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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글꾼 _ 이정록 시인 초청 강연 자료 본문
[ 제3회 세계한글작가대회 기념 ]
이정록 시인 초청강연
일시 : 2017년 9월 7일 18:30
장소 : 북카페 문정헌
주최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주관 : 국제펜클럽 경주지역위원회
후원 : 경주시
살림 글꾼
- 제3회 세계한글작가대회 기념
이정록 시인 초청강연 자료
1. 내 시와 약속을 해라
폐가 마루를 띁어내어 조각칼로 선을 뜨고, 유화물감으로 붓질하는 화가를 안다. 그의 이름은 장경희다. 그의 그림은 못이 빠져나간 자리, 혹은 옹이가 빠진 자리에서 강렬하게 소용돌이친다. 때론 농부의 따스한 눈동자 한가운데를, 때로는 할머니의 젖꼭지나 금니에 허방을 놓는다. 박장대소하는 노인의 손등에 검은 구멍이 뚫려 있다.
폐가의 식구들은 저 마루를 얼마나 오래 닦았을까? 얼마나 많은 밥상과 목침과 재떨이를 떠받들고 있었을까? 얼마나 많이 파리채를 맞았을까? 얼마나 오래도록 젖은 걸레의 가려움을 견뎠을까? 얼마나 오래 발가락과 뒤꿈치의 무게를 받아 모셨을까? 얼마나 많은 한뎃잠을 잤을까? 얼마나 두껍게 억장들이 스며 있을까? 닭 모가지처럼 긴 한숨과 병아리 눈물처럼 쉬 말라버린 행복들.
서산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에 가서, 나는 울었던가? 나는 내 시에게 약속했지.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들리는 시를 쓰겠노라고. 마룻장의 울음 소리를 잊지 않겠다고. 옹이를 감싸는 나뭇결의 아름다움과 못 뺀 자리처럼 아물지 않는 상처를 시안(詩眼)으로 삼겠다고.
하지만, 약속으로만 닿을 수 있는가? 오래도록 진창에 빠져 헤맬 때, 조각가 전항섭의 집에 간 적이 있다. 그가 천상배필로 받들어 모시는 김명리 시인과의 인연 덕이었다. 그가 조각하는 나무는 대부분은 대들보다. 천장 속 몇 뼘 허공에서 백 살은 더 보태신 대들보. 지붕에 닿는 소나기의 맨발과 따뜻한 햇살을 오래 상상한 몽상가. 방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희로애락과 폐가로 살아온 몇 십 년의 침묵을 결가부좌한 수행자. 아, 공중부양 중인 대들보의 깨끗한 자존! 근데 주춧돌도 기둥도 없이 어떻게 상량식을 하고 써까래를 놓는단 말인가?
그래, 이것만은 기억하자. 내 시의 마룻장과 대들보!
2. 퇴고를 즐겨라
퇴고( 推敲) 라는 말을 새겨보면 글을 다듬는 것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죠. 퇴(推)는 '밀다'라는 뜻이고, 고(敲)는 '두드린다'라는 뜻의 한자지요. 퇴고란 시문(詩文)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 자는 낭선(浪仙), 777~841)가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면서 「이응의 유거에 부침[題李凝幽居]」이라는 시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閑居少隣竝(한거소린병) 한가롭게 머무니 함께하는 이웃은 드물고
草徑入荒園(조경입황원) 풀 덮힌 오솔길은 황폐한 뜰로 간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은 달빛을 받으며 문을 두드린다
過橋分野色(과교분야색) 다리를 건너니 들판의 색도 나뉘고
移石動雲根(이석동운근) 돌을 옮기니 구름 뿌리가 움직인다
暫去還來此(잠거환래차) 잠시 떠났다가 다시 이곳에 왔느니
幽期不負言(유기불부언) 다시 오겠노라는 오랜 기약 어기지 않았노라
그런데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에서 '민다[推]'라고 하는 것이 좋을 지, '두드린다[敲]'로 해야 좋을지, 여기서 그만 딱 멈추어버렸습니다. '퇴'와 '고', 두 글자만 정신없이 되뇌며 가던 그는 그만 말을 탄 채로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죠.
"무례한 놈, 무엇하는 놈이냐?"
"당장 말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이 행차가 뉘 행찬 줄 알기나 하느냐?"
네댓 명의 병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가도를 말에서 끌어내려 행차의 주인공인 고관 앞으로 끌고 갔죠. 그 고관은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로, 당시 그의 벼슬은 경조윤(京兆尹, 도읍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이었죠.
