상을 민심의 등대로 접목시켜 등대의 상징적 이미지로 확장시킨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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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롤러코스트 - 이온정

 

 

놀이 공원엔 비명이 꽃핍니다

도대체 어떤 믿음이 저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걸까요

믿음은 힘이 세고

구심력과 원심력에 매달려

아찔한 생을 소진하고 있는 걸까요?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없는 이 놀이는 무섭습니다

현기증을 다독이며 회전하는

공중의 수를 서서히 줄이기로 합니다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돌리던

저녁의 둘레를 줄이면

둥근 공포는 야광으로 빛날까요

노랗게 질릴수록 안전 운행을 믿지만

믿어서 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힘이 센 믿음에서 이탈하고 싶지만

굴곡의 운행은 중도하차를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존재의 끈을 놓지 않고

기어이 튕겨나간 방식으로 지킨 일생이라면

저렇게 즐거워도 됩니다

멀미를 추스르며

현란한 굴레를 휘돌리던 바퀴들의 공중

즐겁던 아비규환이 조용합니다

어떤 절정도 저렇게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놀이기구 밑엔 비명들이 즐비하고

비명은 즐거움과 고통의 두 가지 방식입니다

구심력으로 밀고 원심력으로 배신당하는

이 아찔한 일생의 놀이를

아이들은 일찍부터 배우려 합니다

 

약력 ; -강원 정선 출생/-5·18 문학상 신인상/-전태일 문학상 수상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시로 말하기 방법 체득해 보여준 작품

 

.......시는 독창적인 말하기 방법의 하나다. 그냥 떠오르는 심회를 글로 쓰는 말하기가 아니라 지극히 절실한 직관이나 영감을 잘 짜여진 언어로 구조화해내는 특이한 말하기의 방법이다.

 우선, 시는 절실한 표현 의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치는 긴장을 지닌 시적 제재를 찾았을 때를 기다려 글을 써야 한다. 시의 표현 의도가 중층적 암유나 의도적 모호성을 추구한 것일 때에도, 독자가 깊은 혜안으로 접근해 갔을 때 금강석처럼 견고하면서도 빛나는 광휘의 표현 의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시가 좋은 시다.

 그리고 응모작들이 너무 헤프게 말들을 쓰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쓰다 보니 시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시의 길이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꼭 필요한 말들의 결집이어야 하는 것이다. 시는 무잡한 상념의 나열이나 욕구불만의 배설물이어서도 안 된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이 당면한 위난의 상황을 롤러코스트원심력구심력의 논리를 차용해 보여줬다. ........ 롤러코스트의 시인은 놀이기구에 탑승한 채 자신의 자유의지를 던져버리고 살아야하는 현대인의 난망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심사위원 ;이건청 심사위원 약력 ;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집 <이건청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 고> <망초꽃 하나> ]

[덧붙이는 시 감상]----롤러코스트라는 굴곡진 놀이기구를 타고 자유를 상실한 채 주어진 궤도를 따라 살아가야하는 인생으로 그려내어 현대인의 삶에 대한 위기와 어려움을 드러낸 시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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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한순간 해변 / 이명선

 

 

검은 얼굴의 아이가 있어

조류를 타고 해변까지 밀려온 대륙의 아이가 있어

뿔뿔이 흘러가는 하늘에 흰 수리는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어

 

거듭 얼굴이 풀어져

뭍으로 오르려는 눈꺼풀이 흩어져

 

반복의 역사는 번복되는 아이들로 가득해

창창한 것은 꿈의 세계야 검은 눈물로 적셔지는 땅도 있어

 

우리에게 바다는 수평선 너머에도 있지만

아이에겐 수평선 너머의 바다엔 해변이 없어

 

불시에 버리고 온 대륙처럼

감은 눈 속에서 모래 언덕이 푹푹 꺼지고 있어

 

반신반의 하는 얼굴이 있어

간절함은 체험이 아니야 찢기는 세계에 발을 담그면 붉은빛의 인내가 필요해

 

국경을 물고 가는 새야

하늘을 균일하게 나누면 새들로부터 망명한 낙원이 있을까

 

한참을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 해변이 있어

검은 얼굴의 아이가 부르던 난민의 노래가 밀려나가는

 

 

(*) 이명선 / 1969년 충남 광천 출생

 

 

 

 

[신춘문예 시 심사평 ]

 

"비극적 상황을 절제와 인내로 직시한 작품"

 

....... '한순간 해변'은 지난 20159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인류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을 그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미덕인 시 세계를 펼쳤다.......심사위원들은 응모자들이 실험적인 작품쓰기에 주저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에서 사유의 날카로움이 드러나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작품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 ; 김명인 시인, 김윤배 시인]

 

[덧붙이는 시 감상]----201592시리아내전을 피해 지중해를 건너던 3 살배기 시리아난민 어린이(아일란 쿠르디)의 곤히 자는 듯 엎드린 채 죽은 모습이 터키의 휴양지 보드룸 해변에서 발견된 사실을 시적 이미지로 중심축을 삼아 써내려간 시이다. 그 안타까운 죽음과 그 어린아이가 닿고자 했던 낙원의 모습을 중첩시켜 슬픔을 정화시켜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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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크레바스에서 /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박정은 1985년 서울 출생, 서울 거주/한양대 법학과 졸업, 방송통신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재학 중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삶의 비극적 일면을 웅숭 깊게 구현

 

..............엉뚱한 단어로 문장을 조립 교체하여 새로운 감각을 만들려는 시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적확한 단어가 놓일 마땅한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은 구체화되고 발전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다. 정확한 문장을 통해 구체화되는 생각, 그 생각이 이행 혹은 비약하면서 깊이를 얻고 새 길을 찾을 때 시에 힘이 생긴다. ............박정은의 크레바스에서절제된 감정을 인상적으로, 긴장과 이완의 국면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 속에서 우리 삶의 비극적 일면이 웅숭깊게 구현되어 울림이 컸다. [심사위원 ; 장석남·최정례]

 

[덧붙이는 시 감상]----빙하에서 보는 크레바스를 통해 위태로운 삶의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그려내어 다양한 시선으로 삶을 조망하여 공명을 끌고가는 시이다.

