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목판화 / 진창윤 본문

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목판화 / 진창윤

가짜시인! 2017. 1. 4. 17:17

목판화

 

            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

 

201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시다.

시에서 시인이 먼저 보인다. 한 행 한 행의 의미와 기교를 찾기 보다 숨소리를 죽여가며 시인의 진지하고 세밀한 동작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시인이 처한 현실을 시인이 꿈꾸는 세상으로 바꿔 놓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눈 내리는 하늘에 별을 조각하는 시인. 동화 같은 이야기는 읽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아름다운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게 아님을 믿는다.  경험에 의해 체화 되거나 사색에 의해 육화되어진, 그런 성숙된 내면이 없다면 그 시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영혼 없이 손장난으로 시를 쓰는 사람은 결코 좋은 시에 다다를 수 없다. 시인이 목판 위에 그려놓는 세상은 시인의 내면을 그대로 필사해 놓은 거라 감히 믿어본다. 

 

시 보다 시인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 시가 참 좋다.

 

- 가짜시인

'나의 편린들 > 내가 읽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의 중력 / 신철규  (0) 2017.03.17
빅풋 / 석민재  (0) 2017.01.06
천 원 / 장인수  (0) 2016.12.28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0) 2016.12.16
가족 / 박수현  (0) 2016.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