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시의 본질에 관한 우문과 현답 / 이형권 본문

나의 편린들/詩 자료실

시의 본질에 관한 우문과 현답 / 이형권

가짜시인! 2013. 8. 10. 11:29

 

[ 시의 본질에 관한 우문과 현답 ]

 

이형권 : 문학평론가, 충남대교수 ,2012년 UCLA 방문교수

 

1. 프롤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시인 추방론을 역설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세상을 이데아와 현상계로 나누어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곳을 이데아라고 했다. 그런데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이 기반을 둔 추상적 사유가 긴요한데, 시인은 그러한 사유보다는 즉흥적인 감정과 구체적 감각에 얽매이는 존재이기에 무용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시(예술)라는 것은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에서 두 단계나 멀어진 것이기에 더욱 무익하다고 보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조차도 이데아를 모방한 것인데, 시는 그 현실을 다시 모방한 것이기에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극복되는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시의 교훈적 기능을 설명하는데 자주 활용된다. 시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사람을 교화하는 기능을 간직한다고 하는 주장을 위한 반증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이 다른 저술에서조차도 시의 기능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시와 관련된 불편한, 아주 불편한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 이후 오늘날에 이르러서 시의 본질 혹은 위의에 대한 불편한 질문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전통적인 의미의 시는 존립 자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가 “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에 사라진다”고 했듯이, 시라는 견고한 성채도 시대의 바람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차차 허물어지고 있는 것인가? 실제로 영상 문화가 급격히 대두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 이후 시의 위기는 더욱 가속화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집을 읽는 사람들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서점의 중심 진열대에서 사라진 지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선물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시는 관심과 화제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각종의 첨단 과학과 영상 이미지를 무기로 하는 영화가 각광을 받으면서 전통적인 인쇄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는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다. 저 1990년대 시의 위기론이 담론의 차원에서 대두된 이래 이제는 그것이 현실의 차원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의 위기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시의 위기를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소극적 반응과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를 추구하자는 도전적 반응이다. 전자는 시에 대한 극단적 부정 의식의 소산으로서 논의조차 불필요한 사안이므로 이 자리에서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후자이다. 후자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시가 시대의 트랜드에 맞는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 추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오히려 시의 정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효과적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들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 시의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데 필요하다. 그리고 세상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시의 본질에 대한 우문들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도 시의 위기(론)를 극복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 해명이 현답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2.

시는 왜 시대적합성을 확보하지 못하는가?

 