투영되는 감정의 이입이나 절제된 긴장을 보여주어 상상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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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광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첫 차 / 심상숙

 

 

환한 덧니가 영정을 물고 있다

부음은 여태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곳은 생각보다 따뜻하다

혜화동 대학병원 장례식장 한 밤의 보일러 굉음이 블랙홀이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눈발, 국밥 말아먹듯 휩쓸려간다

 

눈 덮인 교복과 찹쌀떡 모판을 방 윗목에 세워 두고

모나미 볼펜과 파카 만년필 좌판 그리고 문구 캐비닛

끝내 가보지 못한 장학생 대학 합격증을 끌어안고,

 

영정 속 덧니는, 네모 속으로 문상객이 내어 준 사각의 추억을 끌어 들인다

 

종로에서, 덕수궁에서 우리 한 번 마주 친 적 있을까

 

흰 국화꽃 대궁 끝에 떨어질 듯 매달린 저 눈빛

아직도 인연이 남았는지 팽팽하다

 

단단한 잇몸 뚫고 좋은 내색이듯 빛나는 뻐드렁 덧니, 누군들 함부로 웃지 못한다 알 굵은 사과나 날 고구마를 통 째로 베어 물어 아귀 귀신 달래듯 자리를 내어 줄 뿐이다

 

막차 전철도 끊어져 눈 쌓이는 저녁

총알택시 대신

대학병원 아무 집 영정 앞 뜨신 바닥에 덧니로,

얹혔다가 꼭두새벽 일어서는 자리

 

 

심상숙<프로필>1949년 충북 괴산 출생 단국대 교육대학원 및 서울교대 교육대학원 졸업 서울시 초등교원 퇴직 목포 문학상·조선여성 문학상 우수상·김장생 문학상 본상 계간 문예지 시와 소금신인상 시냇물 동인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일상성 속에서 덧니가 새로움을 물었다

여러 투고작들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가, 시어의 운용에는 그럴 듯한 경지를 보여주면서도 문장의 근본인 띄어쓰기에 서툴거나 문법적 결함을 보인다는 점이다. 기본기가 안 되어 있으면서 시적인 언술을 익히는 연습에만 매달렸기에 그런 웃지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일 게다. .......

투고작들은 대체로 시대의식이나 거대 담론을 말하지 않았다. 언어 실험을 통한 언어 너머를 탐구한 작품도 별로 없었다. 리얼리티를 통해 현실을 묘사하거나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시 속에는 삶의 모습마저도 풍경으로 머물고 있었다. 견자의 시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상과의 거리가 일정한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 설령 시적 화자가 그 풍경 속에 있을 때도 바라보는 자의 시선만 남아 있었다. 삶이나 풍경에 투신하거나 그곳에서 뒤섞여 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 사유의 자기화와 표현방법의 체화가 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첫차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심사위원 ; 이대흠 시인. 천관문학관 관장 ]

 

[덧붙이는 시 감상]---시적 화자가 문상을 가서 만나는 영정 속의 인물에서 왜 하필 덧니가 뚜렷하게 인상을 주었는지 그 문상 속에서도 바라보는 자의 시선으로 첫차가 시작되는 새벽까지 삶의 이쪽과 저쪽의 모습을 뒤섞어 얹힘의 형태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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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물의 악공들 / 김정현

 

 

시리아 굶주린 혈()의 사막에서 금빛 모래사장 해변

의 춘곤증자들에게

창백한 시체가 한 조각 잘린 구름으로 떠밀려올 때

견고한 일상의 고딕 질서를 덩어리째 뒤집어쓴 도시

사람들은

아주 잠깐 경악한다 경쾌한 악당 같던

미디어의 충만한 리듬은 조심스레 끝장났고 스무 살

열사병,

비릿한 합주를 나눴던 벌거숭이 몽상가들마저

순순히 날 선 악곡(樂曲)을 포기하고 거리로 집결했다

관현악단 같은 햄릿들로

거대한 복수를 꿈꾸던 어릿광대들과 리어처럼 선명히

울부짖을 미치광이들은

이미 쓰레기 가득한 거리에 당도했고 간밤 골목마다

신명나던 두드림,

핏물 같은 구토로 조율 당한 오필리아들은 누굴 위해

저리도 침묵하나 지난 계절

아무도 돌아오지 못할 악공(樂工)이 돼버린 소년소녀

들은

제일 아름다운 물의 파동으로 우리의 동공을 적셔대는

() 같은 고통은 현()의 비명은 끝까지 살아남아

살아있는 자들의 금 간 심장을 날카롭게 연주하네 누

구도 화음 낸 적 없는데

누구나 펼침화음인 사람들 오래전 강을 건넜던 백수

광부의 그림자처럼

낯빛들 어둑했다 저 멀리 바닷바람이 붉은 산호처럼

뻗쳐 와도

바닥의 가장자리마다 고요히 쌓여 있는 물의 영혼들

가느다란 여음(餘音)에도 휩쓸리지 않으려

악공들 모두 기슭을 간신히 부여잡고 온몸을 떨고만

있는데,

 

경찰 차단선이 순식간에 벽을 쳤다 다시금 주검을 쌓아 올렸다 숨통이 통증으로 나뒹굴고 머리통은 으깨졌다 미치광이들과 어릿광대들이 찢어지자 분노는 산산조각 났고 눈먼 오필리아들만이 거리에 남아 안티고네처럼 울부짖었다 그러나 지난밤처럼 늙어버린 내 영혼은 모텔 난간에 기대선 채 한밤의 열기를 한가로이 관망했다 돌멩이가 날아들기도 했지만 나는 운 좋게 상처 하나 없다 이내 살수차가 물대포를 시연하자 누군가의 연설은 깨끗하게 뭉개졌고 최루액에 토악질하던 학생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가까스로 시위대열에서 이탈한 노동자와 첫 의무를 이행하던 의경은 공사(工事) 중인 상가에서 마주쳤다 너부러진 각목이 수직으로 빛났고 시멘트는 지루할 만큼 천천히 굳어가고만 있었다 하지만,

 

아침에 나를 눈 뜨게 한 건 햄릿이 아니었다 리어가

아니었다 오필리아도

시위대도 아니었다 단지 춘곤 가득한 내 하품이었다

찔끔 눈물 한 방울의

아직도 선연한 비극을 미디어는 밤낮없이 이국(異國)

해변에서 송출하고

모래 속 조그마한 얼굴을 묻고서 끝없이 바다를 향하

는 어린 시체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기어이 리드미컬,

어젯밤 핏방울을 허밍으로 흘려대며 담배를 입에 가져가는 데

거리의 소란했던 혁명마저

담담히 쓰레기 자루 속으로 쓸어 담는 저 사람은 누구

일까

다시금 어느 해변으론 한 구의 시신이 푸르스름하게

떠밀려오고

나는 먼지투성이 밤거리가 화염으로 솟구칠 때마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할 악몽을 꾸곤 했다 그런데

그 꿈을 정말 악몽이라 해야 할까

악공들이 한가로이 모래찜질하던 날 붙들곤 파도처럼

바다를 켜며 앞으로 나아가고

포말처럼 다시 바닷속으로 빨려들던 물속의 푸가를

난간 밖으로 담배꽁초는 자유롭게 튕겨 나가고

나는 더 이상 세계의 깊이로는 도무지 빠지고 싶지 않

부드럽게 출렁이던 물침대를 조율하러 또다시 모텔로

기어들어 간다

낮잠은 지옥만큼 나를 끌어당기고

나는 천국 같은 이 단단한 세계가 하루의 시작처럼 아

주 조금 마음에 든다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아름다운 파동 일으키는 노래 이어지길"

 

........... 잦은 직유와 산문적 호흡은 시를 약간 산만하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닥을 놓치지 않고 독자를 어느 낯선 지점에 정확히 데려다 놓는다. 당선작으로 뽑은 물의 악공들역시 시리아의 사막에서 시작해 고통스러운 죽음의 현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닥의 가장자리마다 고요히 쌓여있는 물의 영혼들을 불러낸다.

