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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이후』 시집 해설(김학중 시인) _ 계간 『시현실』2018년 가을호 본문
시집 여행
권상진 『눈물 이후』
-해설
‘이후’를 여는 힘
김학중 (시인)
1. 눈물이라는 문장
권상진 시인은 전태일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슬픔에 대해 깊이 있는 시적 사유를 펼쳐온 시인이다. 시인은 등단 인터뷰에서 앞으로 펼쳐나갈 작품 활동에서 가장 중점을 둘 시 정신에 대해 “인간을 부속품처럼 여기지 않고 중심에 놓는 정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노인의 고독사를 다룬 등단작 「영하의 날들」에서도 이러한 시 정신을 보여준 바 있는 시인은 이번에 발간하게 된 첫 시집 ?눈물 이후?에서 이를 더욱 폭넓게 살폈다. 권상진은 이를 하나의 시어에 결집해서 우리 앞에 현시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바로 ‘눈물’이다. 그리고 이 ‘눈물’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개별 주체의 슬픔이다.
권상진이 우리에게 건네는 눈물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열어내는 의미의 폭은 어떤 점에서 우리 시사에서 익숙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익숙함이란 것은 시 작업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요소 중에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도 눈물과 슬픔이 환기하는 차원을 다룰 때 짊어져야 할 위험 요소를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감내한 그의 시편들은 우리 앞에 우리 시대가 마주해야 할 새로운 눈물의 의미를 제시하고 나아가 그것을 새롭게 이름한다. 권상진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근본적 난관을 끌어와 눈물과 슬픔을 재정의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슬픔은 늘 새롭기 때문이다. 시사에서 슬픔의 정한과 눈물의 이미지가 익숙하고 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에서 겪어내는 고통스런 현실들은 그 익숙함을 넘어설 정도로 늘 문제적이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장에서 우리는 그러한 눈물을 매일 마주하며 살아간다. 눈물은 지금 여기의 사건화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우리 앞에 매번 새롭고 괴롭게 도래하는 사건화된 눈물들을 마주해 왔다. 용산 참사와 세월호와 같은 거대한 재난에서부터 땅콩회항과 같은 갑질 사건으로 인해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눈물까지 그리고 자신의 청춘을 걸고 위험한 일자리에서 일하다가 스크린도어에 끼어 죽은 청년 노동자의 죽음도. 그뿐 아니다. 장기화된 청년 실업에 고통받는 청년들의 눈물과 생활고로 죽음을 택한 세 모녀가 남기고 간 월세 봉투와 편지를 마주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눈물들도 있을 것이다. 이 눈물들은 우리에게 문제적으로 사건적인 눈물이며 늘 우리에게 처음 도착하는 눈물이다. 권상진은 눈물의 이러한 문제적 차원을 시적 사유로 풀어내 우리 앞에 가시화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한 그의 시도는 용기 있고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우리 앞에 눈물이 사건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근본적 질문을 사유하도록 이끈다. 이 과정이 도착한 지점을 권상진은 ‘눈물 이후’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적 여정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첫 시집 ?눈물 이후?인 것이다. 