시가 시댁적합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시대가 날이 갈수록 현실적,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시가 시대적합성을 견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 주지하듯 시는 이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예술양식 가운데 하나이다. 시는 문학 가운데서는 단연 최고(最古/最高)의 양식으로서 인간의 정신적,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 시는 원시종합예술 시대부터 예술의 근간이 되는 양식으로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학 유산 가운데 하나인 고대 중국의 민요집인 『시경』이나 고대 희랍의 서사시인 『일리어드』 , 『오디세이』 등은 모두 시의 양식으로 존재한다. 18 -19세기의 저 낭만주의 시대나 상징주의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도 시 양식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는 근대의 문학 양식인 소설이 등장하기 수천 년 동안 문학의 중심 장르로서의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물질주의적이고 반인간적인 이 시대와 불화를 겪는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깝게는 1980년대 한국에서 시는 시대정신을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당시 시의 부흥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경직된 다양한 가치관의 추구라는 시대정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반민주적이고 폭압적인 정치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짧은 형식으로 인해 응전의 민첩성을 갖춘 시 장르가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각종의 무크지가 발간되고 민중시, 해체시, 신서정시, 페미니즘시, 생태시 등의 다양한 시 양식이 등장한 것도 같은맥락에서 이해된다. 또한 1980년대는 문단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상당한 정도의 부흥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박노해나 백무산 같은 민중 시인들, 황지우나 박남철 같은 해체 시인들, 김용택이나 안도현 같은 신서정시 시인들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또한 도종환이나 서정윤 같은 시인은 한국문학사상 처음으로 대형 베스트셀러 시집을 생산해 낸 것도 1980년대였다. 이들 시집은 물론 문학적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미진한 면이 없지 않지만 시를 대중들의 인기 있는 독서목록에 올려놓은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2010년대에 이르러 시의 위상은 어떠한가? 한국은 물론 동서양의 문화 선진국들에서도 시는 과거에 비해 그 문학적, 문화적 위상이 많이 위축된 듯하다. 외국 문학 전공자들에 의하면, 유럽이나 미주에서 당대에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집이 출판되는 사례는 아주 드물다고 한다. 한국의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도 시집은 장르의 균형을 위한 차원에서 출판되는 경우가 많다. 저 1980년대 이전, 시가 시대정신을 선도해 나가면서 그 위의를 자랑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말았다. 시의 생산자인 시인은 더 이상 시대의 예언자도, 사상의 지도자도, 이념의 선구자도 아니다. 시인이 차지했던 시대의 선도자 역할은 영화감독이나 영화배우, 혹은 스포츠 스타 쪽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각종 집회나 저널에서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되어 버렸다. 문화 생태계의 차원에서도 시는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영상 문화의 폭발적인 인기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 시의 위의는 분명히 낮은 곳으로 임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가 장르적 특성으로 볼 때 우리 시대와 어울리지 못할 무슨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는 분명히 이 시대에 존재하는 다른 예술 장르가 갖추고 있지 못한 장점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시는 함축적, 서정적 언어를 매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시는 소리나 색채, 물체와 같은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라고 하는 관념적 기호체계를 매개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사유와 감각을 서정적으로 밀도 높게 드러내는 데 가장 유리하다. 특히 시의 언어는 인간의 깊은 사유와 절실한 느낌을 가장 구체적, 서정적, 경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특장점이 있다. 둘째, 시는 물질적 기반이나 기계적인 장치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창작하거나 감상할 수 있다.시는 아주 짧은 시간만 있어도 어느 장소에서나 책이나 모니터를 통해서 읽거나 쓸 수가 있는 장르이다. 시는 다른 예술 장르나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거의 없기에 누구나 바쁘게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시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할 수 있고, 다른 예술 장르와의 혼성성이나 상보성이 아주 강하다. 시는 육필 원고에서부터 종이책, 이북, 휴대폰, 모니터 등 모든 매체를 통해 손쉽게 유통될 수 있으며, 소설이나 영화, 연극, 드라마, 게임 등 어떤 장르와도 상호텍스트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시가 소외되고 있는 것은 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문제이다. 거칠게 표현하면 이 시대가 진지하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탓에 시가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역설적 존재이다. 사실 시는 어느 시대이든, 특히 근대 이후에 시는 속악한 문명 현실과 조화를 이루면서 존재한 적이 없었다. 시는 차라리 그러한 현실에 태클을 걸고 불화를 깊게 해야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로 생각해 왔다. 물질문명이 정신문화를 압도하는 시대에 시가 물질문명을 위한 찬가를 부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시는 오히려 물질문명에서의 소외를 무기로 삼아 간결한 정신과 맑은 영혼의 지렛대 역할을 해 왔다. 혼탁한 세상일수록 촛불과 소금의 역할이 증대되는 것처럼, 인간 영혼의 순수 형식인 시는 세상이 속악해질수록 그 존재 의의를 역설적으로 부여받는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김종삼의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전문)

 

이 시의 “시인”은 현실에서는 “엄청난 고생”을 하는 사람들과 동격이다. 영혼이 맑은 시인은 속악한 현실과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냥저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불순과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도 시인은 끝까지 태클을 건다. “시인”은 가변적인 시대성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시대성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현실에서 “엄청난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대신 “시인”은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과 동격이다. 이처럼 “시인”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녀야 할 심성과 가치를 지닌 인간다운 인간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당연히 그는 세상의 “알파”이자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일 수밖에 없다.

 

하여 “시인”은 속악한 시대에 매몰되지 않은 채 순수와 진실을 지켜나가는 존재이다. 만일에 시대적합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그러한 시대에 무리 없이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시인”은 그러한 시대적합성에서 멀어지는 것이 오히려 시적 진실을 지켜나가는 일이 된다. 진정한 “시인”은 비속한 시대와의 불화를 꿋꿋이 지켜나가면서 스스로 고난에 빠지는 존재이다. 그의 고난은 예수님의 그것처럼, 부처님의 그것처럼 세상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한 희생정신의 발로이다. 그의 고난은 속악한 현실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자신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자본도 권력도 되지 못하는 시를 위해 밤을 지새우는 시인의 눈빛은 어두운 방안의 촛불처럼, 캄캄한 하늘의 별빛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시인은 자본도 권력도 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한다. 시인은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발견을 통해 자연과 세상을 재창조하고, 고발을 통해 속악한 세상을 질정한다. 그는 다른 예술가들이 갖지 못한 위대한 언어,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세상의 “알파”이고 오메가이다. 따라서 그는 시대적합성을 넘어 인간적합성, 영혼적합성을 지닌 위대한 존재이다.