한유 앞에 끌려온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솔직히 말하고 사죄했죠. 한유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지요.
"내 생각엔 '퇴'보다는 '고'가 좋겠네."
이 사건을 계기로 가도와 한유는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고, 스님이었던 가도는 환속(還俗)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퇴고란 좁게는 맞춤법에 맞게 어휘와 어구를 고치고 적절하게 문장을 가다듬는 것이지만, 크게는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독자에게 바르게 전달하려는 것이지요. 즉 시원한 소통을 지나 출렁이는 감흥까지 한통속이 되게 해주는 겁니다.
시의 퇴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시어 한두 개를 바꿔도 시 전체의 미적 감흥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거예요. 좋은 시는 단번에 독자의 미적 감흥을 자극하는 스위치를 갖고 있지요. 시를 퇴고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스위치를 알맞은 장소에 적정한 높이로 장치하는 일이지요. 시의 방 한 칸이 환해지는 것은 방 어딘가에 스위치와 전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벽지만 아름다워도 시 전체가 화사해지겠지만, 순간적으로 독자의 내면을 확 뒤집어놓는 미적 충격을 주지는 못하니까요. 이것을 나는 '스위치론'이라고 말합니다. 어둡고 어수선한 초고(草稿)의 방 내부에 스위치를 달고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이 넓은 의미의 퇴고인 것이지요.
그러면 당대 최고의 문장가 한유는, 왜 '퇴'보다 '고'로 바꾸는 것이 낫겠다고 했을까요? '민다'라고 쓸 때에는 바랑을 멘 스님이 날이 저물자 자신의 암자로 돌아온 것이지요. 그러니 그저 밀고 들어가면 될 뿐입니다. 문 여는 소리야 나겠지만 조용히 자신의 방에 들어가 짧은 독경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시의 문이 닫히고 말지요. 탁발과 고행이 끝난 거죠. 시 속에 그려지는 풍경의 역동성이 당연 작아집니다.
하지만 '두드린다'로 바꾸면 늦은 밤 스님은 외딴집이나 나모르는 암자를 찾은 게 되죠. 고행의 복판에 스님이 있는 겁니다.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의 낯선 길이 있죠.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신발을 끌고 나오는 동자승의 목소리로, 설핏 잠에 들었던 연못가의 새들도 잠자리를 고쳐 앉을 것이고요. 또한 산짐승들도 몇 번의 울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려 하겠죠. 의심이 많은 작은 새들은 자리를 차고 올라 달빛을 가르며 날아갈지도 모르고요. 문을 열어주려고 동자승이 눈을 비비며 나올 게고, 합장하는 작은 손에도 달빛이 어리겠죠. 탑을 돌아 계단을 올라가는 스님과 동자승의 발등도 보일 테죠. 큰스님에게 조용히 여쭙는 동자승의 목소리가 있을 게고, 그다음엔 찻물을 따르는 그림자가 암자의 단조로운 문살에 비칠 테죠.
글자 하나가 바뀌면서 시 속의 그림이 영화필름 돌아가듯 바뀌고 암자를 둘러싼 공간 전체가 입체적인 소리통으로 바뀌는 게 떠오르죠? 그리고 스님에게는 탁발의 고행길을 선물하게 되었네요.
퇴고는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시의 혈관을 풀어주고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을 자극하는 퇴고가 되어야 하죠. 독자의 상상력에 건전지를 끼워주고 태엽을 감아주는 퇴고가 되어야 하죠. 그래야만 시정신이며 시인의 통찰력이 독자에게로 건너갈 수 있으며, 새로운 연대의 힘이나 감동의 파장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시의 방에 벽지를 바르고 원앙금침을 깔아놓고 문 가까운 곳에 스의치를 달고 밝은 알전구를 끼워놓아요. 그러면 독자들도 방에 들어와 동침하겠지요.
문은 잠그지 말아요. 지그시 봄바람도 들어오게요.
3. 글감의 주소를 자주 옮겨라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는 거다.
시는, 온몸으로 줍는 거다.
그 마음 하나로
감나무 밑을 서성거렸다.
손가락질은 하지 않았다.
바닥을 친 땡감의 상처, 그 진물에 펜을 찍었다.
홍시 너머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사랑의 주소는 자주 바뀌었으나,
사랑의 본적은 늘 같은 자리였다.
방안 삼천리!
작은 방 한 칸에도
아랫목과 윗목은 천지 먼 타향이다.
