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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 월간 모던포엠 문학평론(2017.12월호, 김부회 문학평론가) 본문

나의 편린들/돌아온 시

비스듬히 / 월간 모던포엠 문학평론(2017.12월호, 김부회 문학평론가)

가짜시인! 2017. 12. 28. 11:43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새로움의 탐색을 위한 시 세편

 

다른 각도의 풍경들

-, 김부회

 

비스듬히/ 권상진

가을 단상/ 박하경

쓸데없는 일에 관한 단상/손동욱

 

가을이라 말하려다 문득, 창밖 단풍이 절정을 지나 쇠락하고 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한 해의 마무리 숫자도 많이 남지 않은 계절, 글감의 소제목을 생각하다 가장 먼저 일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그 일상을 잠시 비틀면 또 다른 무엇이 보일까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시는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이라 가정할 때 우리의 시는 일반적인 현상에 대하여 일반적인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보다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관에 입각한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에 대하여 성찰하는 것인지? 잠시 자문하게 된다. 누구나 같은 관점으로 보는 알레고리를 갖고 있다면 시는 개인의 고유성을 잃게 될 것이며 각각의 질감을 상실한 글이 될 것이다. 다양한 소재와 관점을 가진 작품이기에 작품성을 논하게 되는 것이며 창작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기에 시를 쓰는 자세는 저마다 다른 각도를 갖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직각이든 예각이든 평면이든 사선이든 어느 위치에서 어느 눈높이에서 현상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시적 현상은 매우 달라질 것이다. 또한, 그런 개인적 관점의 차이가 질적인 시의 창의성을 높이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남희 시인은 [겹눈의 상상력과 시의 명징성]이라는 기고 글에서 시인의 눈이야말로 평면적인 세상을 중층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시인의 눈을 겹눈이라 말했다. 이는 다양한 각도, 위치에서 세상을 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중략>

 

이번 호의 주제어인 다른 각도의 풍경 관점에서 세 편의 시를 선정하였다. 권상진 시인의 [비스듬히]라는 작품을 살펴본다. 정확히 앞만을 응시하고 바라본 것들을 좀 더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그 보는 각도에 따라 현상의 요체와 진리들이 어떻게 보이고 생각되는지에 대한 관점을 매우 진중하게 다룬 좋은 작품이다.

 

비스듬히

 

권상진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꼿꼿한 자세만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과 사람의 틈

 

비스듬히 보아야

세상이 만만해 보일 때가 있다

예의처럼 허리를 숙여야 오를 수 있는 산비탈 집들

첫차에 등을 기댄 새벽의 사람들

 

기대고 싶거나 주저앉고 싶을 때

손 내밀고 어깨 주는 것은

언제나 비스듬한 것들

 

삐딱하다는 것은

홀로 세상에 각을 세우는 일이지만

비스듬하다는 말은

서로의 기울기를 지탱하는 일

 

더러는 술병을 기울이면서

비스듬히 건네는 말이

술잔 보다 따듯하게 차오를 때가 있다

 

시제를 비스듬히 라고 붙였다,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말이다. 권상진 시인의 비스듬히 를 살펴보기 전 이해를 돕기 위해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 를 먼저 소개해 본다.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을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세상을 산다는 것은 우뚝하게 홀로 오롯이 서서 살 수만은 없는 것이다. 희랍의 철학자의 말은 인용하지 않아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어울려 산다는 말은 내가 주체가 아닌 객체의 존재 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모두 다 얻으려고 하면 아무도 얻지 못하고 모두 다 주려고 하면 모두 다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있듯 나 스스로 단체나 집단, 혹은 사람과 자연, 삶과 인생, 부과 빈곤, 이 모든 것에서 이끌어가는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될 때 어쩌면 우린 더욱 더 삶에 진솔해지지 않을까 싶다. 내가 비스듬히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거나, 혹은 내게 비스듬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서로의 그 기울기로 인하여 세상은 좀 더 따듯하고 안온한 세상일 것 같다. 무엇엔가 기댈 수 있거나, 기대주는 것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를 넘어 인간답다는 이야기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요즘처럼 혼자라는 말이 유행하는 시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혼밥, 혼술 등등의 단어가 낯설지 않다. 하지만 혼자라는 단어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보면 정작 혼자가 원해서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내몰려 등등의 피동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물론 좋아서 하는 혼자도 많겠지만,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며 그 여럿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좋은 질료임도 부인할 수 없다. 권상진 시인은 말하고 있다. 꼿꼿한 자세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의 내면에 대해, 꼿꼿하다는 것의 풍자에 대해. 연일 매스컴에서 이른바 갑질에 대한 암울한 뉴스가 많다. 이런 시대에 권상진 시인의 말에 귀 기울여보면 좋을 듯하다.

 

몸을 기울여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꼿꼿한 자세만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과 사람의 틈

 

세상과 사람의 틈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매우 크다. 틈은 어쩌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각도의 풍경일 것이다.

 

비스듬히 보아야

세상이 만만해 보일 때가 있다

예의처럼 허리를 숙여야 오를 수 있는 산비탈 집들

첫차에 등을 기댄 새벽의 사람들

 

기대고 싶거나 주저앉고 싶을 때

손 내밀고 어깨 주는 것은

언제나 비스듬한 것들

 

기대고 싶은 대상, 목적물은 꼿꼿하지 않다. 제 주장만 앞세우거나 제 계산만 앞세우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곁에 우리 주변에 수많은 비스듬한 것들에 손 내밀어보자. 그들의 온기는 언제나 따듯할 것이다. 삐딱하다는 것은 각을 세우는 일이라고 한다. 반면에 비스듬하다는 것은 서로의 기울기를 지탱하는 일이라 권상진 시인은 말한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결과가 시에 녹아들어 마음 한 부분에 반성과 새롭게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다. 시는 그런 것이다. 난삽한 요설로 비틀어 쥐어짜는 수사의 잔치가 아닌 한 점 한 점, 한 획 한 획 생각의 깊이를 저며낼 때 비로소 시가 생명을 갖고 꿈틀대는 것이다. 독자의 가슴에.

 

더러는 술병을 기울이면서

비스듬히 건네는 말이

술잔 보다 따듯하게 차오를 때가 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