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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幻像)의 현존과 감성의 동질성 _ 권상진 -담론적인 해법과 개아(個我)의 초극(超克) / 엄창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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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幻像)의 현존과 감성의 동질성 _ 권상진 -담론적인 해법과 개아(個我)의 초극(超克) / 엄창섭

가짜시인! 2018. 5. 2. 15:16

환상(幻像)의 현존과 감성의 동질성 
      권상진 -담론적인 해법과 개아(個我)의 초극(超克) 
                                         

                                    엄창섭(사)k-정나눔 이사장, 본지 주간)

        

 1. 시의 통로 찾기와 영혼의 공명(共鳴)

  모름지기 한편의 시를 쓰는 작위(作爲)는 ‘창조적 영혼에 의한 개인적인 정신활동’이기에 ‘한 사람의 시인이 시대적 현재성에 슬기롭게 대응하며, 어떻게 생존하는가?’의 양상은 그의 창작물을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고 조응함에 따라 그 명료성은 확증된다. 까닭에 ‘작은 신의 대언자(代言者)’로 일컬어지는 시인이 역사적인 실체로서 비록 위대한 종교가는 아닐지라도, 「환상의 현존과 감성의 동질성-담론적인 해법과 개아의 초극」이라는 검증의 과정에서 특정한 시인이 삶의 일상에서 수용하고 체득한 자잘한 기억 흔적을 서정성으로 투시(透視)한 점은 더없이 이채롭고 유의미하다. 한편『모던포엠 포커스』vol. 176호에서 조명 받는 권상진 시인은, 경북 경주출생으로 「제21회 전태일문학상」(시부문)의 수상자이다. 일단 논의에 앞서 문화충돌의 21세기 공동체인식(inter-being)의 바탕 위에서 일관되게 변주와 조화를 반증하며 이 땅의 어느 시인보다도 세상에 낳아 놓은 그 자신의 빛나는 생명체에 해당하는 정제(整齊)된 시편들은 생명의 호흡과도 같이 끊임없는 따뜻한 감성적 발현(發現)으로 맑은 영혼의 울림이다. 
  여기서 충직한 독자의 관심사인 ‘시의 통로 찾기’는 화자 자신이 <탈출기>, <오답노트>, <탑골공원>을 포함한 시편 중의 ‘다시 올게요 나는 영원한 이별을 알아듣는’ 그 처연(悽然)한 삶의 현재성으로 “악수는 시간의 물살에서 서로를 건지는 유일한 방법//치매 병동 입원실 침대 맡에서/처음 뵙겠습니다 손 내미시는 아버지//죽음의 미행을 직감한 듯 떨리는 손을/아들이라고 합니다 초면의 조력자가 덥석 손을 잡는다(탈출기)”의 보기나 또는 “아는 문제를 틀리고 돌아온 저녁,/아버지는 술 냄새가 옅어질 때까지 잠을 미루다/나를 무릎 앞에 앉히고서/나처럼은 살지 말어라는 말을/큰 방까지 들리도록 말하곤 했다(오답노트)”를 통해 모처럼 연상되는 육친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또렷한 기억의 잔상(殘像)으로 새로운 호명(呼名)에 해당한다. 
  어디까지나 그 자신이 자연의 순리를 역행(逆行)하지 아니하고 소외된 인간관계성을 회복하며  ‘느리게 사는 법’에 순응(順應)하는 차별화된 시론의 틀에서 짜 맞춘 응축된 화소(話素)는, 단순한 게으름이나 빈정거림이 아닌 삶의 순간을 절박하게 인식하여 사유(思惟)의 속도를 늦추는 시적 작위(作爲)이다. 까닭에 대다수 현대인들의 정신적 결핍과 한 순간의 격정, 그리고 증오는 바로 자기파멸의 고독이 아닌 ‘홀로 있기’에서 기인(起因)된 내면적인 결과이기에, 맑은 영혼과 더없이 담백한 시격은 본질적으로 존엄한 생명외경의 각별한 감응과 의미망의 확장, 그리고 알맞은 토양을 조성하는 시사적(詩史的) 존재성은 결코 소홀하게 지나칠 수 없다. 
  이와 같이 암울한 우리의 사회현상에서 맑은 영혼의 공명으로 시적 자유의 비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며 ‘과거에서 현재, 또 맞물려 있는 가까운 미래의 시간대’에서 미적 주권이 확립된 순수서정성의 틀 짜기야말로 ‘모두 기다림이라는 듯 잠시 집을 다니러 가고 없는 공원의 황혼녘’에 “깜박 놓고 간 지팡이 하나가/밤새 또 그들을 기다리는(탑골공원)” 그 초조와 불안감을 또다시 감지한 화자(persona)의 심적 안도감과 감사의 미학은 그 자신이 절감한 뒤의 감동의 회복이기에 기원(祈願) 뒤의 은총(恩寵)이다.
  각론하고 또 하나 유념할 바는 권상진 시인의 시적 특이성은, 원형질(原形質) 속에 움직이고 있는 힘, 푸른 식물성언어에 의해 생명감을 추구하는 역동성으로 유추(類推)될뿐더러 한층 개아적(個我的)인 작위는 즉물적 매개물에 의해 놀랍게 전위(轉位)된 그의 시적 변모양상으로 동양적 직관의 세계로 변주(變奏)되는 존재의 빛남은 보다 이채롭다. 바로 이 점은 내적 충만의 층위에서 비롯된 맑은 영혼의 파상(破狀), 즉 모순의 해법으로 지극히 교훈적이다. 어디까지나 정직함과 성실성으로 종종 감동을 안겨주는 시적 자아는 그만의 독자적인 저력이며 때로는 시적 분위기를 긴장시키는 역동성을 지니기에, 자못 생생한 일탈의 정신을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로 빚어놓은 생명적인 시작 행위는 존재의 형상으로 빛난다. 까닭에 그의 따뜻한 감성에서 배어나온 연민(憐憫)과 천상의 층계를 오르는 고독한 순례자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창조적 결과물은, 매개적 정신능력의 범주에 의한 시적 상상력으로 충격적 감동에 잇닿아 있다. 
  특히 10편의 시에 있어 논의의 키워드로 시상(詩想)의 전개나 시어(詩語)의 관계층위는 마치 ‘용질이 통과하지 못하는 막을 통해 자발적으로 확산하는 삼투압(渗透壓) 현상’처럼 ①일상의 서정성(꽃잎에 어깨를 맞았다. 허름한 잠, 농담) ②즉물적 질료나 대상(탑골공원, 새, 외발, 저, 골목) ③자아의 인식과 내면공간(탈출기, 오답노트, 창녀와 어느 가장과 나)로 적절히 배치되고 직조(織造)되어 시의식의 공감대는 특이하게도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 점에 기인하여 삶의 매순간을 불확실한 현상에서도 세심하게 포착하고, 지상에 갈앉은 낮은 음조와 일상의 서정성으로 개아(個我)의 내면인식을 적확하게 생명기표로 발화시킨 그만의 시적 의미는 자유로운 바람의 통로를 탐색하는 정치(精緻)한 그물망에 의해 존재감은 눈부시다.
  