4. 빵모자를 벗어던져라
나는 '왕년 빵모자'를 싫어합니다.
어찌어찌 쉽게 등단해서 시인이라는 작은 닭 벼슬 하나를 얻었으되, 시는 쓰지 않고 그럴싸한 빵모자만 얹고 다니는 부류들. 그런 반 푼 시인들의 말이란 "왕년에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허풍의 추억담이 대부분일 뿐이지요. 자신의 마음 안창에 현재의 튼튼한 주춧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왕년은 피땀으로 얼룩진 새벽정신이었을까요? 찬찬히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의 왕년이란 것은 촌닭 서너 마리만 올라도 금세 허물어질 삭은 횃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놓을 만한 시도 시집도 변변찮아서 자신의 빈약한 문학을 왕년 빵모자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로 말하고, 소설가는 소설로 말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다면 어찌 시인이겠습니까? 단지 모자가게의 마네킹에 불과할 뿐이지요.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합니다. 지금 전화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것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걸 쓰라고 합니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 합니다. 단언컨데,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습니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지요.
5. 글감을 품고 사는 바람둥이가 돼라
음보(音步)라는 말이 있지요. 소리가 걸음마를 뗄 때까지 퇴고를 많이 하십시오. 시가 펜을 놓을 때까지 고치십시오. 시가 나를 풀어줄 때가 되면 시는 드디어 자신의 맨발을 땅에 딛고 사람들 속으로 걸음마를 떼지요. 음보는 시인의 산보가 아니라, 시의 걸음마지요.
시상(詩想)이란 것도 운명이 있어서, 저 무한천공의 어둠 속에서 억만 겁을 떠돌다가 한 시인의 가슴을 겨누고 들이닥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찌 왕년 빵모자에게 깃들겠는지요? 억만 겁을 떠돌던 단 하나뿐인 생각이라면, 자신의 방에 알전구를 밝혀줄 시인에게 깃들지 않겠는지요? 그러니 좋은 시상 하나가, 떡하니 쳐들어왔다면 어떻게 모셔야 하겠는지요? 그와 눈 딱 감고 살림을 차려야겠습니다. 출산할 때까지 같은 주소에서 살아야겠습니다. 처음에는 끙끙 데리고 놀다가, 나중에는 시상이란 녀석이 나를 데리고 놀도록 몸과 마음을 내맡겨야지요.
무엇인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와 함께한다는 거죠. 함께 논다는 것이고 데리고 산다는 거죠.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는 축구공을 머리맡에 놓고 축구에 관한 잡지를 책가방 속에 넣고 다니지요. 'ㄷ'자만 보아도 세워서 골문으로 삼고 싶을 테죠. 우리들이 하는 막말 가운데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 시를 쓰려면 자신이 쓰려는 시상이나 글감을 오래도록 굴리며 품고 살아야 하겠죠. 그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떠나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시를 쓰는 일은 광활한 평원에서 눈초리를 빛내는 사자와 닮은 구석이 있어요. 요놈이다 싶으면 천천히 다가가서 목덜미를 콱 물어버리는 거죠. 대상이 숨을 놓을 때까지, 그 대상이 내 어금니에서 서서히 자신을 놓을 때까지 짐짓 먼 산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하죠. 먹잇감을 물고 지평선 마른 풀숲 너머 노을을 바라보는 굶주린 맹수의 눈이, 원고지 칸칸마다 서려 있죠.
부동산 투기를 하는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땅하고 나무는 소리 없이 크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죠. 저 사람이 투기꾼인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한 것이나, 참으로 옳은 '말씀'이란 생각이 엄습한 거예요. 작가란 진술을 넘어서는 창작을 해야 하거니와, 소리 없이 크는 엄중한 시간을 기다려야지요.
좋은 나무가 서 있는 곳이 명당인 것이죠. 시의 씨앗이 내 가슴에 떨어지는 순간, 나는 천하 명당의 비옥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전력투구가 없다면 어떤 나무가 천수를 누리는 아름드리나무가 될 수 있겠어요. 좋은 나무는 스스로 꽃의 수를 조절하고 웃자란 가지를 내려놓잖아요.
품고 산다는 것은, 나무 한 그루가 수천의 나뭇잎과 새소리와 둥우리와 몇 겹의 그늘을 껴안고 산다는 것입니다. 땅의 두께를 재보려는 뿌리의 싱싱함이 서려 있죠. '데리고 산다는 것'은 '품고 산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우주의 아주 잡스럽고 비밀스런 곳까지 다가가서 살림을 차리는 연애주의자이자 바람둥이죠.
