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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시인 _ 매밀신문 기사(2008년)

가짜시인! 2016. 12. 15. 09:52

 
[인터뷰]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시인
     

2008-05-17 07:38:31

 시를 저질렀던 그때가 그립다. 열정 하나로 한行 한行 밀고 나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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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이 1994년 펴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5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시집으로는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다. 사실 시집이 아니라 소설도 1만부 팔리기가 무척 어렵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성공은 시인에게 많은 팬과 많은 적을 남겼다. 어떤 이는 그녀를 찬미했고, 어떤 이는 매도했다.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전문가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사람들, 특히 문인들은 "그녀가 '잔치가 끝났다'고 말함으로써 열정의 1980년대를 박제화했다"라고 평가했다. 더 나아가 시인이 1990년대를 '환멸'로 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독자들은 그녀를 '도발적인 여성'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어떤 쪽이든 옳거나 그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인은 자기 생각을 시로 표현했고, 독자는 자기 생각을 투여해 읽었기 때문이다. 문학적 텍스트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법이다. 사람들이 흔히 그녀의 시를 두고 '도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침없는 화법, 시어 같아 보이지 않는, 익숙한 시어가 아닌 날것 그대로의 언어를 쓰기' 때문이다.

'자위 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사람들은 내가 이혼한 줄만 알지/ 몇번 했는지 모른다' -어떤 사기-

'녀석과 간음할 생각으로/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어떤 게릴라-

이보다 더 '날것'인 표현도 있다.

'아아 컴-퓨-터와 (X)할 수 있다면!' -Personal Computer-

 

◆나는 도발적인 사람이 아니다

 

괄호안의 'X' 는 신문지면임을 고려한 숨기기다. 이쯤에 이르면 웬만한 사람들은 경악하거나 분노를 터뜨린다. 통쾌함, 쾌락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인 최영미를 '도발적'인 사람으로 평가한다.

시인 최영미는 "무엇이 도발적인지 모르겠다. 나는 도발적인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더불어 자신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오역되고 있다고 했다. 오역에 대해 때로 침묵하고 때로 항의했지만 별 변화가 없었다고 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신선한 무모함, 강철처럼 단련된 시어들로 표현할 뿐 '도발적'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도 했다.

최영미는 '잔치는 끝났다'에서 '잔치'는 80년대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이 시를 모임이 끝난 후, 그러니까 술자리나 밥자리 같은 물리적 모임이 끝난 후 생각을 쓴 것이라고 했다. 언어 그대로 읽어야 할 시인데 독자들이 '은유적'으로 읽었다는 말이다.

또 '컴-퓨-터와 (X)할 수 있다면!'이라는 구절이 흔히 '사이버 섹스에 대한 찬미'로 평가되지만 반대라고 했다.

그녀는 "난 컴맹이다. 아직 8년 전 노트북을 쓴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줄 모르고, 문자 메시지 보는 법도 최근에 알았다. 기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Personal Computer'는 컴퓨터에 대한 풍자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영미는 독자들이 직설로 읽어야 할 부분에 은유를, 은유로 읽어야 할 부분을 직설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트러블메이커가 아니다. 변덕이 좀 있을 뿐…

 

시인 최영미는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는 듯했다. 면전에서 기자를 비난하기도 했다.

"아무데서나 식사하시죠"라는 말에 "언니를 모실 줄 모른다. 경상도 남자들은 대체로 그렇다. 좀 배워라"라고 했다.

농담조가 아니라 기분 상한 말투였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춘천에서 대구에 도착한 사람을 위해 점심 식사 장소조차 물색해 두지 않은 점에 대한 힐난이었다. 최영미씨는 최근 속이 불편해 음식을 가려먹어야 한다고 했다. 한식이나 죽을 먹고 싶다고 했지만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트러블 메이커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변덕이 좀 있을 뿐이다"고 했다.

최영미는 이름난 시인이지만 이른바 '폼'을 잡거나 그럴듯하게 치장하지 않았다. 지금 기분을 그대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단어를 썼다. 사진촬영 때 독자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쳐다보자 "이제 그만 하자, 쪽 팔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으로 시작하는 시 '선운사에서'를 두고 그녀는 "선운사에 가보지 않고 썼다"고 말했다. 선운사에 안 가보고 선운사를 이야기할 수 있고, 선운사 동백꽃을 안 보고도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자기 입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문인들 중에는 "어떻게 선운사 동백꽃도 안 보고 문학을 이야기하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선운사에 안 가봤더라도 '가보고 썼다'고 말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 최영미는 문학, 혹은 문인들이 규정한 어떤 '틀'에 갇히지 않은 사람 같았다.

