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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평화문학상,상금 2,000만 원짜리 詩라는 글을 읽고 _ 강경우 시인

가짜시인! 2019. 4. 26. 08:19
[ 특 별 기 고 ] 제 주   4 . 3   평 화 문 학 상 ,  상 금  2 .0 0 0 만  원 짜 리  詩 라 는  글 을  읽 고
  •  영주일보
  •  승인 2019.04.08 10:14
강경우 / 시인
강경우 시인
▲ 강경우 시인 ⓒ영주일보

/사월 볕 간잔지런한 색달리 천서동. 중문리 섯단마을로 도시락 싸고 오솔길 걷기. 늦여름 삼경에 내리던 동광 삼밧구석의 비거스렁이. 세 살 때 이른 아침 덜 깬 잠에 보았던 안덕면 상천리 비지남흘 뒤뜰의 애기 동백꽃, 동경에서 공부하고 온 옆집 오빠가 들려준 데미안이 씽클레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는 남원면 한남리 빌레가름. 갓 따낸 첫물 든 옥수수의 냄새를 맡았던 신흥리의 물도왓. 친정집에서 쌔근거리면서 자는 아가의 나비잠, 던덕모루. 예쁜 누이에게 서툴게 고백하던 아홉밧 웃뜨르 삼촌.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살았을 것 같은 가시리 새가름의 설원.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국을 이방인인 그이가 끓여주던 한경면 조수리 근처. 매화차의 아리다는 맛을 사내의 순정이라고 가르쳐준 한경면 금악리 웃동네. 옛집에서 바라보던 남쪽 보리밭의 눈 내리는 돌담을 가졌던 성산면 고성리의 줴영밧. 명월리 빌레못으로 들어가는 순례자의 땀범벅이 된 큰아들. 해산하고 몸조리도 못 하고 물질하러 간 아내를 묻은 화북리 곤을동. 친어머니를 가슴에 묻은 아버지마저 내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애월읍 봉성, 어도리. 이른 아침 골목길의 소테우리가 어러렁~ 메아리만 남긴 애월면 어음리 동돌궤기. 지슬 껍데기 먹고 보리 볶아 먹던 누이가 탈나서 돌담 하나 못 넘던 애월면 소길리 원동. 고성리 웃가름에 있던 외가의 초가집에서 먹던 감자. 동광 무등이왓 큰 넓궤 가까이 부지갱이꽃으로 소똥 말똥 헤집으며 밥 짓던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깨어진 쪽박이란 뜻인 함박동,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던 그곳에서 태어나 삼촌들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던 소설가. 초여름 당신과 손잡고 바라보던 가파도와 마라도, 알뜨르까지의 밤배. 지금까지 “폭삭 속아수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제주 삼촌들과 조케들, 잃어버린 마을(김병심 작.「눈살 때의 일」 전문). 출처 : 영주일보(http://www.youngjuilbo.com)/

이글을 시로 읽어야 한다니, 참으로 곤혹스럽다. 백번 양보하고 시로 읽어보려 해도, 눈여겨 볼만한 비유나 함축도 없다. 그렇다고 리듬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관형어구절로 덧씌운 지명이나 명사 및 명사형 어구의 수평적 나열, 마치 비슷한 규격의 벽돌 쌓기와 뭐가 다른가. 소설의 서사문이나 일반 산문이라 해도 현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묘사로써 변화를 주기도 하는데, 하물며 시라고 하는 글이 한결같이 수식어를 덧씌운 설명문뿐이다.
/색달리 천서동. 오솔길 걷기. 동광 삼밧구석의 비거스렁이. 안덕면 상천리 비지남흘 뒤뜰의 애기 동백꽃, 남원면 한남리 빌레가름. 신흥리의 물도왓. 던덕모루. 아홉밧 웃뜨르 삼촌. 가시리 새가름의 설원. 한경면 조수리 근처. 한경면 금악리 웃동네. 성산면 고성리의 줴영밧. 화북리 곤을동. 애월읍 봉성, 어도리. 애월면 어음리 동돌궤기. 감자. 자장가. 함박동. 소설가. 밤배./
*필자주 : ‘한경면 금악리’가 아니라 ‘한림읍 금악리’이다.

이런 지명과 명사를 수식하기 위해 동원된 관형어구절들은 ‘4.3’과는 어떤 관련성도 없어 보인다. 특히 /동경에서 공부하고 온 옆집 오빠가 들려준 데미안이 씽클레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는 남원면 한남리 빌레가름./ 그러니까 이 말은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씽클레어의 촌스러움’과 ‘빌레가름’이 그렇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그조티시즘(exoticism)의 냄새를 풍기자고 끌어들인 것인가. 그리고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살았을 것 같은 가시리 새가름의 설원./ 이 또한 ‘나타샤’란 러시아식 이국명과 함께, 당시에 백석은 무척 세련된 남자로서 기생 애인에게 쥐어주었다는 시(「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정서를 ‘가시리 새가름의 설원’과 연결시킨 의도 또한, 시적 대상인 4.3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심사자들이 밝힌 ‘세 사람의 작가’란 헤르만 헤세와 백석, 그리고 /....삼촌들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던 소설가./ 곧 『순이 삼촌』의 작가 “현기영”까지 포함해서이다. 이 “현기영”은 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선자들은 오랜 시간 논의 끝에 시 한편 속에 세 명의 작가가 등장하는 자칫 흠이 될 수도 있는 요소를 잘 극복하고 주제의식과 시적 완성도를 견지한 <눈 살 때의 일>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주제의식과 시적 요소를 견지”하였다는 것인데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서는 도저히 주제가 뭔지, 생각해낼 수도 없고, 결구인가 싶은 끝의 시구 또한 /지금까지 “폭삭 속아수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제주 삼촌들과 조케들, 잃어버린 마을./ 보는 바와 같이 관형어절로 크게 덧씌운, '그런 사람들과 마을./이므로 앞의 구절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다만 /제주 삼촌들과 조케들, 지금까지 “폭삭 속아수다”/가 사실상 결구인 셈인데, 그것마저 조케들과 삼촌들을 수식하는 관형어의 인용구로 묶여있는 것이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정조의 편안함, 제주어에 스며있는 제주서정, 그 속에 빛나는 민중적 삶의 공간과 시간의 역사가 아름다웠다. 또한 자칫 흠이 될 수도 있는 요소를 잘 극복하고 주제의식과 시적 완성도를 견지했다”/