6. 설렘과 그늘 사이에서 살아라
시인은 설렘과 그늘에 민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설렘이 사라진 시인의 생은 시가 사라진 생이겠지요. 설렘은 놀람이라고 말해도 괜찮겠지만, 그 일렁임은 다른 것 같습니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나라에 가려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세발자전거를 타고 달나라에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겠지요. 기발한 생각이라고 놀라워하기는커녕 놀림만 당하겠지요. 하지만 시인은 허공을 달리기 위해 브레이크를 손질하고 바퀴에 바람도 넣지요. 새들하고 부딪히면 안 되니까 따르를 소리도 울려보겠지요. 설렘으로 가득 부풀어 오른 가슴을 내밀고 하늘을 날겠지요.
한편 그늘이라는 것은 참 서늘하겠지요. "네 소리에는 그늘이 없어" 라는 말은 「서편제」란 영화에서 들은 것 같아요. 밖으로 나가지 못한 내부의 어둠이 가슴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소리나 시를 업고 밖으로 나온 무엇, 그게 그늘인데요.
목탁 속 어둠 같은 것.
뻥 뚫린 고목의 내부에 서려 있는 어떤, 없음의 두께.
텅 빈 부재의 숨소리.
벌레 먹은 나뭇잎을 막 빠져나온 햇살이 아래 잎에 하염없이 부딪치다가 어쩔 수 없이 나무 밑에 내려놓는 것.
먼 길 달려온 햇살이 자신의 무릎을 접어서 한 그루 나무 앞에서 기도할 때, 그 햇살과 고목이 한꺼번에 뽑아내는 한숨 같은 것.
아, 뜬구름 잡고 비를 만드는 이 물컹거리는 언어들에도 그늘은 있죠. 어둠의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면, 세상 모든 그늘은 내 발밑으로 수렴되지 요. 내 발바닥에서 발산되는 어둔 햇살들.
이쯤에서 이 글은 편지봉투의 환한 그늘로 들어가야겠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 저 맑고 차가운 소주잔에 건배! 소주잔에 그늘을 담아 마시는 일, 참 설레이지요.
7. 단순하게 써라
좋은 시인은 뼈로 가고자 합니다. 단도직입을 건너 단순무식으로 갑니다. 나쁜 시인은 살로, 옷으로, 장식으로 가고자 합니다. 복잡한 치장으로, 요란한 유식으로 갑니다.
나여, 이제 단순무식으로 갑시다.
멀리서 숲을 보니, 나무 한 그루 같습니다.
새똥처럼 단순하고, 무덤처럼 둥글 뿐이지요.
좋은 시에는 높은 담이 아니라 울타리가 있습니다. 바람이며 강아지며 병아리들을 술술 통과시키는 허술한 경계가 있습니다. 솟을대문이 아니라 사립문이 있습니다. 문패가 아니라 큰 소리로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머슴과 주인이 아니라 일꾼과 품앗이가 있습니다.
처마가 있고 그늘이 있습니다. 고구마 삶아놓은 양푼이 있고 빨랫줄이 있습니다. 기저귀가 있고 만가(輓歌)가 있습니다. 방과 방 사이,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에 쪽문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있고, 노인네의 헛기침이 있습니다.
시와 시가 모여 시집이 되듯, 집과 집은 옹기종기 모여 마을이 됩니다.좋은 시에는 춤이 있고 가락이 있고 노래가 있습니다. 좋은 마을에는 꽹과리 소리 끊이지 않는 경사가 있습니다. 경사 같은, 애사가 있습니다.
좋은 시에는 일순간 어둠을 밝히는 불꽃 심지가 있습니다. 불꽃 심지를 찾는 더듬거림이 있습니다. 어둠을 주물럭거리는 손끝 떨림이 있습니다. 알전구 매달린 방, 출입문 가까이 스위치가 있습니다. 그 스위치를 건들기만 하면 일순 환해지고, 일순 깜깜해지기도 하는 한 소식이 분명 있습니다. 그 스위치 언저리에는 어김없이 검은 손때가 있지요. 손때만 한 현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8. 자연에서 빌려 써라
시를 쓰면서 되뇌는 문장은 "새가 난다" 입니다. 이 단순한 문장이 사실 문장의 전부지요. "어떤 새가, 어찌어찌 난다"라고 수식을 달지 않도록 다잡지요. "무엇 같은 어떤 빛깔의 새가, 뭣 같은 몸짓으로, 어찌어찌 난다"라고 덕지덕지 휘황한 금박장식을 달지 않도록 펜 끝을 세웁니다. 시의 퇴고는 첨(添)이 아니라 삭(削)이어야 한다고 말이에요. 사물과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직시와 통찰만이 단순한 문장을 만들지요. 멀리 나는 새는 단순하지요, 홀가분하지요.