          

2. 생명의 기표와 시적 응시(凝視)

  특히 순수서정성의 결핍으로 이타주의가 무너져 내린 암울한 시간대에서 예기치 못한 불확실한 현상을 온몸으로 버티어내기란 다소 버거울 것이나 「생명의 기표와 시적 응시」의 맥락에서, 오직 밝은 미래는 위대한 비전과 창조적 영혼을 지닌 정신작업의 소유자에 의해 그 의미와 가치는 다시금 확장될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예언자로서 시대적 소임을 담당해야 할 시인은 생명의 기표를 지속적으로 조탁(彫琢)하여 실상이 흐려 있는 영혼의 통로를 확인하고 삶의 고뇌 또한 감내할 바다. 혹여 개성이 문제라는 애매한 변명에 치우쳐 통섭(通涉)의 이법을 거역하지 말아야 할뿐더러 최소한 언어에 대한 배려와 식별력, 그리고 내면공간에 관한 탐색은 지속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 나름으로 개아적(個我的)인 길 찾기로 이 땅의 어느 시인보다 일관성을 지니고 몰두하는 권상진 시인의 시적 행위는 감동의 회복을 관통할뿐더러 종종 신비한 은총으로 해명된다. 이처럼 분망한 삶의 일상에서 정신적 부산물로 형상화한 낯익은 시편들은 보다 엄격하게 유의미한 것으로 ‘적확, 격렬, 구체적, 복합적이다.’ 한편 리듬과 형태를 갖추어 맑은 영혼의 울림을 조율하려고 저토록 본질적 고독 앞에서도 “울음 없는 슬픔과 울어도 눈물이 없는 슬픔 눈물에 그늘이 없는 슬픔/질량이 다른 절망들은 마침내 가장 아래로 고여/밑바닥 인생의 발목은/늘 찰랑이는 슬픔에 잠긴다(창녀와 어느 가장과 나)”와 같은 ‘질량이 다른 절망’을 통한 삶의 역경은 ‘슬픔 그 넘어’ 끝내 업보(業報)로 인식되기에 그 자신이 온몸으로 부딪치며 인고(忍苦)하는 지난한 ‘몸의 시학’은 한층 다감(多感)해 눈물겨울 따름이다.