이 당선작 속의 제주어는 “폭삭 속아수다”를 빼면, 모두 지명뿐이다. 지명이므로 굳이 그 뜻을 헤아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실 요즘의 제주 젊은이들은 제주어를 잘 모른다. 오죽하면 학교에 제주어 시간을 배정했을까 싶다. 이번 심사위원들도 모두 타지 사람이다. 제주어를 전혀 모를 것이다. 하니 신비하게는 보이겠지만 말뜻은 전혀 모를 것이다. 여기 인용어로 사용한 /폭삭 속아수다/가, 사실은 의미를 가진 시구이다. 이 말을 사전에서 보면 ‘많이 수고하다'의 제주 사투리라고 되어 있다. 그런가? 이 말의 뜻을, 제주 사람들도 한 번 더 생각해 봐야한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알고 있을까? “폭삭 속아수다” 왜냐하면 아침 목숨이 저녁에까지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살육의 현장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폭삭 속아수다”는 어딘가 불편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폭삭 수고 해수다” 무엇을 눈치 보느라 수고했다는 것인가? 다랑쉬 굴속 사람들처럼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았다고 약 올리는 것인가. ‘수고 해수다!’ 이래서 필자는 처음도 끝도 없는 글, 그저 잡글과 다름 아니라고, 감히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옛 제주의 지식인, “김석익(金錫翼)”이 붓으로 쓴『탐라 기년』의 구절을 보자.

/ㅇ按宋堯讚咸炳善之前後掃蕩 吁共慘矣. 當是之時居於兩間者 何以則可乎! 旣逼於山軍之恐喝 又刼於軍警威脅 更迫於西北靑年之跋扈 生殺與奪 惟視這邊之操 縱進退殺人 如麻朱殷載路
살피건대 송요찬, 함병선의 전후 소탕(휩쓸어 모조리 없애 버림)은 아! 모두 참혹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양쪽 사이에 끼어 살았던 사람들은 어찌했으면 좋았을까? 이미 산군(좌익성향의 무장대)의 공갈로 핍박당했고, 또 군-경의 위협에 겁먹고 있는데, 또다시 서북청년의 발호(제 멋대로 날뛰며 행동함)로 핍박당한다. 살리고 죽이는 일과 재물을 주고 뺏는 일이, 오로지 이들의 마음먹기에 달려있었다. 마침내 나아가고 물러서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마치 삼을 베듯 하니 붉고 검은 것(주검)들이 길 위에 널려있었다.

吁嗟乎! 不作山中之俘虜 合死軍警靑鋒鏑之下 乃已於是 人皆重足側目 未知 死者爲得乎 生者爲失乎. 狼顧鴙脅視息 朝不謨夕入山之多 宲由於是. 可謂有史以來 未有之慘禍矣. 及至己丑春 內務長官 申性謨之來 始停殺戮之政 然延至庚寅六二五事變發生 稍有知識 負望之人 一掃殆盡 噫嘻悲夫.
아아! 산중의 포로가 되지 않으면 군인, 경찰, 서청의 총칼아래 다 죽어야만 끝이 난다는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너무 무서워서, 죽는 것이 이득이 되는지, 사는 것이 손실이 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무서워 이리처럼 자주 뒤돌아보고 꿩처럼 두리번거리면서 숨조차 쉬기 어려운, 아침 목숨이 저녁을 기약할 수 없어 산에 들어간 사람이 많았던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다. 가히 유사이래 일찍이 없었던 참화라고 말할 수 있다.

급기야 기축(1949)년 봄에 이르자 내무장관 申星謨가 내려와서야, 비로소 살육정책이 멈췄다. 그렇지만 庚寅(1950)년 6․25 사변 발생까지 이어졌고 조금이나마 지식이 있거나 덕망이 있는 사람은 단번에 쓸어 다 죽이고 말았다. 아아! 슬프고 또 슬프다!(번역, 강경우)/

보는 것과 같이, 이런 때를 오로지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 낭고치시(狼顧鴙視), 이리처럼 뒤돌아보고 꿩처럼 두리번거리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폭삭 수고했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곧 역사적으로 저 여몽(麗蒙) 시대와 조선, 그리고 왜정의 수탈과 4.3의 생사여탈을 장난처럼 자행했던 자들에게까지, 그저 속고만 살았으므로 “폭삭 속았다”는 뜻으로 쓴 말은 아닐까해서이다. 4.3의 막바지에도 비행기 격문으로 귀순하면 살려준다 하므로, 피난처럼 입산하였던 일반민들은 하산하였지만, 다시 죄의 경중을 가린다고 고문, 살육의 연속이었으니 “신성모”란 자에게까지도, 제주인들은 ‘속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에 하는 말이다.

‘폭삭, 속아수다!’

문맥에 따라서, 또는 어감에 따라서 언어란 것은 얼마든지 다른 뜻을 내포하게 된다. 때문에 이 말 또한 다르게 들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이 말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글은 영주일보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