이제 그가 시를 통해 노래하는 ‘눈물’과 ‘눈물 이후’가 무엇인지 듣기 위해 그의 시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인간은 근본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존재이다. 눈물은 우리가 삶을 짊어지고 겪어내는 지점에서 이미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고통이나 경험을 의미하는 파토스에는 이러한 삶의 특성이 이미 고려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여러 국면에서 눈물을 마주하게 된다. 그 눈물은 누군가가 “슬몃 등을 돌려 마지막 인사를 대신한 사람”(「등」)과 이별하면서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고 “삶의 바닥에 무릎 꿇어 본” (「바닥이라는 말」) 경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다. 또는 폭염 중에 고독사한 노인 (「영하의 날들」)을 발견해 장사 지내다가 흘리기도 할 것이고 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늦을 거면 밥은 해결하고 오라”(「집밥」)는 아내의 전화를 받은 사내가 저녁 끼니를 때우는 잠깐 사이, 눈가에 약간의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병상에서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문제인 죽음 앞에서 “평생 모아온 오답들”(「오답 노트」)을 되짚어보듯 깊이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면서 흘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눈물은 우리가 직접 마주하게 되기도 하며 스쳐 지나가기도 할 눈물이며 동시에 우리가 흘리는 눈물일 것이다. 권상진은 일상적이면서도 동시에 각자에게는 사건적인 이러한 눈물을 노래하면서 이 눈물이 가진 차이와 동일성을 감지한다. 이러한 그의 시적 사유는 ‘눈물’을 ‘문장’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적막은 나에게 틀린 문장을 주었다
상형도 표의도 아닌 미완의 문자들이
한참을 생각처럼 고이다가
눈에서 턱 밑으로 써 내려가는 짧은 문장
눈물을 소리 내어 읽어 본 사람은 안다
스타카토의 낯선 문법으로 변주된
단조풍 문장은 처음부터
주어도 술어도 없는 틀린 문장이란 것을
몰래 혼자서 쓰던 문장이었지만
들키듯 누군가에게 읽힐 때,
그때마다 오독되는 나는
흐르지 않는 단단한 문체로 다시 습작 되어야 한다
흘린 문장에 내가 씻긴다
나는 후련하고, 나는 정갈하고
나는 지금 인간적이다
―「틀린 문장」 전문
이 시는 시적 주체가 적막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 찾아온 깨달음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이 순간 ‘눈물’은 “상형도 표의도 아닌 미완의 문자들”로 우리 내부에 모여드는 어떤 것이다가 “눈에서 턱 밑으로 써 내려가는 짧은 문장”으로 주체 앞에 가시화된다. 우리 내부에서는 가시화되지 않던 “미완의 문자들”은 눈물로 나올 때 ‘문장’이 된다. “눈물을 소리 내어 읽어 본 사람은 아”는 문장인 눈물은 그 내부에 고여 있는 미완의 차원과 그 차원이 열어내는 수많은 차이로 인해 하나의 문장이 되지 못하는 문장이다. 그것은 그렇기에 온전히 말해질 수 없는 문장이고 말 이전의 음(音)의 차원을 내포하는 “스타카토의 낯선 문법으로 변주된/단조풍 문장”인 것이다. 이 문장은 문장이라고 말할 수 없는 차원을 내포하지만 문장이란 표현을 경유하지 않으면 우리 앞으로 흘러오지 않는 실패한 문장이다. 그래서 눈물이란 문장은 “처음부터/주어도 술어도 없는 틀린 문장”인 것이다. 이는 눈물이 그 자체로는 어떠한 문장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틀린 문장은 어떤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고 소통 또한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시적 주체는 이러한 문제에 홀린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 문장에 의해 “내가 씻긴다/나는 후련하고, 나는 정갈하고/나는 지금 인간적이다”라고 말한다. 틀린 문장인 눈물에 의해 주체는 자신이 인간적인 존재임을 확신한다. ‘눈물’은 우리를 정화하며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언어이다.