[심사위원 ; 나희덕연세대 국문과·동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등 다수]

 

[덧붙이는 시 감상]----이 시는 길이가 길고 그 시적 정황이 숨가쁘게 행간을 달린다. 산문적 행간에 다시 산문의 행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시적 형식의 변화를 통해 그 이면의 이야기를 변주시키는 구조를 보여주며 시의 행이 매우 길어서 긴 호흡이 필요해 보인다.

처음 시리아 굶주린 혈()의 사막에서 금빛 모래사장 해변에서 시작되는 이 시는 많은 이미지들을 생성시키며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와의 대립 공간에서의 여러 가지 정황을 빠른 호흡으로 그려내고 드디어 모래 속 조그마한 얼굴을 묻고서 끝없이 바다를 향하는 어린 시체로 눈길을 돌려 고통스러운 죽음의 모습을 불러내고 있다. 언어의 경제성을 생각하고 다소 산만함을 벗겨내기는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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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미륵을 묻다 / 김형수

이천여 년 전의 방가지똥 씨앗이

스스로 발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해밖에 못 사는 풀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랑할 만한 세상이 오지 않아

이천 년 동안 눈 감은 태연함이라니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깜깜 세상 잠잤다니

 

그런 일이 어찌 꽃만의 일이랴

우리도 한 천 년쯤 자다가

살고 싶은 세상이 왔을 때 눈 뜨면 어떨까

 

사람이 세상을 가려 올 수 없으니

땅에 엎드린 바랭이들 한 천 년쯤 작정하고

나무를 묻었다는 매향埋香의 기록

 

, 어느 어진 왕이 천 년 후를 도모했던가

 

침향이 되면 누구라도 꺼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

백 년도 아닌 천 년을 걸어 나무를 묻었단다

그것은 사람이 땅에 심은 방가지똥이었다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이

천 년 후의 나무 씨를 뿌렸다는,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뿌듯한 매향에 관한 몇 줄의 글

 

읽고 또 읽고

노오란 꽃을 든 미륵이 눈에 어른거렸다

 

 

약력=1958년 경남 창원 생.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졸. 전 부산일보 기자. 전 경향신문 기자 . 현 부산지방공단스포원 공로연수 중.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전체적으로 고른 성취로 안정감 돋보여

 

........수사의 과잉이 사물과 현실을 왜소하게 한다. 문장들은 매끄러우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미지는 넘치나 소비되기에 급급하다. 또한 전반적으로 삶과 시에 대한 예각적 인식보단 장황한 요설과 실험실에서 배양된 인위적 표현들이 유사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김형수의 경우는 기시감이 문제적으로 다가왔으나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과 성취로 안정감을 주었다. 위태로운 새로움과 오래된 울림 중 격론 끝에 간신히 선택된 미륵을 묻다는 지층에서 캐어낸 미륵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울림을 간직하고 있는 시다.

[심사위원 ; 정일근·조향미·손택수 시인]

 

[덧붙이는 시 감상]----신춘문예 작품 미륵을 묻다에서 매향은 미륵사상에서 나타나는 매향에서 향기를 얻으려는 소망으로 침향이 되면 누구라도 꺼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파 묻어둔 것들 중 우연히 함께 묻혀 있던 방가지똥 풀씨가 천 년만에, 고작 일 년을 살자고 천년을 묻혀 있다가 싹을 틔우는 놀라움과 연결하여 풀어낸 천년의 소망을 현시적으로 드러내는 시적 정서로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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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농민신문신춘문예 당선 시]

밀풀 / 고은희

 

 

1.

밀풀에서 꽃이 폭폭 끓는다. 부풀어 오른 밀풀은 겨울과 여름에 유용하다. 문살에 밀풀을 바르고 창호지를 바르고 무성한 숨을 바른다. 덩달아 지붕 위로 하얗고 얇은 첫눈이 내린다

 

귓불이 떨어져나간 단풍잎 몇 개가 붓살이 쓸고 간 거친 자리에 폴짝 내려앉는다. 겨울 문턱에서 말이 달리고 창호지 마르는 소리가 소복소복 들린다. 그러니까 문풍지는 밀풀이 모른척한 날개, 열렸다 닫히는 문이 구수한 밀풀냄새를 풍기며 날아다닌다.

 

2.

김치는 꽃이다. 사이사이 익어가는 배추김치뿐만 아니라 한 여름 열무김치를 들여다보면 온갖 색이 다 들어 있다. 푹 절인 열무에 홍고추를 썰어 넣고 푸른 실파를 뭉텅뭉텅, 마지막에 흰 밀풀을 넣어 섞어 피는 꽃.

 

밀풀이 돌아다니는 동안, 풋내라는 밑줄에 문풍지가 달려 나온다. 꽃이 피려고 사각사각 감칠맛이 날 때, 한데 섞이고 어우러져 동지섣달 한겨울을 불러낸다. 밍밍한 국물에서 팽팽한 문풍지 맛이 나게 하는 것, 밀풀이 꽃을 피우는 방법이다

 

3.

살짝만 뜨거워져도 엉겨 붙는 밀풀의 힘,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배 아픈 때가 있다.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풀죽은 열무가 밀풀을 만나 아삭아삭 기운을 차리듯 김치도 한겨울 문도 밀풀의 요기로 견딘다.

 

창호지 문에 구멍하나 뚫린 듯 열무김치국물은 앙큼한 맛이다

 

 

<고은희 시인 약력>1967년 전남 무안 출생 /현 방송작가(KBS'6시 내고향'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8농민신문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중략----'밀풀'은 고전적이고 담백한 작품이다. 작품을 형상화하는 능력과 언어를 감칠맛나게 다룰 줄 아는 솜씨를 높이 봤다. 앞으로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을 언어의 시계에서도 발휘해 '앙큼한 맛'나는 시 많이 써주기 바란다.....[심사위원 ; 곽재구 . 함민복 시인]

 

[덧붙이는 시 감상]---밀가루로 풀을 쑤어 사용하는 밀풀잘 풀어줘야 잘 붙는기능성 말고도 겨울의 문풍지로 추위를 막아내는 겨울을 통과하는 김장김치가 밀풀과 어울려 만들어내는 김치 맛이나 열무김치의 감칠맛을 상징적 기재로 활용하여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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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악어떼 / 원보람

 

 

서른이 지나기 전에 두 번째 실업급여를 받았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햇빛줄기를 나눠먹었고

발끝마다 매달린 검은 노예들도 입을 벌렸다

요즘은 늘 다니던 길을 잃는 사람들이 많아

표지판은 너무 많은 곳을 가리키고

신호등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만 보내지

도시 곳곳에 설치된 늪지대를 지나다가

영혼을 자주 빠뜨렸다

너무 바쁜 날에는 일부러 나뭇가지에

헌옷처럼 걸어두고 가기도 했다

늪지대에 악어떼가 나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노예들은 밤마다 주인을 뜯어먹었고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거워지는

