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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토르소 / 이장욱

가짜시인! 2013. 2. 18. 09:39

토르소

 

      이장욱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번에 한 개씩

  오해를 위해 팔았다.

 

  나는 습관이 없고

  냉혈한의 표정이 없고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입을 수 있나.

  악수를 하거나

  이어달리기는?

 

  나는 열심히 트랙을 달렸다.

  검은 서류가방을 든 채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밤의 쇼윈도우에 서서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았다.

  악수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정해진 자세로

  긴 목과

  굳은 어깨로

 

  당신이 밤의 상점을 지나갔다.

  헤이,

  내가 당신을 부르자 당신이 고개를 돌렸다.

  캄캄하게 뚫린 당신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던 적이.

  당신이 나의 손과

  발목

  그리고 얼굴이었던 적이.

 

 

 

♥가짜시인의 단상

 

화자인 토르소는 시인 이면서, 나 이면서, 동시에 당신 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 모두로 환치 되는- 모든 것이 거세된 이 물상은 읽는 이로 하여금 동질화를 느끼게 한다.

쇼윈도우 안에서 바라본 상점 밖의 당신, 그리고 시를 통해서 그 광경을 들여다 보는 독자인 나는 각각의 다른 공간에서

하나의 존재로 합쳐지게 된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존재 자체로 충분한 이유가 되는 죄책감, 그리고 숱한 오해들...

시인은 결국 자신이 쇼윈도우 속 토르소를 보고 느껴낸 생각들을 토르소가 당신(나)를 향해 말하게끔 상황을 역전시켜 놓았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시에서 삶에 대한 강한 반전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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