어쩌면 그런 점이 최영미 시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골라낸 시어를 쓰지 않는다. 체험에서 묻어난 생활어를 쓴다. 그녀의 시가 쥐어 짜낸 언어가 아니라 터져 나온 언어로 보이는 까닭일 것이다.

 

◆나는 시를 '저질렀던' 시절이 그립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에도 그녀는 몇 권의 시집과 미술 관련 산문집을 펴냈다. '화가의 우연한 시선' '시대의 우울' '꿈의 페달을 밟고' 등인데 그 책들의 어투는 이전의 '서른 잔치'보다 확실히 부드러웠다.

"부드러워진 듯하다"는 말에 시인은 "나이를 먹은 것"이라고 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쓸 때는 체험을 바탕으로 썼지만 이후에는 스스로 시인임을 의식했고, 그래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인 최영미씨는 일산에서 살다가 작년에 춘천으로 이사했다고 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에도 몇 권의 책을 냈는데 '서른, 잔치는 끝났다'만큼 많이 팔린 책은 없었다. "이후에 낸 책이 5만권밖에 팔리지 않아 다소 실망했는데 알고 보니 5만권은 놀라운 숫자라고 하더라"고 했다. '서른, 잔치…'의 50만부 판매에 비하면 너무 적지만 문학서적 5만권 판매는 놀라운 일이다. 최영미씨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몇 권의 책을 썼고, 미술강의를 하며 지냈다고 했다.

최영미씨는 "첫 시집을 낸 뒤 문단 선배나 어른들 눈치봐가며 술을 마시듯, 어느새 내가 시를 '모시고' 있다는 걸 알고 경악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녀는 "시를 저질렀던 그 시절이 그립다. 서투른 만큼 순수한 첫사랑의 열정으로 한 행 한 행 밀고 나갔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1998년 두 번째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를 내면서 그녀는 "매너리즘 냄새가, 애써 짜 맞추려 끙끙대며 피워댄 줄담배 냄새, 고약한 시인의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인은 "경악해야 한다. 더 경악해야 한다. 혁명적으로 경악해야 한다. 뜨거운 순댓국밥에 입천장을 데일 때만큼 경악해야 한다고, 혼자 다짐했다"고 말했다.

 

◆나는 순간을 사는 사람이다

 

최영미는 자신에게 시는 운명이라고 했다. 그녀의 시작(詩作)은 직업으로 시작된 것이다. 결혼을 했고 이혼을 했다. 이혼했을 때 스물넷이었다. 그리고 부모님 집에 눌러 앉아 뒹굴었던 시절이 있었다. 직장도 돈도 남자도 없었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뒹구는 그녀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나이 서른에 남자가 있냐? 직장이 있냐? 돈이 있냐? 네 인생은 실패다."

그녀는 어머니의 그 한마디에 시인이 됐던 것 같다고 했다. 곧바로 친구한테 100만원을 빌렸다. 우선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값싸게 머물 수 있는 곳, 고시원으로 들어갔고, 고시원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나는 늙어죽을 때까지 시를 쓰겠지만 시인이 자랑스럽지는 않다. 그럼에도 시를 써야 한다. 그게 내 운명이니까."

그녀는 "인생의 쓴맛, 고통을 맛보아야 시를 안다. 고통이 있어야 문학이 있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해 고통스럽고 싶지 않다. 나는 충분히 고통받았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비교적 쉽게 시인이 됐고, 드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지만 그 뒤로는 가시밭길이었다고 말했다.

독자인 우리는 흔히 시인 최영미를 '도발적인 여성'으로 규정한다. 그녀는 이 규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도발적인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예민하고 외로우며, '짝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물론 잘못 봤을 수 있다.)

최영미씨는 스스로 순간을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 남자를 만나 순간적으로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좋아하는 조카를 볼 때 행복하다고 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아침엔 (인터뷰 당일) 기분이 좋았고, 점심 땐(기자를 만난 순간) 기분이 안 좋다. 그러나 저녁엔 좋아질지 모른다." 오후 7시쯤 전화를 냈더니 최영미씨는 "KTX를 탔으며 기분이 나아졌다"고 답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시인 최영미는….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시작.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1997년 산문집 '시대의 우울', 1998년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2002년 산문집 '화가의 우연한 시선', 2005년 세번째 시집 '돼지들에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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