노예를 질질 끌다가, 끌려다니다가

 

악어는 심장부터 먹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상자 안에 있는 상자를 열면 나오는 상자 안으로

도시의 아이들이 차례로 들어갔다

사각지대 안에서 조용히 자라는 아이들

뚜껑을 열면 어른이 되어 나왔다

우리는 시급을 받고 늪지대에 숨어

포크를 쥐고 악어떼를 기다렸다

돈을 모으면 함께 열기구를 타자고 했다

뿌리 얽힌 사람들에게 내리는 비를 지나

위로의 말이 들리지 않는 대기를 지나

구름 사이 피는 버섯처럼

둥근 머리로 허공을 밀어 올리며

계속 가자고 했다

추락하는 일에 익숙했으므로

겨울 내내 올라가는 열기구만 상상했다

악어는 울기 위해 먹이를 씹는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신춘문예 시 심사평 ]

"평범한 시어속 풀잎 같은 날카로움 느껴져"

 

사람의 눈에 닿으면 동행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말이 있다. 노래가 되고 싶어서 춤까지 추는 언어가 있다. 시인은 그 율려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런 노래는 시인의 깊은 마음 바닥을 짚고 나온다.

............ 때론 현란하고 모호했으며, 오랜 학습의 지층에 눌려 화석화된 문자도 있었다. 화장이 지나쳐서 돌비늘이 된 언어들도 있었다.

.......... 무의미하고 불분명한 감각으로 사유되는 시의 범람 속에서 그의 시는 오롯했다. 평이한 시어 속에 긴장의 풀잎을 날카롭게 세워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현실을 정직하게 읽을 줄 알았다. 언어와 표현법 뒤에 숨지 않았다. 가슴에 이미 시인의 자세가 자리를 잡은 증거였다. 손끝 재주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 진물과 용광로에 펜을 찍는 당찬 의지에 손을 들어주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위원 ; 시인 이시영, 이정록]

 

[덧붙이는 시 감상]----전국적으로 실업과 일시고용으로 몸살을 앓는 시대적 아픔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고 들어와 기다리며 희망을 걸어놓고 감각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진솔함이 느껴지는 시이다.

다소간의 난해한 상징성이 끼어들고 있으나 긴장감이 유지되어 그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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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복도 - 변선우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펼쳐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가는 걸까 드러낼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려 나를 읽어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1993년 대전 출생 한남대 문예창작학과, 동대학원 석사 재학

 

 

 

[신춘문예 시 심사평 ]

다층적 은유에 의한 소재의 확장,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 보여줘

 

............. 복도는 소재를 다층적 은유에 의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여줬다. 시가 감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과장으로 치닫거나 지적 퍼즐로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도되는 이즈음에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지닌 신인에게 출발의 즐거움과 불쾌하지 않은 부담감을 함께 안겨주는 것이 제법 그럴듯한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심사위원 ; 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조강석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덧붙이는 시 감상]-----과문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또 다시 난해함이나 환상성이 도진 것일까? 길게 뻗은 복도에서 다층적 은유란 무엇을 다층으로 인식하고 그 근거는 심사위원들의 눈에만 보이는 걸까? 적어도 시작과 결말의 논리적 비약에 의한 연결이라도 가늠할 수 있어야 감상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가진 시라고 평가하였으나 난독의 피로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복도를 보는 시선은 하나의 통로에서 무엇을 응시하여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일까? 고래고래 소리치는 언어에서 고래를 등장시키고 환상성을 환기시키는 고래가 사는 풀밭과 과수원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시적 공명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빠져있다. 아직 나는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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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박쥐/ 윤여진

 

 

있잖아 이 붉은 지퍼를 올리면 그녀의 방이 있어 내가 구르기도 전에 발등을 내쳤던 신음, 그녀의 손가락을 잡으면 구슬을 고르듯 둥근 호흡이 미끄러져 들어왔지 켜켜이 나를 쌓던 그녀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걸 알았는지, 나는 그녀의 배를 뚫고 나왔어 처음으로 말똥하게 울었는데 날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선명해, 입 다물었지

 

노을을 오래 눈에 담으면 모든 결심이 번지고 마는 거, 아니? 나는 거꾸로 앉아 바깥을 노려봤어 배꼽 언저리를 돌리면 꿈속에서 잠드는 그녀의 집이 있어, 내가 모를 남자와 나만 한 아이가 있다는 그 집,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접질리는 호흡. 쌓아둔 라면이 떨어질 때마다 잘 살고 있었네? 그녀는 내게 돌아와 물었지 발가락 사이엔 어설프게 부러뜨린 빛이 한가득이었어

 

난 그녀가 쏟아낸 그림자를 받아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랐어 뒤통수에 부러진 그녀의 날개를 밀어놓고, 기껏 고른 어둠을 양발 가득 쥐고 매달렸지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말해 이젠 멀리 못 날아가겠네, 힘껏 닳은 발톱을 내밀다 조용히 멀어지는 그녀의 남은 날개를 내려다봐, 떨어진 돌조각을 씹어 삼키며 불현듯 나는 놀라곤 해 다시 멀어진 저 지퍼, 똑 닮은 저 곡선이 내 배에도 들어차 있었거든 흉터를 밝히는 건 촘촘히 밀려가는 증오, 잘 보이도록 내가 나온 자국을 저무는 해에게 붙여두지

 

귀소본능은 박쥐의 지긋지긋한 버릇, 몸살처럼 돌아올 그림자를 향해 긴 잠을 자둬야지 나는 늘 거꾸로 앉아 말해 어서 와 엄마

 

 

윤여진 약력 ; 1995년 충북 음성 출생/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신춘문예 시 심사평 ]

모성의 신화에 대한 시적인 뒤집기 인상적

.......... 박쥐가 더욱 특별한 발화법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가족과 모성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을 서사로 끌고 가지 않고 점묘법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부분마다 집중해서 전체를 보여주는 기법은 자신이 생성하는 이미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 모성을 박쥐라는 이미지로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점도 매력적이지만,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존재가 모성이라는 설정 역시 익숙한 모성의 신화를 뒤집는다. 이 시적인 뒤집기를 통해 모성을 둘러싼 상징질서에 날카로운 균열을 낸다. [심사위원 ; 송재학 시인, 이광호 서울 예술대 교수]

 

[덧붙이는 시 감상]----‘박쥐라는 이미지 속에서 모성을 건져 올리고 지퍼를 열고 닫음으로서 출산과 생명의 탄생으로 연결되는 모성적 사랑이 귀소본능으로 피할 수 없는 관계임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을 각각 분절시켜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서로 연결되는 구조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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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수목원 / 전진자

 

 