 

3.

 

시는 왜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가?

 

시가 물질적 상품 商品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시는 문화상품의 목록에서 그다지 비중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실제로 요즈음 시중 서점에 나가보면 시집의 진열대가 예전에 비해 뒷전으로 많이 밀려나 있다. 인터넷 서점에서도 구매지수를 살펴보면 시집을 상품으로 구매하는 비율은 아주 낮은 편이다. 시집 한 권의정가가 대개 7-8 천원에 불과한데, 이런저런 할인 혜택을 받으면 그 가격에서 1-20%가 저렴해진다. 시인이 한 권의 시집을 발간하는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너무도 값싼 편이다. 요즈음 영화 한 편을 보는데도 시집 한 권 가격과 비슷하고, 냉면 한 그릇의 가격도 시집 한 권보다 결코 저렴하지 않다. 시는 영화의 대중성이나 음식의 일상성과는 다른 차원의 밀도 높은 예술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문화 시장에서 유통되는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은 셈이다.

 

물론 시장에서 물품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수요가 많지 않은 상태에서 공급이 과잉이니 가격이 높을 리 없다. 매년 발간되는 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통계연감에 의하면 한 해에 출간되는 시집이 보통 1,200여 권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평균적으로 한 달에 100여 권씩의 시집이 발간되는 셈인데, 이 정도면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양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많은 시집들을 소비하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그나마 시집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시인들이나 비평가들, 대학원생들, 혹은 학습과제를 하기 위한 학생들에 국한되고 있는 형편이다. 문학과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의 시집 구매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집 출판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법 유명한 시인도 괜찮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려면 한두 해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다반사이고, 그나마 기다리지 않으려면 군소 출판사에서 자비 출판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물며 보통의 시인들의 시집 출판 환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열악하다. 그 이유는 췌언의 여지없이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가 사라진 문화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도르노가 말했던 ‘문화 산업’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문화 산업은 문화 본연의 고상한 가치를 자본의 논리에 복속시킴으로써 문화를 상업주의의 틀 속에 가둔다. 문화 산업의 체제 하에서 진정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진지한 예술은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술적 완성도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문화 상품의 구매자인 일반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상품으로서의 재미와 오락성이다. 소수의 전위적 소비자가 고급의 소비자는 문화 산업에서 전혀 환영을 받지 못한다. 대중추수적인 문화가 사람들의 시간과 관심을 잡아둠으로써 진정한 예술의 위축이 가속화된다. 사람들은 상업적으로 생산된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값싼 대중문화를 매개로 하여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인기 있는 TV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되기 때문에 자신의 문화적 취향과 관계없이 그 드라마를 시청한다. 사람들은 문화의 주체가 아니라 문화 산업의 상업적 메커니즘에 끌려 다니는 기계적 소비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 산업은 사람들을 자발적인 억압에 빠져들게 하는 독재자의 생리를 닮았다. 문화 산업은 새로울 것도 치열할 것도 없는 뻔한 내용의 상업적 영화나 드라마, 대중가요에 자신의 진정한 문화적 욕구를 던져버리게 유인한다. 그러나 많이소비된다고 반드시 좋은 작품은 아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말한 문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진술은 오늘의 우리 문화와 관련하여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들은 “영화나 라디오는 더 이상 예술인 척 할 필요가 없다. 대중매체가 단순히 ‘장사business'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하며, 더 나아가 그 사실은 그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허접한 쓰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문화가 장사의 수준으로 전락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적 성찰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성찰이 없다는 것은 진실하지 않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화 산업의 메커니즘은 상업성을 지향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그 소비자들은 재빠르게 지나가는 장면들을 순발력 있게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데만 익숙하다. 수동적이거나 피동적인 문화의 수용에 머물러 자아의 발견이나 세계의 창조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문화가 장사꾼들의 자본에 예속될 때 속화와 악화의 길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화 산업이 지배하는 엇나간 문화의 세계를 정상적인 문화의 세계로 돌려놓는 데에 시는 가장 효과적인 예술 장르이다. 시가 문화 산업에 가장 어울리지 못하는 예술 장르라는 것은 오히려 시의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시는 문화 산업의 측면에서 장사를 하기에 가장 열악한 조건을 갖고 있는 예술 장르이지만, 시에는 분명 시장 경제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매력이 존재한다. 시는 물질적,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상품 商品이 아니라 인간의 정서와 영혼을 고양하는 정신적 차원의 상품 上品으로서 가치가 있다.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 전문)