권상진이 「틀린 문장」을 통해 드러낸 눈물에 대한 시적 사유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언급한 것을 상기하도록 이끈다. 이를 경유해 그의 시적 사유를 읽으면 우리는 틀린 문장을 통해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차원을 닦는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이르면 눈물이 틀린 문장이라고 하는 표현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게 된다. 틀린 문장은 역설적이게도 존재론적으로 우리를 본래적 존재로 회복시키고 우리를 자기 자신이도록 만드는 가능성의 문장이다. 때문에 권상진은 이 눈물이란 문장에 주목한다. 놀라운 점은 이 문장이 우리 존재를 밝히는 만큼 우리 존재의 차원을 은폐하고 완성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권상진은 「엔딩 노트」에서 자기 존재의 차원을 문장으로 가시화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한 장의 노트 위에 자신을 옮겨 적는 글쓰기를 시도하는 행위로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을 옮겨 적는 행위는 자신을 흩어 놓는 행위가 된다. 여기서 흩어짐이란 문장들이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로 쓰여졌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더불어 틀린 문장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내포한다. 이로 인해 “한 줄씩의 내가 옮겨지고 마침내 나는 없는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이 역설적으로 자기 존재의 비가시화를 이끈다. 겨우 몇 줄의 이력만 건진 시적 주체는 이러한 자기 개시의 난관으로 인해 타자의 “슬픔을 훔치러 가기로 한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나타난다. 이때 ‘눈물’은 시적 주체의 차원에서만 내재적인 그러한 ‘눈물’이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더불어 ‘눈물’이 미완의 문자이며 틀린 문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게 된다. 권상진은 ‘눈물’이 미완의 문자이자 틀린 문장인 이유를 ‘눈물’의 개별성에서 찾는다. ‘눈물’은 주체에게는 주체가 감내한 파토스를 현시하는 수동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인데 이 행위는 타자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한 것이다. 권상진은 타자를 향해 열리는 ‘눈물’의 차원, 즉 슬픔은 ‘눈물’이 우리 개별 주체의 몸과 관련이 있다고 노래한다. ‘눈물’은 우리 몸에 기입된 어떤 차원을 경유해야만 우리의 존재를 밝히는 문장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시적 사유가 잘 드러난 시가 「등」이다.
슬몃 등을 돌려 마지막 인사를 대신한 사람이 있다
미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 생각들이 차곡한
등은, 그가 한 생애 동안 써온 유서
일생을 마주 보고 건네던 가벼운 말들이
서로에게 가닿거나 때론 우리의 간격 사이에서 흩어지는 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등이다
인연이 다한 뒤에야 당도하는 말들이 있다
(중략)
이제사 돌아서는 것들의 등이 보인다
내게 오려던, 모든 수사가 지워진
간결한 주어, 목적어, 서술어
―「등」 부분
이 시에서 시적 주체는 ‘등’에서 어떤 비밀을 본다. 시적 주체는 “등은, 그가 한 생애 동안 써온 유서”라고 노래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엔딩 노트」에서 자기 자신을 가시화하는 데 겪은 어려움의 비밀이 더 구체화된다. 그것은 우리 몸의 일부는 타자를 향해서만 노출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런 점에 등을 가지고 있다. 이 등의 차원이 기입된 우리 자신은 개별 주체의 차원에서는 온전히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를 고려해 ‘눈물’을 생각하면 ‘눈물’이 틀린 문장으로 읽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타자적 차원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의 삶인 등이 “인연이 다한 뒤에야 당도하는 말들”인 까닭에 개별 사건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에는 ‘등’이 지닌 특성이 모두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눈물’은 바로 이러한 사건적 차원을 근본적으로 내재하고 있기에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에는 틀린 문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권상진은 ‘등’에 대한 사유를 통해 ‘눈물’이 지닌 시간적 한계성을 삶의 전반적 지평에까지 이어놓는다. ‘눈물’에 내재된 개별 사건의 차이와 동일성은 이제 ‘등’의 차원을 경유하며 보다 폭넓은 시적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2. 눈물의 이름