그렇다면 본질에 대한 통찰은 어떻게 나올까요?
"천지간의 대자연이 나에게 문장을 빌려주었다(大塊假我以文章)."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이 문장을 만난지 올해로 이십 년이 넘었습니다.
시는 창작을 넘어 창조의 경지까지 다다라야 한다는 올가미와 시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현실 변혁에 복무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당위를 풀어준 것는 노장(老莊)과 이백이었어요. 이백의 이 문장을 만나고서야, 하늘 멀리에서 저 혼자 반짝이거나 미완의 혁명사 틈에서 죽창처럼 차갑게 말라가던 시가 드디어 내 무릎 사이 사타구니께로 다가왔어요. 나는 막 몽정을 경험한 소년처럼 내 몸의 가장 뜨겁고 은밀한 급소에 시를 넣어두고 만지작거릴 수가 있었죠.
어느 날이었어요.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코 앞에 시창작론의 요약본이 걸려 있었지요. 그 내용인즉, "한 걸음 더 가까이"와 "우리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였어요. 그래요. 사물과 현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밀착시키는 자세가 중요하죠. 골똘하게 들여다보며 데리고 사는 거죠. 거듭 강조하거니와 시상(詩想)과의 뜨거운 동거(同居)가 필요하죠. 그 다음은 눈물이 문제죠. 엄살과 과장, 감상적 포즈의 배척 말이에요.슬프다, 외롭다, 눈물 난다, 그립다, 사랑한다, 죽을 것만 같다, 미치겠다 등등의 말만이라도 멀리 내쳐야지요. 그건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죠.
9. 어머니학교
근래에 『어머니학교』란 시집을 냈다.
물 _ 어머니학교4
티브이 잘 아오라고
지붕에 삐딱하니 세워논 접시 있지 않냐?
그것 좀 눕혀 놓으면 안 되냐?
빗물이라도 담고 있으면
새들 목도 축이고 좀 좋으냐?
그리고 누나가 놔준 에어컨 말이다.
여름 내내 잘금잘금 새던데
어디에다 물을 보태줘야 하는지 모르것다.
뭐가 그리 슬퍼서 울어쌓는다니?
남의 집 것도 그런다니?
잠자리 애벌레인 학배기가 물속에서 열 차례쯤 탈피를 할 때, 그 작은 설렘과 놀라움은 익히 습관이 되어 있음으로 금세 물결 속으로 묻히리라. 배고픔만이 엄습하리라. 하지만, 햇살 좋은 늦여름 아침에 학배기로서의 마지막 껍질을 벗고 날개를 펼칠 때는 어떨까. 머리를 갸우뚱갸우뚱! 아무리 자신을 훑어 보아도 학배기는 없고,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해도 날개 때문에 물 거죽만 몇 번 집었다 놓았다 할 잠자리. 지난 물속 삶은 기억 저편으로 지워지고 하늘로 솟구치고픈 마음만이 콩콩거리리라. 그런 아침이 덜컥 찾아왔다. 2010년 11월 9일 새벽의 어리둥절함과 허둥지둥, 따로 놀던 몸과 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학배기가 잠자리로 탈바꿈할 때의 느낌이 딱 그러할 것이다. 알밤을 쏟아낸 밤송이에 눈보라 들이칠 때, 그 차가운 떨림이 그러할까. 몸이 날아오를까 걱정이 되어 베개를 껴안고는 엎드려 눈을 감았다. 내 등짝 무게로 날개를 구겨서 침대에 눕혔다. 옛 몸으로 돌아가려고 어둡고 무거운 생각을 불러냈다. 잠시 후 나는 다시, 물속 학배기처럼 눅눅해졌다. 순간, 어머니의 육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뒤척일 때마다 한 편씩, 늙은 배우의 대사처럼 군더더기 없이 가슴에 박혀왔다. 허공을 지나는 낡은 유선 전화선이 뚝 끊어져서 귀에 처박힌 것 같았다. 글의 제목을 '효도폰'이라 올리고 번호를 달아 다섯 편을 썼다. 눈물이 나왔다. 손을 어루만져보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가 어머니를 만지고 어머니가 나를 어르는, 내가 어머니이고 어머니가 나인, 이상한 몸뚱이가 아침을 먹고 출근을 했다. 운전면허도 없는 어머니가 나를 태우고 출근을 시켜주었다. 내 대신 회의를 하고 수업도 했다. 내 대신 3차까지 통음을 하고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 칠순의 나이에 담배를 배우고 은행나무 및에 쭈그려 앉아 토하기도 했다. 해장술과 새벽 담배가 궁합을 맞췄다. 칠순 노모 속에 웅크린 사십 후반의 아들이 포대기에 시를 받았다. 어름한 고쟁이 속, 전대에 말씀이 그득했다.