 

이 시는 “시 한 편에 삼만 원”하던 시절, 지금부터 십 수 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다. 시인은 “시 한 편”의 가격이 “너무 박하다”고 생각을 하다가 그 가격이면 “쌀이 두 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을 달리 먹는다. 시는 무엇보다도 “마음이 따뜻한 밥”이되는 순간인데, 이 밥의 가격은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시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한 밥”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또한 “시집 한 권”의 가격이 “삼천 원”에 불과한 것은 “든 공에 비해 헐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국밥 한 그릇”의 가격이고, 자신의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마음을 달리 먹는다. 이 순간에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한 성찰을 한다. 자신의 시가 “사람들 가슴”을 감동시키기에는 “아직 멀기만 하”다는 것이다. 이 도저한 성찰의 마음은 성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진정한 시인은 사실 성자와 비슷한 존재이다. 시인은 현실에서는 스스로 고난에 빠짐으로써 높은 영혼의 세계에 이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에는 그러한 존재감이 강조된다. 시인은 시집 한 권의 인세로 받는 “삼백 원”이라는 적은 금액도 “굵은 소금 한 됫박”의 가격이라면서 “긍정적인”, 너무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소금”의 가치는 물론 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차원의 것이다.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라는 시구에 드러나듯이, 시인의 “마음”은 “푸른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처럼 깨끗한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황금만능주의, 물신주의, 천민자본주의에 찌든 현대인의 부패한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소금”인 셈이다. 시가, 시집이 이처럼, “소금” 역할을 하면서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고양해 준다면 그것이 시장바닥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마음 상할 이유 하나도 없다. 시는 분명 정신과 정서의 높은 품격(上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만금을 가지고도 구매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4.

 

시는 왜 대중과의 소통에 소극적인가?

 

시의 소통 맥락은 시인과 텍스트와 독자로 구성된다. 시인은 텍스트의 생산자로서 표현의 주체이고, 텍스트는 시인에 의해 생산된 예술작품이고, 독자는 텍스트를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존재이다. 이들 가운데 저자의 권위가 강조되는 모더니즘 이전의 시대에는 시인이나 텍스트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시인은 절대적이고 전능한 존재이고, 텍스트는 그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는 불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후 시인과 텍스트의 절대적 권위는 사라졌다. 시의 소통 맥락에서 오히려 독자의 위상이 강화되고 있다. 시인은 독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시인과 텍스트는 시의 소통과정에서 고정불변의 상수에서 변수로 바뀐 것이다. 시인은이제 독자들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시의 독자는 전문 독자와 일반 독자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전문 독자는 시인이나 시 평론가와 같이 시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일반 독자는 비전문가로서 학생이나 일반 대중을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 전문 독자는 과거에 비해 상당한 수준에서 진화를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숫자나 각종 문예지의 발간 현황을 살펴보면 상당한 정도의 양적인 팽창을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는 다른 나라에서 이미 낡은 유습이 되어버린 등단제도가 남아 있어서 한 해에도 수백 명의 시인들이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종합문예지를 포함한 시 전문지만 해도 수백 종에 이르러 한 해수만 편의 시가 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인의 등단과 작품의 생산에 관한 한 오늘날 한국은 가히 시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시의 수준도 상당한 정도까지 진화하여 상향평준화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일반 독자이다. 전문 독자들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시를 멀리하고 있다. 시중의 서점에서 시집의 판매지수는 다른 종류의 도서와 비교하면 아주 낮은 편이다. 시가대중의 외면을 받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시 장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특성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독자들의 취향의 변화이다. 사실 시는 원래부터 그 사회의 지배계층들이 향유하던 고급의 지식이자 예술 장르였다. 일부 민요의 경우를 제외하면 시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문식성literacy 을 갖추지 못한 일반 서민들은 시의 창작과 향유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문맹률이 현격이 줄어든 근대 이후에도 시는 어느 정도의 지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던 장르였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소설에 비해 인기가 적었다. 그리고 시장르 자체의 성격도 누구나 쉽게 향유하기에는 한계를 지닌다. 시는 무엇보다도 고도의 전위성, 함축성, 음악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시만이 지닌 이러한 문학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독자들의 취향 변화는 너무 감각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문화적 흐름과 관계 깊다. 정서적으로 깊고 절실하고 진정한 것보다는 얄팍하고 가볍고 유희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취향이 문제인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문화라는 것은 대중적 취향을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취향을 선도하고 고양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볼 때, 시가 독자들의 저급한 취향에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는 고도의 압축성과 첨단의 수사법을 동원해야하는 것이기에 시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 시의 새로움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은 시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서 대중에 영합하는 시를 쓸 수는 없을 터, 유행가 가사와같이 뻔한, 너무도 뻔한 서정의대중시가 누구에게나 쉽게 읽힌다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시적 소통을 이루었다고 할 수는 없다. 대중시는 소통이라기보다는 유통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터, 이 때 소통이 깊은 정서의 공감을 추구한다면 유통은 부박한 정서에의 동감에 그치는 것이다. 노래를 재밌게 부르기 위해서는 연습을 해야 하듯이, 시라는 고급의 예술을 향유하기위해서는 그 기초적인 감상법 정도는 익혀야 한다.