‘눈물’은 자기 자신의 인간적 차원을 개시하고 나아가 타자적 지향성을 가진다. 이를 통해 ‘눈물’은 그것이 우리에게 경험될 때 ‘틀린 문장’의 차원을 경유해 도착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마주하는 근본적 차원에 어떤 가능성을 연다고 느낀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눈물’의 가능성을 마주하는 것은 단순히 일상적 차원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권상진도 이러한 문제적 차원을 알고 있다. 때문에 ‘눈물’이 주체의 차원과 타자의 차원을 향해 모두 열리는 가능성이 어디에서 가로막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해 들어간다. 그는 우리가 ‘눈물’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근간인 파토스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파토스는 우리의 경험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험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타자와 다른 차이를 형성하는 삶의 구체적 차원을 통해 형성된다. 동시에 경험은 이러한 차이를 통해 인간이 각기 다르지만 누구나가 동일하게 겪어낼 수 있는 근본적 차원을 연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각기 다른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이름을 짊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이 경험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인간에게서 이 경험을 현대적 구조 안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현대는 경험 대신 우리에게 체험을 제공한다. 이에 대해 벤야민은 현대가 우리에게서 경험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고 비판한 바 있다. 현대는 우리를 개별화하고 현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시스템 내부에 마치 도구처럼 배치한다. 개별화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현대의 시스템은 우리에게 경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대신 시스템이 제공하는 것을 체험하도록 이끈다. 우리의 주체성을 빼앗고 우리에게 주입되는 프로그램을 수동적으로 체득하는 것이 체험이다. 이제 우리는 마치 공장의 생산 공정에서 제품이 만들어지듯이 시스템이 구성한 공정을 따라 성장한다. 이 성장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경험할 시간마저 빼앗긴다. 오히려 이 공정은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발전하면서 우리를 더욱 옥죄어 온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재생산 구조이다. 이 재생산의 구조는 그런 점에서 현대의 시스템이 지닌 일반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현대인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경험은 배제된 채 체험만을 겪으며 생산된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권상진의 시적 사유의 기저에 놓인 인간을 부속품처럼 여기는 오늘날에 대한 비판의식은 바로 이 경험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다. 권상진은 이러한 현대의 문제를 명민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의 시 「모놀로그」에는 이로 인해 주체가 희박하게 느끼는 문제적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 더불어 ‘눈물’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우리의 “눈동자”가 어떤 억압에 처해 있는지를 시적 사유 속에 놀랍도록 선명하게 가시화하고 있다.
한 번도 거울을 본 적 없는 이의 눈동자는
타인의 기억들로 가득하겠지
내가 찍은 단체 사진처럼 나는 없던 사람
거울을 처음 본 순간부터 불행해졌다
어느 날 저 평면의 타인이 나를 정독한 후로
마침내 알게 된 일인칭의 세상
세상은 나와 배경만 존재하는 모놀로그 무대
네가 찍은 단체사진 속에는 나만 있고
혼자 등장한 무대 위에서 나는
쓸모 잃은 말들을 폐품처럼 뒤적여 본다
아직 사람 냄새가 가시지 않은 타인이란 단어가
빈 병과 함께 잡담 속에 뒤섞여 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세상을 막아서는 거울
서로 비켜서지 않으면 그대로 벽이 되는 우리
타협처럼 손을 내밀어 보지만
나는 오른손, 그는 왼손
결국 그도 온전한 나는 아니었다
―「모놀로그」 전문