오월이 세상에 길을 놓고 있다

악보도 없이 나무들이 몸관악기를 연주한다

피톤치드 피톤치드 바람에 추임새가 들린다

방문객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며 들꽃들이 수다를 떤다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송화가루 음율이 간절하다

나만 빼고 모두 봄이라 한다

시린 생각을 저들에게 들키고 말았을까

내안에 있던 머뭇거림이 슬쩍 빠져나가려 한다

당신은 어디까지 갔는가

오전의 나뭇잎과 오후의 나뭇잎의 태도는 다르다

길어진 만큼 어떤 것은 짧아진다

멧새소리와 멧새소리가 모여 떼울음이 되려한다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열린 세계관으로 자연과 인생 조명"

 

내용도 사드문제, 세월호, 노마드('떠돌이'로 표현되는 현대 직업사회의 군상들), 디아스포라(국내로 들어오는 고려인 혹은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가족들), 사랑과 평화, 자연과 인생, 노동문제, 농촌과 공동체 사회의 붕괴,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개인적 정서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트럼 속으로 '불나비'처럼 날아드는 각양각색의 문제를 포착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와 반면에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만들어지는 디지털사회를 반영하는 속칭, '컴퓨터'가 너무 범람하는 듯하여 염려스러웠다.

....... 단형에 너무 맛들이면 우선 다른 시들도 지나치게 '애매함(ambiguty)의 미학'에 빠지고 시를 이끌고 나가는 에너지, 대범성, 추진력이 쇠하게 되어...시작에 노쇠현상이 빨리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우선 열린 세계관을 갖추고 있으며 시에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부여할 수 있는 힘과 배짱과 풍성한 정서를 갖추고 있어서 좋다.

[심사위원 ; 김준태 ]

 

[덧붙이는 시 감상]----특별히 뛰어난 문체도 아니지만 오월이 세상에 길을 놓고 있는 수목원에서 길어진 것만큼 어떤 것은 짧아진다는 인생을 관조하여 보는 시선이 웅숭깊은 맛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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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공허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 박은영 1977년 전남 강진 출생 /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신춘문예 시 심사평 ]

風葬문화라는 구체성 통해 삶과 죽음의 동일성 깨닫게 해

 

시는 말과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은 사고와 이해에서 나온다는 점을 투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우리 삶과 유리된 채 공연히 초현실적으로 매끄럽게 톡톡 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이 앞선 작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발코니의 시간은 삶의 고통에 대한 견딤이 죽음의 고통 또한 견디게 해준다는 중의적 의미가 내포된 시다. 정년퇴직한 뒤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우는 아버지의 현재적 삶과 암벽에서 풍장의 과정을 겪고 있는 죽음의 삶을 발코니의 통유리를 경계로 대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동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적인 해체의 과정을 견디는 풍장 그 자체가 바로 오늘의 삶에서도 가장 요구되는 인내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성을 풍장 문화라는 구체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점이 이 시의 힘이자 장점이다. [심사위원 ; 황동규· 정호승 ]

 

[덧붙이는 시 감상]----정년퇴직한 뒤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우는 아버지의 삶은 인내하며 세월을 기다리는 암벽에서 풍장의 과정을 겪고 있는 죽음과 삶을 대비함으로써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연장선이라는 동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바람을 통해 해체되는 과정을 견디는 풍장 그 자체가 바로 오늘의 삶에서도 존재하는 견딤의 삶이라는 동질성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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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율가(栗家)/이소회

 

 

갓 삶은 뜨끈한 밤을 큰 칼로 딱, 갈랐을 때

거기 내가 누워있는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레가 처음 들어간 문, 언제나 처음은 쉽게 열리는

작은 씨방 작은 알 연한 꿈처럼 함께 자랐네

통통하니 쭈글거리며 게을러지도록 얼마나 부지런히 밥과 집을 닮아갔는지

참 잘 익은 삶

 

딸과 딸과 딸이 둘러 앉아 끝없이 밤을 파먹을 때마다

빈 껍질 쌓이고 허공이 차오르고 닫힌 문이 생겨났다

말랑한 생활은 솜털 막을 두르고 다시 단단한 문을 여미었다

강철 같은 가시는 좀도둑도 막아주었다

단단한 씨방 덜컹덜컹 뜨거워지는데

온 집을 두드려도 출구가 없네

달콤한 나의 집, 차오른 허공이 다시 밥으로 채워질 때, 혹은 연탄가스로 뭉실뭉실 채워질 때

죽음은 알밤처럼 완성된다

 

죽음은 원래가 씨앗이기 때문이다

 

 

(*) 약력: 1974년생. 본명 이소연.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선명한 주제의식·사물에 대한 섬세한 접근 돋봬

 

올해 응모작들은 사회의식을 갖추거나 삶의 현장감 있는 작품이 드물고 너무 정감적으로 흘러가서 주제의식이 미약한 것 같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이며 말초적인 작품들에서 삶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들이 상투적인 표현으로 흘러 미학적 성숙도도 많이 떨어지고 상상력의 고갈도 보여준다.

....... 이 중에서 '율가'를 당선작으로 미는 힘은 주제의식이 선명하고 사물에 대한 접근 방식이 섬세하다는 것이었다. . [심사위원 ; 강은교· 강영환 ]

 

[덧붙이는 시 감상]----밤송이 속을 응시하는 눈길에서 가족들이 모여 사는 삶의 모습을 환기시키게 하는 섬세한 감각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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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시조]

/ 이윤순

 

 

설마에

속아 산 세월

어느 덧 팔십 여년

태워도

안 타더라

끓여도 안 익더라

아파도

끊기지 않는 너 북망산은 끊어 줄까

 

세상에

질긴 끈이

천륜 말고 또 있을까

노구의

어께 위에

버거운 짐 덩이들

방하착(放下着)

할 수 없으니 착득거(着得去) 할 수 밖에

 

 

 

[신춘문예 시 심사평 ]

다시 한번 심신 다하는 시의 길을 찾길

 

........ 무엇보다 번다한 설명조의 서술을 경계해야겠다. ‘는 첫 두 줄의 빼어난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 뒤는 진부하다. [심사위원 ; 고은 시인]

 

[덧붙이는 시 감상]----불가적 은유로 방하착(放下着)--내려 놓으라는 말---과 착득거(着得去)--그냥 짊어지고 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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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정말 먼 곳 /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박은지 1985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신춘문예 시 심사평 ]

 

2000년대 이후 서정시의 갱신은 탈주체의 문제나 문법적 해체와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주체가 불분명한 진술들과 지나치게 비틀어서 소통 불가능할 정도의 문장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과 비약이 항상 새로움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박은지의 정말 먼 곳을 당선작으로 뽑게 된 데에는 과잉된 수사가 주는 피로감 속에서 그의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가 상대적으로 돋보였기 때문이다.......박은지의 시에는 특히 장소성에 대한 예민한 의식과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는 진술처럼, 시적 화자는 여기와 저기, 현실과 상상,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계속한다. 서로 대립되는 사물이나 세계를 오가며 균형 잡힌 사유와 감각을 보여 주는 그의 시는 현실을 손쉽게 이월하지도, 거기에만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심사위원 ; 이문재· 나희덕 시인]

