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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 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 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있었다.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내가 시라고 믿었던 것과 시인들이 시라고 믿는 것의 간격은 제법 폭이 넓었다. 나는 마치 한 시대가 저물어버린 곳에 불시착한 이방인처럼 낯선 시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를 그토록 전율케 했던 감정들은 이제 낡았다고 했고 식상하다고도 했다. 서정은 80억 사람들의 가슴속에 매 순간 처음처럼 피고 지는데 어째서 시는 그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낯선 곳으로만 가려하는 것일까. 날마다 겪어내는 고독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과 추억은 한낱 쓸모없는 감정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설마 시인이라는 오만한 부류들이 세상 모든 내면의 감정들을 이미 다 표현해 버렸다는 당돌한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수많은 의문의 문장을 쓰면서 오히려 우리의 서정은 날마다 새롭고, 결코 소모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점점 갖게 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반성, 아름다운 풍경이 가져다주는 전율 같은 것들이 왜 난해와 무의식의 문장 앞에서 작아져야 하는가 말이다.
독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낯섦과 새로움이라는 시인들만의 가치를 위해 독자들을 따돌리고 철옹성 같은 성벽을 두른 것일까 아니면 입맛에 맞지 않는 감정과 정서를 차려내는 시와 시인을 독자들이 차갑게 외면해버린 것일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정시인들과 그 감성을 꿈꾸던 이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시는 낯섦을 얻고 서정을 잃었다. 독자를 잃고 시인을 얻었다.
시는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서정시가 낭만과 설렘의 시골길이었다면 지금의 시는 신문물이 즐비한 잘 구획된 신도시의 화려한 길인지도 모른다. 서정시인이 정류장마다 서 있는 독자들을 태우고 가는 버스 기사였다면 현대시를 쓰는 시인은 정해진 목적지로만 향해 가는 택시 기사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럿이 함께 타지만 각자의 감성에서 타고 내리는 버스 승객이 서정시의 독자였다면 거침없이 하나의 목적지로 달려가는 택시를 기다리는 이들이 현대시의 독자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딱히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고 쉽게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변화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일면 인위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수만 명인 시대를 살지만 독자의 수는 가늠하기 힘들다. 추측하건대 시인이라 불리는 사람의 숫자보다 순수 독자들의 수가 오히려 적을 거라는 생각을 놓을 수 없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분신처럼 엮어낸 1쇄조차도 판매되지 않는 현실이 이를 방증해 주고 있다. 시인들은 서로 시집을 주고받는 시집 품앗이를 하고 있다. 시집을 사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다. 일각에서는 시집을 주고받는 이런 세태를 비판하며 시집은 돈 주고 사서 보자는 외침이 있지만, 순수 독자의 개입이 없는 시인들끼리의 시집 사 보기가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것과 뭐 다를까.
‘도대체 뭔 말인지도 모를 글을 읽고 싶겠어요?’
어느 독서 모임에서 왜 시집을 읽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다. 왜 시인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쓰고 있을까. 자신들만 아는 이야기를 허공에 외쳐대고 있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쿵하고 가슴에 떨어지지만 그걸 독자의 탓으로 돌리고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어느 분야에서든 앞서가는 이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들로 인해 우리는 가보지 못한 곳에 발을 딛게 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너무 멀리 가버리면 독자들은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엔 흩어지고 만다. 좋은 세상이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다. 모두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인과 그 시인이 쓴 시를 읽어주는 대부분의 독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시인은 스스로만 행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독자들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한때 흔한 풍경이었던 옆구리에 시집을 끼고 다니던 독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그 옆구리들은 지금 대부분 시인이 된 것 같다. 8,90년대 이후 대중들의 감성을 지켜주던 서정시의 맥이 끊긴 후 그 당시 서정의 절정에 있었던 ‘홀로서기’의 독자들은 더는 공급되지 않는 감성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가 시인이 되는 쪽을 택했다. 흐려진 서정 탓에 독자들은 하나둘 시를 떠나거나 시인의 길로 들어서고 나니 독자의 공간은 텅 비게 된 것이겠다. 시는 점점 대중성을 잃고 전문화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많은 시인들이 서정성 짙은 시를 쓰고 있다. 그런데 왜 서정시는 부활하지 못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그 무렵 우리 시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변화라는 것이 전통 서정시의 감성적 정체의 극복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일면 자연스러운 것으로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움을 모색하는 엘리트 집단에 의한 위에서부터의 변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등단이라는 기이한 제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뽑는 자’의 위상은 어쩌면 권력이다. ‘뽑는 자’는 방향을 설정하고 ‘뽑히는 자’는 경향을 살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거기에다 뽑는 자의 이름들은 오래 또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된다. 단언컨대 신춘문예나 문예지, 그리고 수백 군데의 문학상 심사위원들이 한 3년 정도만 매년 우수한 서정시를 연속해서 뽑는다면 대한민국 문학은 새로운 서정의 시대가 올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베스트셀러나 서점 매대의 명당자리는 유명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시집들로 즐비하고 가만히 순서를 더듬다 보면 낯선 시인의 이름은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몇몇 이름들은 주기적으로 출현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시인이 아닌 이들에게 내밀었을 때 과연 아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필부필부가 읽기에는 다소 난해한 시들이 우리 문학을 견인하고 있는 현상을 과연 자연스럽다 할 수 있을까. 물론 문학과 예술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정체하지 않고 발전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시가 문화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저 홀로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다. 시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문학은 대중의 것이다.
소수의 권력이나 패거리가 독식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의 공감과 이해 속에서 좋은 작품으로 평가를 받아야지 몇몇 시인들끼리, 혹은 교수나 평론가들 사이에서만 상찬 받는 문학은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현시점에서 과연 문화 대중들이 생각하는 좋은 시와 기성 시인들이 생각하는 좋은 시가 일치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런 불합리가 연속되는 한 독자들은 시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 시보다 더 좋은 게 널리고 널린 세상이다.
시가 다시 독자들에게 돌아가면 좋겠다.
시는 너무 멀리 있고 독자들은 저만치에서 등을 돌린 채 외면하고 있다. 전기도 없는 마을에 냉장고며 세탁기가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감성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난해하고 실험적이고 새롭기만 한 시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문학성 짙고 창의적인 시도 물론 필요하지만 독자가 뭔 말인지 알아듣고 공감할 수 있는 서정시가 독자들의 가방 속에, 책상 위에 다시 놓이면 좋겠다. 일상에 지치고, 사람들 사이에서 시달리는 각박한 세상 속 결핍의 존재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고 연대가 되어 주는 시. 독자가 마음을 기대고 쉬어갈 수 있는 시. 고단한 삶을 살아내느라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감성을 다시 촉촉하게 적셔줄 그런 시가 독자들 속으로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시가 서정의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감성의 두레박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아름다운 서정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우리들 가슴속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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