시에 대한 독자의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독자들은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하는 것인데, 오늘날 시의 일반 독자인 대중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 대중은 과거 서민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서민은 전근대적 사회에서의 가난하고 무지한 아웃사이더출신이라면, 대중은 근대화 이후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가난하지도 않고 무지하지도 않은 지배적 계층 개념이다. 대중 사회에서 대중은 어느 정도의 지적인 능력과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주류 계층인 것이다. 따라서 대중은 다소 고급스런 정서에 의지하는 시를 감상할 만한 충분한 여력을 가진 존재이다. 문제는 디지털 게임이나 영상 매체에 투자하는 시간을 시 쪽으로 배분을 해야 한다. 대중 독자들은 이제 감각적인 대중문화에만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문학 중의 문학인 시에도 관심을 가져야할 터이다. 시는 끝없이 진화를 하는데 독자들이 제자리를 맴돌다 보면 시의미래는 희망적이지 못하다. 하여 독자를 향한 어느 시인의 질책인 과격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내 詩에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 들에게→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ㅇ ㅇ ,차렷, 헤쳐모엿 !

 

이 좆만한 놈들이......

헤쳐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박남철의 「독자놈들 길들이기」 전문)

 

이시는 축자적으로 읽다보면 많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정직성의 미학이나 해체주의 시학의 차원에서 읽어보면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비속어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속어는이시에서처럼 때로 시인의내면을 거짓없이 정직하게비춘다는 점에서미학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해체주의와 관련된 이시의 특이점은 우선 시 속에 “독자”를 수용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메타시에서 시인과 시의 경계가 해체된 것처럼 시와“독자”의 경계가 해체된 것이다. 이는 이른바 해체시가 갖는 일반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이 시의 특이점은 또한 “독자”를 비하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한국시사에서 이처럼 “독자”를 노골적으로 비하시킨 작품은 전례가 없다. 이시 이전에 “독자”는 시인의 입장에서 무조건 존중해야 하는 존재였다. 자신의시를 읽어줄 독자를 비난하거나 비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의 특성이다. 이시에 비난의 대상은 “내 시에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이다. 일반적인 모든 “독자”가 아니라 “구시대의 독자”즉 새로운 시대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한“독자”인 것이다. 이 “독자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물론 시의 진화를 방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대는 급격히 변해 가는데 수십 년 전 혹은 수백 년 전의 시적 관습에 얽매여져있는 “독자들”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시가 조금만 새로워져도 난해하다고 불평을 하면서 시를 외면할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말초적인 감각을 만족시켜주는 문화 산업 쪽으로 눈길을 돌릴 사람들이다. 그래서 항시 고독하게 전위의 시를 추구하는 시인의 입장에서 그러한 “독자들”은 노골적인 비하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셈이다. 이 시의 “독자” 비하는 시의 소통과 관련하여 독자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5

 

시는 왜 너무 정치적이거나 비정치적인가?

