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버리긴 아깝고 / 박철 본문

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버리긴 아깝고 / 박철

가짜시인! 2013. 6. 7. 09:13

 

버리긴 아깝고

 

                              박 철

 

 

일면식이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을 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품에 안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가짜시인의 단상

 

'버리긴 아깝고...' 란 말은 참 인정 스럽다. 사람 냄새가 난다.

처음부터 버릴 생각은 없다, 그냥 주고 싶었던 것이다. 주고 싶단 말이 입 밖에 떨어지지 않는다.

'널 주려고 가져왔어!' 라는 말이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버리긴 아깝고...'란 말로 변해 버린다.

그렇다고 받는 사람 역시도 그의 마음을 모를리가 없다. 별것 아닌듯 받아 놓지만 금새 마음이 따듯해 질 게다.

꼭 국어사전처럼 정확한 단어를 골라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해야 하는가.

시선을 애써 비켜, '버리긴 아깝고...' 이 한마디는 열 번, 백 번의 의역이 가능한 짜릿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옆집 혼자사는 할머니에게 '먹다가 남아서 개 주기는 아깝고...' 하며 두고간 따듯한 음식이 생각난다.

처음부터 개란 놈은 먹을 팔자가 아니었고 이름만 빌려주게 된 셈이다.

 

말을, 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오늘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 온다면 여러가지로 그 뜻을 상상해 보고 싶다.

그 생각만큼 나는 행복해 질 것이다. 행복한 공상가가 될 것이다.

 

 

 

'나의 편린들 > 내가 읽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 이영광  (0) 2013.06.10
소줏병 / 공광규  (0) 2013.06.08
염소 / 송찬호  (0) 2013.06.06
숨은 그림 / 박무웅  (0) 2013.05.31
의자 위의 흰 눈 / 유홍준  (0) 2013.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