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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잉여의 시간 / 나희덕

가짜시인! 2012. 9. 12. 14:43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습작기가 끝나고 나면 나도 사랑과 이별에 대한 시를 써보고 싶다

가장 인간 감정의 저변에 닿을수 있는...

거기에 무슨 위선이 있고,거짓이 있고, 말장난이 있을 것인가

연애시를 쓰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가식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과 이별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기에.

 

잉여란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의 시간과 배경, 결국에는 자신 마저도 세상에서 남아돌게 되는 잉여의 상태

인간은 사실 여러 해 살이 동물. 한 번의 사랑이 떠나갔다고 해서 나도 소멸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음 사랑이 당도할 때까지 그래서 새로운 삶이 시작 될 때 까지

잉여의 존재처럼 가벼워 지는 것일 뿐.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시간은 여전히 내게 배달 된다.

어쩌라고.... 무의미의 시간들을. 

 다른 사랑이 찾아 와서 새로운 한생애를 얻기 전까지

그 시간 조차도 죽은 시간임에 틀림 없다.

 

연애시는 어렵다

유치해지기 십상이다

저렴하지 않게 적절한 품위 유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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