      가로수 꽃이 지고 있는 보도 불럭 위에서/꽃잎에 어깨를 맞았다/살다살다 이제 꽃 마저 나를 치는구나/없이 살다 보면 꽃에도 통증을 느끼고/가끔 그 자리에서 오기가 덧나곤 하였다//
              -<꽃잎에 어깨를 맞았다>에서  

     의사는 몸이 새처럼 가벼워질 거라 했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새 꿈만 꾼다며/아버지 헤진 옷으로 마당 안 텃밭에/듬직하게 허수아비를 세워놓았다//
               -<새-질병분류기호 M81.99*>에서   

  그렇다. 위에 인용한 ‘이제 꽃마저 나를 친다.’는 낙화하는 절망감에 <꽃잎에 어깨를 맞았다>는 까닭모를 체념에서 흘려보낸 격랑의 시간대에서 ‘비록 지는 꽃에도 통증을 절감하는 꽃잎의 현존성은 내일의 작은 생명의 씨앗에서 기인(起因)하는 것’이지만, <새-질병분류기호 M81.99*>의 시편에서 ‘어머니⤍새 꿈, 아버지⤍헤진 옷, 허수아비’의 추이(推移)는 ‘잊혀 진 회의(懷疑)와 변명, 그리고 안타까움의 시학’에 관한 논의는 끝내 충직한 독자에게 깨끗한 영혼과 갈앉은 침묵의 음성을 절감케 하는 알맞은 정신기후의 조성으로 이행될 것이다. 이 같은 정황은 ‘칙칙한 어둠의 그늘 이후’에도 그 자신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집념으로의 일탈이며, 또 다른 길 찾기에 해당한다. ‘몸이 새처럼 가벼워지는 이치’란, 삶의 어둠(無常)으로 전의식(前意識)에서 어딘가로 떠밀리는 현상으로 혼돈과 미혹을 반복하는 내면인식의 변전이다. 따라서 ‘이씨도 김씨도 세상을 떠난 그 날 이후, 견딜 만하던 아픔도 참아내기 힘든 쓸쓸함의 추이’인 까닭에 한번쯤 M81.99*가 ‘질병분류기호에서 상세불명의 골다공증임’은 조심스럽게 확인할 합리성이 수락된다. 
  또 하나 그만의 독자적 색깔, 음성, 시적 특이성은, 식별력을 지닌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시인식의 깊이에 각별한 권상진 시인의 경우, 엄격히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라고 치부하기보다 작금의 현대시가 지나치게 언희(pun)에 의해 감각적으로 유희 화하는 경향에서 이 땅의 어느 시인보다 근면한 삽질의 실체로 고도의 수사에 익숙하여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되 틈새를 허락하지 않은 그의 존재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까닭에 그 자신이 시대적 소임을 깊이 인식한 까닭에, 대상의 응시와 생명에의 변주에 해당하는 각론을 제기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시적 이미지를 절제된 정감으로 형사하는 수사적 기법이 능란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불확실한 현상에서도 지극선(至極善)에 의해 갈등과 언어의 횡포를 경계하는 남다른 아집은 공동의 지대한 관심사다.   
  그 나름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화자 자신이 생명기표로 버거운 삶을 감사로 발현(發現)하고 풀꽃 향내의 식물성언어로 긴장과 증오심을 풀어주어 공감대가 무너진 이 불신의 세태를 한순간 신뢰로 전환시키는 행위의 이행은 실로 역동적이다. 그 자신이 방황과 격정을 말끔 씻어내어 의미공간을 확인하고 정신적 생산물을 은유와 해학, 역설의 수사적 기교로의 형상화는 신선한 충격이다. 아울러 깊은 영혼의 상처로 고통 받는 소외계층에게 감동을 회복시켜주려는 그만의 고뇌는 냉혹한 시대상황에서 얼어버린 눈물도 따뜻한 정신적 기후로 변형시켜줄뿐더러 직면하는 대상의 형질을 창조적 영혼으로 변형시키는 생명외경의 엄숙성은 보다 절대적이다. 
  무엇보다 판타지 예술의 개념은 ‘구성, 주제, 설정 등 예술의 핵심 요소를 마법이나 초자연적인 것들로 구성한 환상문학의 장르’에 속한 양식이다. 따라서 다수의 작가와 화가, 음악가들이 즐겨 차용하는 예술 양식이기에 고대의 신화와 전설로부터 현대도시의 스토리텔링까지 다양한 작품과 독자층의 상호관련성은 시적 체험이나 미적 감동과도 결부되고 있음은 <허름한 잠>에서 주의 깊게 감응(感應)할 사항이다. 