 

[덧붙이는 시 감상]---시인이 살아가는 삶에서 만나는 절벽과도 같은 현실에서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의 불안이 서로 대립되는 사물이나 사유, 대립되는 관념의 세계를 상상하며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의식이 또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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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돋보기의 공식 / 우남정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았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 건 동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본다 찡그려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본다

()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 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진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

실금에 배어드는 다향(茶香)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

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 우남정(본명 우옥자)1953년 충남 서천 출생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섬세하고 감각적인 목소리 돋보이는 작품

 

신춘문예 예심 통과 작품이 담긴 봉투를 열어보는 건 사실 숙연한 일이다. 어떤 진기한 보석, 혹은 어떤 신비로운 식물이나 동물과 감전되듯 조우하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지만, 그런 행운이 닿지 않더라도 봉투 안에는 자신의 생을 시에 걸어보려는 이들의 시적 감수성을 꿈틀거리게 한 삶과 최선을 다한 기량이 오롯이 지어낸 시편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우남정씨의 감각과 목소리를 더 섬세히 음미할 수 있는 돋보기의 공식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 [심사위원 ; 최동호·황인숙]

 

[덧붙이는 시 감상]----돋보기로 보는 세상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는 역설적 현재에서 몰라도 좋을 것 까지 확대되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을 아우르는 섬세함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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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조문 / 이서연

 

 

빈 방에 남아 빈 방을 닦고 있는 거울처럼

 

그 집의 벽들은 아직 비에 젖고 있다

현관 앞에 쓰러진 우산이 있고 지붕을 넘어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소리 내어 운다 나는 꽃을 들고 있다

 

이른 새벽 청소부가 올 때까지

쓰레기봉투처럼 웅크리고 싶은 밤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는 8차선 도로를 천천히 가로질러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생각 없는 몸이 어딘가로 간다

생각만 남아 몸을 생각한다

 

엎어진 화분처럼

방문을 쥐고 있는 젖은 손이 있다

손잡이를 말아 쥔 둥근 손등만 보인다

 

창문이 없는 방에 바람이 들이쳤다

먹구름과 흰 구름이 방 안을 지나간다

감은 눈 안으로 구름은 어떻게 들어 왔을까?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언어 몰고가는 힘 놀랍고 삶과 죽음 관계 새로운 인식 이끌어

흔히 보아왔던 개인적 발화에 가까운 소통부재의 언술이나 실험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책임방기(責任放棄)의 시편들이 확실히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신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편들보다 익숙함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 눈에 띄어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다.

이서연씨의 작품은 참신한 비유와 더불어 언어를 몰고 가는 힘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행간을 건너뛰는 경쾌한 어법이 신인의 예기(銳氣)를 느끼게 했다.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 활달한 어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고 있다. [심사위원 ; 이하석 . 장옥관 시인]

 

[덧붙이는 시 감상]----‘조문이라는 시에서는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이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 형상화되는 삶과 죽음의 관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잡아내고 있다.

이 시는 첫차‘(광남일보)와 소재에서의 유사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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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영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 당선작 없음

삶을 바라보는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가 담긴 시를 찾아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시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라고 썼다. 시적 순간이 그럴 것이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내 안에 머물며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끊임없이 와 소통하는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상의 신선함과 표현의 적절성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삶을 바라보는 인식의 깊이다. 응모작품 대다수가 여전히 관념성과 추상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진부한 자기 고백으로 끝나버리거나 설명적이거나 울림이 없는 시들이 많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슬픔도 그리움도 사랑도 삶도 실체가 없는 추상으로 덩그러니 놓여있다. 시는 정서의 고양(高揚)이다. 또한 시에서의 표현은 삶의 통찰력에서 오는 시인의 사유다. 그 사유의 세계는 일차원이 아닌 다양하게 뻗어나가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상력에 젖어들게 한다.

...............첫차(광남일보 당선작)는 첫 행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영정사진과 덧니라는 소재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면서 시를 읽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비유적인 표현이 적재적소에 쓰이고 시를 끝까지 끌어가는 힘이 있어 시를 오래 쓴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심사위원 정찬일, 김효선(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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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인디고 / 박은영

 

 

빈티지 구제옷가게,

물 빠진 청바지들이 행거에 걸려 있다

목숨보다 질긴 허물들

한때, 저 하의 속에는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다

세상 모든 얼룩은 블루보다 옅은 색

짙푸른 배경을 가진 외침은 닳지 않았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면

멍드는 건 속살이었다

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과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와

기장이 길어 끌려가던

울분의 새벽을 블루 안쪽으로 감추고

질기게 버텨낸 것이다

인디고는

인내와 견디고의 합성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애벌레들은 청춘의 옷을 벗어야 한다

질긴 허물을 찢고 맨살을 드러내는

각선의 방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대생들이

세상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녁의 밑단

빈티지가게는

어둠을 늘려 찢어진 역사를 수선하고

물 빠진 허물,

그 속에 살았던 푸른 몸은 에덴의 동쪽으로 가고 있을까

청바지 무릎이 주먹모양으로 튀어나와 있다

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이다

 

*인디고: 청색염료.

 

 

 

 

[신춘문예 시 심사평 ]

 

................... 제재들은 자꾸 대칭하며 조화해 가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시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청춘이 선호하는 낡은 청바지...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그리고 얼마나 심대한 이미지의 부딪침인가.

 현대의 세대가 옛 세대를 끌고 와서 한 시공에 두어 충돌과 융합을 자아낸다. 결기 높은 시이다. 청바지는 낡아서 무릎이 나와야 한다. 이 청바지는 그대로 상징성의 총화이다.

 동서양의 만남이며 이는 또한 시공을 달리한 문화의 충돌이자 혼융이다. 이 때 하의 속 애벌레가 절묘한 시점에 등장한다. 애벌레는 장차 성충이 될 터이다. 매미처럼 어둠을 털고 일어나 허물을 벗고 마침내 푸른 미래의 하늘을 날 것이다.