27편을 쓰고 나서 소설가 전성태와 시인 권덕하, 육근상 형, 그리고 연극배우 전장곤을 집 앞 참치집으로 소집했다. 물론 며칠 전에 원고를 보낸 뒤였다. 얘기를 마치고 나서 술을 마시자고 했다. 이구동성 계속 쓰라고 했다. 전성태는 '어머니학교'란 희곡을 말했고, 전장곤은 아버지 역을 맡겠다고 했다. '야, 휜소리 그만하고 빨리 참치 먹자'라는 뜻이었겠지만, 나는 그만 80여 편의 독백체 시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건배사는 "꽃은 까지려고 핀다"였다. 잘 까지자! 꽃봉오리가 까져서 열매와 씨앗을 낳듯. 새벽까지 술이 달았다.
75편을 쓰고 나자, 시의 샘이 막혀버렸다. 아버지의 상처와 치부를 까발리는 대목에서 어머니의 말문이 닫혀버린 탓이었다. 2012년 5월 5일, 아버지 묘를 이장했다. 칠성판에 어버질 뉘고 무릎 꿇고 조아렸다. "'어머니학교' 를 마무리해야겠는데, 아버지 얘기 좀 해야겠어요?" 삼세 번 여쭈었지만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침묵은 가장 큰 긍정이라고, 내 좋을 바 대로 해석했다. 곧바로 시는 마무리 되었다. 80여 편 중에 두 편은 한 편으로 퇴고하고, 몇 편은 버렸다. 72편, 어머니 연세와 맞먹는 편수다. 추석을 맞아 그간 친구 임병조가 찍은 사진과 내가 그린 캐리커쳐를 노트북에 담아 갔다. 어머니께서 삐치셨다. 내가 그린 캐리커쳐가 맘에 안 든다 했다. 이왕 그리는 거 인심 써서 곱게 그려드리지 너무 추레하게 그렸다고 누님이 웃으셨다. 곁에 있던 미대입시 준비생인 막내아들이 거들었다. "그림은 첫 번째가 최고예요. 다시 그리면 영혼이 사라져요." 역시 아들이다. 다시 그릴까? 망설이는데, 어머니가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리며 한방 날리셨다. "어미를 무덤에다 처박았다가 꺼내서 그렸구나." 순간 방안에 침묵이 돌았다. 이 순간에도 시로 말하는 어머니! 서둘러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컴퓨터 성형을 해야겠다고.
시집이 나와서 어머니께 올렸다. 집에 몇 부 놓고 간다고 했더니, 그냥 가져가란다. 그림을 바꿨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며칠 뒤, 다시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시집을 더 찍을 기회가 생긴다면 아버지와 함께 찍은 결혼기념 사진을 넣자고 했다. 어머니는 소녀다. 아무리 나이를 드셔도 꽃무늬 팬티다. 경(經)을 받아 적고도 몰랐다. 나는 '어머니학교'의 학생 중에 가장 공부가 모자란 꼴등 학생이다. 졸업반인 줄 알았는데, 다시 입학식이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학교의 동창생이다. 언제쯤 졸업식 노래를 불러보나?
"어미를 무덤에다 처박았다가 다시 꺼내서 그렸구나. 한밤중에 부랴부랴 떡칠을 했구나." 비유와 상징이 아니라면 침묵이 낫다고 여기는 시작법의 결정판! 저 도저한 말씀의 회오리를 언제쯤이나 다 받아 모실 것인가.
10. 천 편을 써야 가락 하나 얻는다
千編一律이라고
머리맡에 써놓았다.
천 권을 읽어야
시 한 편 온다.
편지봉투에 풀칠하듯
한 줄 더 봉한다
천 편을 써야
겨우 가락 하나 얻는다.
二律背反,
이천 편을 쓰면
등 뒤에 눈을 단다.
- 졸시 「시론」( 《푸른사상 》, 2015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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