     툴툴 털어 다시 걸치는 어제의 외투/주머니마다 오늘과 맞바꿀 허름들을 가득 넣어 골목을 나설 때/허름에 뒤섞인 어제의 잠들이/문 뒤에 서서 그를 배웅하고 있다//
               -<허름한 잠>에서

     학 같다/주저거리며 한 발을 들고 섰는 사람들/한소끔 왁자한 잡념들 가라앉으면/학은, 아니 학 같은 저 사람은/어느 곳으로 한 생각을 디뎌 놓을까//
     ...줄임...
     잡초들의 한 생을 다 살아 보고서야/비로소 한 가지를 세상에 디디는/나무 한그루의 길에는/뿌리가 걸어온 생각들 무성하다/언제나 한 발로 생각을 가누는 자세는/흔들릴지라도 넘어지는 일이 없다//
               -<외발>에서

  위에서 인용한 시편 <외발>은 비록 타자를 지향한 마음의 문이 닫혀 있을지라도  ‘대다수 멈춰 서 있는 인간(사람)은 학(鶴)처럼 외발’이라는 시인의 관점에서 일단, 즉물적 현상을 응시하고 유추할 바라면, 무엇보다 시적 인자(因子)와 응축미가 그의 시세계를 구축하는 통로로 작용되고 있음으로 하여 환상의 주기(feedback cycle)와 같은 이론의 실체가 잠재적 도구로 사용됨은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최소한 그 자신이 극소수의 창조적 정신작업의 종사자임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항상 몸담고 있는 공간과 시간대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지녀야 한다.’는 것은 평자의 지론이지만, 몇 년 전에 한국을 다녀간 바티칸의 프란체스코 교황은 ‘지도자란 항시 대중 속에 머물며 대중에게 길을 가르쳐 주되 넘어진 자의 손을 잡아주고, 삶의 좌표를 제시하여 줄 것을 역설하면서, 죽은 자는 함께 춤추고 기뻐할 수 없다.’라며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정신적 스승인 헤르만 헤세 또한 “단지 하늘에 떠가는 구름뿐이라고 해도 우리가 살아 존재하는 한 기뻐해야 한다.”라는 지적 또한 살아 숨 쉬는 행위가 행복하고 소중한 것임을 교시(敎示)한 점에 비춰 우리는 생명외경의 존엄성과 공동체 인식(inter-being)을 지니고  ‘잡초들의 한 생(生), 그 삶의 역경도’ 당당한 자존감으로 끝내 지켜내야 한다.
 
         