[심사위원 ; 소재호 시인·문학평론가] ; 현대시학 등단 / 완산고등학교 교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석정문학관 관장 역임 / 시집 초승달 한 꼭지등 다수 / 목정문화상, 성호문학상, 녹색시인상 등 다수 / 현 표현문학회 회장

 

[덧붙이는 시 감상]----그 속에 살 연한 애벌레가 살았던 청바지는 주먹이 나올만큼 낡은 청바지여야 하는.....청춘과 낡음은 매우 역설적인 조합이다. ‘통 좁은 골목에서 걷어차이고 뒹굴고 밟힐 때사랑과 명예와 이름을 잃고 돌아서던 밤’, 또는 태양을 좇아도 밝아오지 않던 정의라는 젊음의 역동성이 한 시대를 개척한 흔적으로 남은 청바지의 상징성이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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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삼례터미널 - 김헌수

 

 

빗물 고여 팔랑이는 흙바닥 길에 숨통을 터놓고 바퀴자국 훑고 간 자리에 안부를 걸쳐 놓는다 이때 삼례터미널은 빈집 같다 버스들은 벚꽃 잎들을 헤아리며 종점 없는 마을로 떠날 것 같다

 

내 안에 새겨진 주름 패인 얼굴을 현상해 놓고 흑백사진 같은 터미널 지나 후정리 길목에서 손 흔들던 그의 모습을 던져주고 간다

 

걸어 잠근 뒷문 곁에 그림자 없는 하루가 눕는다 들마루에 앉아서 나누던 습관들이 헐렁해졌다 가끔 자리를 내어주는 그곳, 떨어지는 너그러운 빗방울이 욕심을 내던 처마 밑이 환하다

 

녹이 슨 남자가 떠난다 그를 엿보는 눈빛 덕분에 말은 쌓여가고,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희미하게 고요가 들어앉았다 나도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다음 날이면 또 들어와 앉는 터미널에서 그를 만지고 있다

 

삼례터미널은 빠져나갈 수 없는 출구다 살아온 지난날이 자동판매기 속에서 낡아가고 있다 쓸어내린 눈꺼풀을 길들이는 감각들, 아무도 몰래 음각해 놓은 문양으로 피어 목판화를 찍어내고 있다

 

(*) 김헌수 ;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 문학동인 글벗 회장 역임.

 

 

[신춘문예 시 심사평]

"고요한 은유, 따뜻한 위로같아"

 

......... 시들이 너무 어려웠다는 의견이다. 해독이 불가한 암호와도 같은 난독증을 일으키는 시들은 화성악을 내치며 유리창에 스티로폼을 긁어대는 것처럼 불편한 불협의 음을 차용해 시종 들이대는 난해한 음악을 읽는 것 같았다.

잔잔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쓴 삼례터미널은 다른 작품인 ‘7번 출구에서’· ‘개개비의 여름과 함께 대상의 이면과 그림자까지 관찰하며 사려 깊은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놓았다. 모름지기 시인의 눈이라면 대상의 아득한 너머와 순간의 찰나까지, 쓰러지고 일어나 건너온 시간까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걸어 잠근 뒷문 곁에 그림자 없는 하루가 눕는다” “빗방울이 욕심을 내던 처마 밑이 환하다라니, 이 같은 고요한 은유에서 볼 때 시를 짓는 새로운 시인의 눈이 따뜻하고 그렁그렁한 눈매로 대상을 위로하며 시를 풀어놓았을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 심사위원 ; 이운룡 시인·박남준 시인 ]

[덧붙이는 시 감상]----시인은 대상의 이면과 그림자까지 관찰하여 깊은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놓았다. 시인의 눈으로 터미널의 아득한 너머와 순간까지, 다시 이제껏 존재하며 건너온 시간까지를 들여다보는 아주 사소한 고요와 정밀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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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돌의 문서 / 이린아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설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움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곁을 내주고 스스로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 이린아1988년 서울 출생 / 명지대 뮤지컬과 졸업 / 동 대학원 뮤지컬과 재학

 

 

 

 

[신춘문예 시 심사평]

현란하지 않게돌에 비친 시대정신의 단면

 

........ 마치 아이돌 가수들이 현란한 춤 동작을 앞세우다 정작 노래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신춘문예 투고 시 또한 추상적이고 몽환적인 언어의 춤이 지나치게 현란해 시의 본질을 잃고 있어 안타깝다.

..........당선작 돌의 문서는 진실한 증언이 요구되는 이 시대의 이야기로 읽힌다. 침묵을 옹호하는 시대에서 침묵의 증언을 요구하는 시대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이 시 전체를 관류하는 정신이다. [문정희(시인), 정호승(시인)]

 

[덧붙이는 시 감상]----돌의 다면적인 이미지의 상징성을 드러내어 시대적 진실을 요구하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돌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침묵하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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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한경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새살 - 조윤진

 

 

입 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럼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 지

아직 알 수 없지

 

부드럽게 돋아났던 여린 세계들

그런 세계들이 정말 있었던 걸까

 

 

(*) 조윤진 1995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신춘문예 시 심사평]

젊음의 비애가 눈앞에 생생 / 소박하지만 진실해서 감동적

 

............. 못다 한 최선잘못이 되어 버리는 현실에서 존재감을 확인할 길 없는 젊음의 비애를 선명한 이미지로 그리는 능력이 좋았다. 상처 뒤 새살을 꿈꾼다는 뻔한 상투성을 극복해내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전개도 인상적이었다. 소박하지만 진실했고 그래서 감동이 있었다. ............[ 심사위원 ; 김수이(문학평론가) 문태준(시인) 박상수(시인·문학평론가)]

 

[덧붙이는 시 감상] ----‘못 다한잘못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는 도미노 같은 현실에 대한 아픔이 그려지고, 상처를 아물리고 그 자리를 새살로 채우는 방식을 다른 이미지들로 그려 채워내는 전개 방식이 새롭고 진솔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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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신춘문예 시 심사평]

만장일치 당선 확정, 독자가 읽게 만드는 시

 

.......... 거두절미하고 읽게 만드는 직진성의 시였다. 노래처럼 흐를 줄 아는 시였다. 특유의 리듬감으로 춤을 추게도 하는 시였다.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천진 속의 시였다. 근육질의 단문으로,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시였다. 무엇보다 ''가 있는 시였다.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였다. 시라는 그 어떤 강박 속에 도통 웅크려본 적이 없는 시였다. 어쨌거나 읽는 이들을 환히 웃게 하는 시였다. 웃는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예쁜 얼굴을 가져보게도 만드는 시였다. [심사위원 ; 박상순손택수김민정 시인]

 

[덧붙이는 시 감상]----시적 언술에 직진성이 있고 속도감있게 읽힌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면서도 그냥 유쾌하게 웃으며 읽는 시로 만족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다소 거북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시를 통해서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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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폐선 / 조직형

 

 

뱃머리는 거침없이 파도를 밀고 나아간다. 좌우 현의 오래된 균형이 삐걱거리며 서로 맞잡은 손을 거두자 갈라진 파도가 비명을 내지른다

 

몸통을 지나 어깨 위로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앉을 때까지 뱃머리는 무지근해지는 통증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날카로운 예지는 분명한 걸 챙긴다. 단호하게 잘려나간 꼬리를 슬며시 감추고 씻은 얼굴 내미는 건 부끄러운 변명이다

 

수평선에 맞닿은 흐리멍텅한 하늘이나 경계선을 뭉개버리는 저녁 안개는 늘 무시당하는 편, 말이 없는 것들은 모호해서 경계를 흐린다. 배의 무딘 허리를 훑으며 지나간 물결이 고물에 고물고물 맴돌거나 소용돌이치며 뒤따르며 밀어주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달리는 말이 뒤돌아본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지나간 후미는 곧 사라질 물거품일 뿐이다. 사라질 것에 대하여 사랑을 퍼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뱃머리를 벗기는 짱짱한 햇빛만이 대쪽같이 당당하다