 

한국 현대시는 그동안 너무 정치적이었거나 너무 정치에 무관심했다. 이른바 순수시 계열의 시인들은 현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시의근간이라 여겼고, 참여시 계열의 시인들은 현실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응전을 시의 기본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 두 계열의 시인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타적인 길을 걸어왔다. 일제치하의 카프시나 광복 이후 북한의 시, 광복 이후 남한의 저항시나 민중시 등은 정치적 행위를 고무하고 추동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반면에 일제치하의 순수서정시나 모더니즘시, 생명시, 자연시와 광복 이후 남한의 순수서정시 등은 현실 정치에 대한 초월이나 무관심의 태도를 견지해 왔다. 시의예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시가 정치적 현실에서 독립된 순수한 예술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에 반해 시의 정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시가 정치적 현실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회의 변혁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두 극단적인 주장, 너무도 정치적이거나 너무도 비정치적인 시는 시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배타적인 입장으로 인해 한국의 현대시단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왔다. 그 대립의 층위는 남북한뿐만 아니라 남남 사이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갈등을 유발해 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술성과 정치성이 반드시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정치적이라 할 수 있을 터, 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소통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다. 시는 운율적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의 일종이지만, 그것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정치 행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시는 현실 정치를그대로 추수하거나 그것에 평면적으로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시의 정치는 가령 정치가들이 현실 권력의 장악을 위해 정파적 이해관계에 속박되어 행동하는 현실의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의 정치는 시가 현실 정치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에 미학적 언어가 포함하고 있는 정치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시의 정치는 현실정치가 지향하는 피상적인 행동의 변화와는 다르게, 정신과 감정과 감각을 포함하는 내적의식의 고양을 통한 근본적인 행동의 변화를 추구한다. 정치가의 연설을 현실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즉각적이고 집단적인 호응을 유도하지만, 그것은 대개 표피적이고 일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시를 통해 이루어지는 의식과 행동의 변화는 깊은 정서의 공감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보다 근본적이고 지속적이다. 이것이 바로 시의 미학이 높은 정치 의식으로 변환될 수 있는 이유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말처럼 특정한 시대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미학 속에는 이미 정치가 내재해 있다. 그가 주장하는 ‘문학의 정치’는 물론 문학을 현실 정치와 기계적으로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분할(감성은 인식에 가깝다. ‘대상. 인식. 판단. 행동’의 과정에서 미적 인식이 대상에대한 판단과 행동의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을 통해 현실을 고양하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 의하면 시는 속악한 현실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미적 혁명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긴장 관계를 해소 시킬 수 있다. 따라서 시는 가장 고급한 정치 행위, 가장 정서적인 정치 행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시는 정치를 부정하지 않되 현실 정치와는 ‘다른 정치’를 추구한다. 시의 정치는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점, 언어 가운데서도 가장 밀도 높은 미학적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정치와는 다르다. 시의 정치는 보다 간접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데, 이를 위해 시가 지니고 있는 수사적 속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시의 미학 혹은 시학은 기본적으로 정치를 포함한다.

 

자유가 시인더러 하는 말 좀 들어보게

시인이 자유더러 하는 말 좀 들어보게

서로 먼저 말하겠다고 싸우는 꼴 좀 바라보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 한번 들어보게

 

자유가 시인더러

시인이 자유더러

멱살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네

우리 같은 촌놈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네

자유가 시인더러

시인이 자유더러

따귀를 올려치면서 탁탁탁 치면서

하는 소리 들어보게나

아아, 저게 상징이구나 은유로구나

상상력이구나

아픔만 남는 시법 詩法이구나

오늘 하루도 평탄치 못하겠구만

일찍 일어나 세수부터 정갈하게 하고

구두끈도 단단히 동여매야하겠구만( 조태일의 「자유가 시인더러」 전문)

 