 3. 상상력의 합일(合一)과 언어의 집짓기       

  특히 종교적인 희열이나 감미로운 예술행위로 깊은 감동을 받았을 때, 놀랍게도 다이돌핀(Didorphin)에 의한 심리적 안정감에 인체의 면역체계에 강력하고도 긍정적인 호르몬이 분비되어 암세포를 공격하는 경이적인 현상이 발생된다. 이 같은 신선한 감동과 충격으로 ‘시적 치유의 효과가 주어짐’은 「상상력의 합일과 언어의 집짓기」로서 시인의 응시와 자아회복에 적합하다. 일단 어두운 그늘이나 칙칙함이 말끔 씻겨나 자신의 분신과 자연친화적인 생태가 생명외경의 모티프로 작동되는 보기로 “바람이 손끝에 침을 발라 시간을 낱장처럼 넘기는 늦은 오후/겨울 앞에 선 단풍나무 한 그루/고통의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환한 직면을 본다/꽃 한 다발을 내밀고 싶은 감동적인 결말 앞에/안간힘으로 죽음을 이루려던 그가 떠올라 나는/다시 나무 곁에 한동안 서있어 주었다 그리고/말 대신 단풍만 간혹 던지는 나무에게 답해 주었다/'니가 참 부럽다'(농담)”에서 순수서정성의 그 미감과 발화(發話)가 메타(metaphor)에 의해 ‘말 대신 단풍만 간혹 던지는 나무에’ 대한 관심과 응시의 매개로 작동되고 있다.  
  여기서 비중 있게 논의한 그의 시편에서 파악되는 존재론적 표징은, 언어의 절제력과 사유의 깊이를 통해 충직한 삶의 양상을 풀어 보인 해법의 타당성이다. 한편 차별화된 시적 자아는 사물과 감성의 합일을 보다 꿈꾸는 역동성으로 화해와 공존의 세계를 지향하는 존재감 빛나는 창조행위에 맞물려, 그 자신이 반복적으로 ‘사라진 것들의 행방을 쫒는 가늘고 긴 저, 골목이 수액 줄 같이 꽂혀 있는 여기는 슬픔의 군락지’의 결속(結束)인 까닭에 “하루를 딛고 온 신발 밑창만큼/날마다 방전 되는 닳은 나이들과/중모리 풍 보폭으로 교문을 나서는 지친 나이들이/짧은 휴식처럼 모이는 저, 골목/어지러운 길 끝을 소용돌이치며 사라지는/하루, 어둠의 증언을 따라 나는 미행하듯/시선을 옮기며 사라진 것들의 행방을 쫒는다(저, 골목)”라는 시적 모티프는 ‘저, 골목’을 향한 일관된 집념의 반짝이는 편린(片鱗)이다. 따라서 상징의 숲을 거니는 대다수 이 땅의 시인들이 칼날(刃) 섬뜩한 금속성 언어를 무차별 사용하는 시간대에서, 놀랍게도 투명한 서정성을 시적 동기로 즐겨 차용하면서, 치밀한 타이밍을 포착하여 존엄한 생명외경의 사상을 삶의 일상과의 융화적(融和的) 교감의 틀에서 ‘어둠의 증언을 따라 미행하듯’ 긴장감 속의 전율(戰慄)은 수사적 기법을 적절성으로 수용한 일례다.
  어디까지나 끊임없는 자아의 치열한 통찰의 시각에서 이채롭게도 그 자신의 시편에는 현대시론에서 비중 있게 논의되는 패스티쉬(混成模倣)가 시적 묘미로 언뜻언뜻 확인되지만 그만의 정신적 생산물은 충직한 독자들에게 진아(眞我)의 면목을 절제된 언어로 표출하고 있으나, 간혹 냉소적이고 서정성을 거역한 현상은 안타까운 심사(心事)다. 그 같은 사유는 ‘자신을 위해 무덤을 만들지 않는 새(鳥)의 생리’로 비상을 희구하는 시적 해명은 천상(天上)의 표징인 ‘새가 소리 하나로도 꽃그늘을 깐다.’는 고정 틀 깨기에 의해 시적 상상력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하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모던포엠 포커스』vol. 176호의 권상진 시인의 다소 인상 비평적이나 시적 분할과 통합에 있어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현대시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도식화하지는 않았으나 시작(詩作)의 역동성은 상상력의 확장에서 비롯된다. 까닭에 감지하고 접하는 대상의 물활론(物活論)을 다양하고 심층적으로 수용하려는 깊은 사유(思惟)-홀로 있기’로 한순간 고조된 긴장감 뒤에 비로소 시적 정조는 온전한 평상심(平常心)을 지탱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절된 관계성의 회복을 위하여 깊이 있는 서정적 미감으로 친근하게 다가서는 ‘겸허한 심성과 담백한 시격, 그리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서의 정체성의 확장’은 더없이 요청된다. 까닭에 이분법에 의한 대립과 갈등구조의 경계를 허물고 오로지 우리의 현대시사에서 감미로운 다이돌핀을 쏟아내며 밝은 미래의 지평을 활기차게 열어가는 예언적 자존자이기를 못내 소망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