 

앞만 보고 달리던 뱃머리는 고물 뒤에 숨은 시선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켜보며 뒤따르며 드러내지 않을 뿐 침묵으로 밀어주던 흘수선 아래 감춘 어미 같은 마음이 아주 환하게 비춰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조직형 ; 1953년 대구 출생. 영남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제주문화원 문예창작교실 수료.3년째 제주 거주

 

 

 

[신춘문예 시 심사평]

할 말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움

 

........... 시를 이끌어 나가는 진술의 힘에 주목했다. 현란한 언어의 기교가 아닌 자신이 할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시적 진술이 사물과 상황을 바라보는 오랜 사유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심사위원 ; 김광렬, 정찬일]

 

[덧붙이는 시 감상]----‘폐선을 진행방향으로 보면서 각각의 면에서 만난 정황을 다양한 각도로 재조립하여 그려내는 표현방식이 고집스럽게 보인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후미는 곧 사라질 물거품일 뿐이라는 잠언적 선언에도 공감하지만 그 공감에도 불구하고 시가 던지는 메시지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무언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생각이 머물고 있다.

지금까지 신춘문예작품 당선시를 심사위원의 견해를 붙여 살펴보았다.

 

 

6. 시적소재의 유사성과 문제점

 

신춘문예 당선작품 속에서 소재의 유사성이 발견되는 시를 만나면 시를 감상하는 사람이나 신춘문예에 막연한 기대를 가진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매우 불편해진다.

그것은 어떤 특정인들에게서 지도를 받은 사람들만이 신춘문예에서 주목을 받아 당선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개연성에 대한 불편이다.

, 그러한 작품들만 선택하게 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함께 그 불편함이 끼어들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유사한 작품이 당선작품으로 등장하는 일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자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불편한 합리적 의구심을 떨쳐내기는 어렵다.

그런 현상은 오래전에도 자주 같은 소재의 시가 당선시로 뽑히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서로 직품을 가지고 경합하는 신춘문예작품의 세계에서는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같은 지도 시인의 지도를 받은 시인들의 작품이 어떤 혜택을 받아 당선작이 된 것이 아닐까?하는 합리적이고 불편한 의구심 때문이다.

이번에도 경인일보와 광주일보의 시에 같은 소재들이 등장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

경인일보의 당선 시 한 순간 해변에서 등장하는

 

검은 얼굴의 아이가 있어

조류를 타고 해변까지 밀려온 대륙의 아이가 있어

뿔뿔이 흘러가는 하늘에 흰 수리는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어

----중략----

한참을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 해변이 있어

검은 얼굴의 아이가 부르던 난민의 노래가 밀려나가는

 

와 같은 표현이 주는 이미지는 몇 해 전 201592시리아내전을 피해 지중해를 건너던 3 살배기 시리아난민 어린이(아일란 쿠르디)의 곤히 자는 듯 엎드린 채 죽은 모습이 터키의 휴양지 보드룸 해변에서 발견되어 마음을 울렸던 사진 한 장의 기억이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내용은 경인일보 작품이나 아래에 나오는 광주일보 작품에서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건 다만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 음모와도 같은 불편함을 지우기 어렵다.

위의 예에서처럼 광주일보 당선시 물의 악공들에서도 시리아 난민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리아 굶주린 혈()의 사막에서 금빛 모래사장 해변

의 춘곤증자들에게

창백한 시체가 한 조각 잘린 구름으로 떠밀려올 때

----중략----

아직도 선연한 비극을 미디어는 밤낮없이 이국(異國)

해변에서 송출하고

모래 속 조그마한 얼굴을 묻고서 끝없이 바다를 향하

는 어린 시체는

아무런 말이 없다

 

위와 같은 구절에서 앞에서 언급한 시리아 난민의 어린이에 관한 동일한 사진의 아픔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시인들은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들 중에 몇 몇은 같은 소재를 가지고 습작연습을 하면서 공유한 이미지들이 오염된 그들만의 리그에서 나온 작품일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한 합리적 의심들은 어디에서 온 것 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동일한 이미지들이 시적 주제의 흐름을 가진 작품들이 다른 두 곳---경인일보(한 순간 해변)와 광주일보(물의 악공들)---에서 당선작품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지도로 어떤 시창작 활동---습작과 비평 활동에서 다른 작품들과의 이미지를 공유한 것 같다는---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시적 동질성이 있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과거에도 동일한 주제---예를 들면 신발, 또는 구두와 같은 소재, 혹은 구름, 골목길 등에 관한 소재들이 당선작품 대열에서 줄줄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를 다룬 작품들이 여러 번 당선작품으로 당선된 사례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조문’(영남일보)첫차‘(광남일보)와 소재에서도 조문이라는 유사성이 보인다.

이러한 소재의 편중은 습작 경험을 나눈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그 평가(당선)를 받게 된다는 데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시인들의 상상력의 공간을 어떤 주제에 집중시킴으로서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목표에 쉽게 접근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자유롭고 활달한 시적 정서의 분화를 저해할 수도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러한 성향의 평가는 우리 현대시의 발전에도 저해요인이 된다.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고 활달한 세상을 날아다녀야 할 상상력을 갇힌 공간에 가두어 두는 것은 사색적 한계를 노정하게 되는 문제도 나타나게 할 개연성이 높다.

 

7. 신춘문예 당선 시에 대한 전체적 흐름

 

매년 새로운 신춘문예의 당선작품을 읽으며 눈에 번쩍 띄는 놀라움과 신선함을 던져주는 시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하지만, 여전히 기대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이 시대의 시가 앞으로의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한 흐름으로 기록할 만한 시를 만나기엔 부족해 보인다.

물론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지만 진정성이 있는 작품으로서 높은 서정성을 투영해 보여주는 시적 깊이를 만나게 되거나, 아니면 과거를 뛰어넘는 실험적 정신을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시적 발현이나 정밀靜謐한 정서적 얽힘이 사색의 깊이를 아우르는 무거움이라도 만나기를 기대하여 보지만 아직은 그런 커다란 울림이 있는 시는 보이지 않는다.

시적 지평을 열만큼의 실험적인 시도 역시 어중간한 위치에 머물고 있을 뿐 그 실험적 시도가 정치精緻한 연결성과 이미지의 발현을 품고 있는 노력이 엿보이는 신인다운 기개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도 않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면 잘못된 표현일까?

지난 몇 년의 강한 서정성을 뛰어넘는 작품을 발견하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이러한 시적 흐름의 정립이 어중간한 시대에는 앞으로 다른 시적 탐구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된다. 그런 경향이 최근 2~3년 동안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만큼 다음해에는 더 많은 난해한 틀의 시가 등장할 가능성이 커질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예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신춘문예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각자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시적 변화를 추구하게 될 까? 바로 신춘문예작품들이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는 이 시대의 변화는 다소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다른 새로움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월간 모던포엠
글쓴이 : 전형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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