이 시에서 “시인”과 “자유”는 가장 밀접한 동지적 관계에 놓인다. 그들은 “먼저 말하겠다고 싸우는” 관계이거나 “따귀를 올려치면서” 논쟁을 하는 관계이다. 아주 가깝고도 치열한 관계이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면서 하는 소리는 시정잡배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상징”이고 “은유”이고 “상상력”의 차원에서 논쟁을 하는 것이다. 이를 축약하면 “시법”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이것이 바로 “시인”이 정치 행위로서의 “자유”를 지향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시(문학)는 결국 미학을 통한 정치를 수행한다는 랑시에르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시의 미학의 핵심은 “상징”이나 “은유”를 통한 “상상력”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일 터, 시인이 “자유”를 추구하는 방식은 그러한 미학적 행위와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의 정치, 혹은 미학의 정치는 “아픔만 낳는 시법”이라는 진술은 흥미롭다. 시인은 이 “아픔” 으로 “오늘 하루도 평탄치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 “아픔”이 생산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이 시가 창작된 7,80년대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아픔” 은 “자유”를 상실한 시대의 “아픔”이고, 이“아픔”으로 인해 시인은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깊은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아픔”의 심도는 정치 구호로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마음을 정갈하게 하기 위해 “세수부터 정갈하게 하고/ 구두끈도 단단히 동여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목적을 향한 정치적 행동을 위해 시적 혁명을 추구하고, 시적 혁명이라는 목적을 위해 정치적 행동을 도모하는 것이다. 다시 랑시에르의 관점에 기대면, 이는 시(미학)의 정치는 현실의 정치와 직접적으로 대응하지는 않지만, 그와 무관하거나 그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미학적 감각의 새로움을 통한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참여는 미학의 정치를 실현하는 시 창작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한 문학적인 방식의 현실참여 활동은 그 자체로 미학의 정치를 실현할 가능성을 지닌다. 이것이 바로 시와 정치가 만나는 방식이다.

 

6.

에필로그

 

지금까지 우리는 시의 본질에 관한 우문들에 대한 현답을 살펴보았다. 세상에는 시에 관한 우문들, 혹은 진지한 예술에 대한 우문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시의 시대적합성, 상품성, 대중성, 정치성 등과 관련된 우문들의 공통점은, 첨단 과학과 디지털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시대에 시가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문들이 말하는 쓸모라는 것은 실용적이거나 생활 차원의 용도를 의미하는 것일 터, 그렇다면 시는 정말로 쓸모가 없는 것이 맞다. 무한 경쟁의 시장경제원리가 지배하는 후기 산업시대에 시는 돈이 되지 못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직도 시를 돈을 주고 구매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회고주의자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시집 한 권을 사 보느니 영화 한 편을 편하고 재밌게 즐기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시집을 들고 다니거나 책장을 넘길 일도 없이 모니터나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감각적 영상을 그대로 좇아가면 되는 것이다. 시를 읽을 때처럼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상업적 대중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한 구절 한 구절을 느리게, 찬찬히 음미하면서 그 깊은 사유와 절실한 감각을 공유해야 하는 시를 좋아할 리 없다.

그러나 시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쓸모가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말한 대로 “ 문학은 배고픈 거지 하나 구하지 못한다. 문학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가치가 생긴다”. 사실 현대 사회는 쓸모를 지나치게 추구하기 때문에 아름답지도 진실하지도 못하다. 자본이라는 쓸모, 권력이라는 쓸모, 혹은 석유와 같은 쓸모, 곡물과 같은 쓸모 때문에 전쟁도 살인도 불사한다. 하여그런 쓸모에서 자유로운 시는 오히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 쓸모가 크다. 시는 속악한 현실에서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가볍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속세의 셈법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계산해서도 안 되는 위대한 가치를 지닌 존재이다. 밀란 쿤데라가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그런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시인이 된다는 것」 부분) 라고 노래했듯이.

또한 아래의 시에서처럼 시(인)은 현실적으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높은” 영혼을 간직한 고귀한 존재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이 더 빛나는 것처럼 세상이 타락할수록 시(인)은 존재는 더욱 가치 있다. 시가 근본적으로 역설이듯이, 우리 시대의 시인도 역설적으로, 아주 역설적으로 존재(해야)한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세상, 아름다운,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주인공은 시(인) 이다.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살아 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또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잼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이형권 약력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 한국시의 현대성과 탈식민성”, “타자들의 움 길에 서다”, “발명되는 감각들”,외 다수

문예전문지 “시작”, “애지” 편집위원

등재학술지 “한국시학 연구”, “비평문학”, “현대문학이론연구” 편집위원

2010년 편운문학상(문학비평부문)본상수상

“발명되는 감각들”등의 저서가 대한민국 학술원 및 문화관광부(문화예술위원회)우수 도서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