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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린들/생각들

소환

가짜시인! 2020. 2. 17. 11:45

 

 

 

카세트플레이어를 하나 장만했다.

저기 카세트 테이프들은 아마도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레코드가게에서 용돈을 아껴

정품을 샀거나 시내 길거리 리어카에서 복제품을 샀거나.

아랫단,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들은 라디오를 들으며 녹음했던 것들

그리고 어느 여학생이 수줍게 내게 건네던(자기도 열심히 녹음을 했겠지 ㅎ) 것들이다.

군대를 갔다오니 녹음기는 흔적없이 사라졌고

20대 말에 친구들이 생일선물로 구해주었던 마이마이의 고장을 끝으로 저 테이프들은 묵언수행 중이었다.

수많은 이사를 거치는 동안 끝끝내 살아남아 내 방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저것들.

 

시집을 내고 시와 잠시 거리를 둔다.

시를 만나고 나는 신세계를 알았다는 듯 흥분했는데

사실 알고보니 시가 없는 세상이 신세계다.

너무 시에 갇혀 살았다.

시라는 괴물이 나의 팔과 다리와 정신을 묶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를 생각하지 않고도 산책을 할 수 있고

시를 생각하지 않고도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시를 생각하지 않고도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시 때문에 외출을 줄이고

시 때문에 가족과의 시간을 줄이고

시 때문에 항상 쫓겼던 시간들이 어리석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시를 놓고 나니 하는 일마다 설렌다.

우선 음악을 들을테야.

음표들을 따라가는 여행도 여행이려니와

그 시절 노래를 들으면 기적처럼 그 노래가 소환해주는 기억들이 함께 따라와서

나이를 잊는 즐거움에 들기도 한다.

그 친구들은 다들 무얼하고 있을까

그 여학생들을 보며 뛰었던 심장이 지금 이 나이에도 다시 뛰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