이 시에서 시적 주체는 “일인칭의 세상”에서도 “온전한 나”를 마주하지 못하는 주체이다. 그렇지만 “온전한 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을 감지하는 능력을 지닌 주체란 점도 이를 통해 동시에 드러난다. 그것이 드러나는 장소는 자신을 향해 말하는 모놀로그가 가능한 공간인 “거울”에 의해서이다. 여기서 거울은 늘 타자이면서 “타인”인 주체, 그러니까 단수적이면서 복수인 주체들에 겹쳐져 있는, 그런 주체를 비춰주는 매개체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를 여는 첫 행이다. “한 번도 거울을 본 적 없는 이의 눈동자는/타인의 기억들로 가득하겠지”가 그것이다. 거울을 보기 이전에 주체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자기 앞에 나타나는 타자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거울을 마주한 이후로 주체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주체는 거울로 인해 타자와 나누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때 거울은 단순히 주체와 타자를 나누기만 한 것이 아니다. 주체가 거울을 “벽”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을 나타낸다. 이 거울은 나만 비치도록 세워진 하나의 “벽”이다. 주체는 거울에 의해 “눈동자”를 빼앗기는 대신 ‘나’를 부여받는다. 이때 “눈동자”는 “온전한 나”의 기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울은 시적 주체에게 기원을 부여해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상실시킨다. 수동적으로 기입된 ‘나’는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다. 때문에 거울을 바라보는 주체는 경험의 주체가 아닌 자신을 느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적 주체가 거울을 “타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거울은 주체를 경험의 차원을 배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자적 차원까지 가로막는 벽이다. 이러한 거울은 현대인들을 사회 구조 내에 사물처럼 배치하는 그러한 구조적 문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주체는 자신을 희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놀로그’와 ‘일인칭의 세계’는 희박한 주체가 처해 있는 차원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주체는 희박한 주체 속에서도 가능성을 느낀다. 그것은 앞서 ‘눈물’과 ‘등’에 대한 사유를 가시화한 언어 속에서 일어난다. 시적 주체는 거울에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반면 “타인이란 단어”엔 “아직 사람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시적 주체는 희박한 주체로 있지만 이 말의 가능성을 통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말의 가능성은 희박한 주체가 놓여 있는 차원의 근거를 시적 언어로 우리 앞에 나타나도록 이끈다. 그 차원을 권상진은 “바닥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닥에 닿아 있었다
흉물스러운 바닥의 상징들로 각인된 팔과 이마는
오늘, 또 하나의 슬픈 계급을 얻는다
(중략)
달력은 벽에서 전등은 천정에서 화분은 베란다에서
저마다의 자세로 각자의 바닥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절망은
단단한 계단의 다른 이름이 된다
―「바닥이라는 말」 부분
이 시는 바닥이란 차원에 대한 시이다. “바닥”은 희박한 주체들이 서로 분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차원이다. 이 차원은 또한 희박한 주체가 지닌 차원이 어떻게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는지도 또한 보여준다. 바닥은 희박한 주체에게 부여된 “계급”이다. “계급”은 우리의 신체에까지 새겨지는 실제적인 “계급”이지만 동시에 “상징”이기도 하다. “흉물스러운 바닥의 상징들로 각인된 팔과 이마”란 진술은 이러한 “계급”의 특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계급”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계급”이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사회적 계급의 수준을 넘어선다. 이 계급은 더 근본적인 문제적 차원이다. 그것은 「모놀로그」에서 ‘거울’이 지닌 특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닥에 닿아 있었다”라는 진술은 「모놀로그」에서 “눈동자”를 빼앗긴 사건과 동일한 차원에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바닥은 거울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계급”을 부여한 ‘바닥’이 주체에 기입되었을 때 희박한 주체는 “바닥”이라는 “계급”을 단순히 고통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권상진은 이러한 ‘바닥’의 차원에서 희박한 주체가 가능성을 찾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또한 “바닥이라는 말”이 주는 가능성에 담지 되어 있다. 희박한 주체가 ‘바닥’을 언어의 차원에서 다가갈 때 ‘바닥’의 타자적 차원이 희박한 주체에게 침투되어 온다. “달력은 벽에서 전등은 천정에서 화분은 베란다에서/저마다의 자세로 각자의 바닥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이로 인해 상징적 “계급”인 ‘바닥’은 주체에게 부여된 “절망”적 차원을 반전시킨다. 시적 주체는 이 반전에 대해서 “절망은/단단한 계단의 다른 이름이 된다”고 표현한다. 여기에 이르면 ‘바닥’이라는 말은 다른 이름의 가능성이 된다. 권상진의 시적 여정에서 이 다른 이름은 ‘눈물 이후’로 표현된다. 「눈물 이후」에서 바닥의 이러한 가능성이 가시화되고 있다.
빗물은 세상의 어디가 슬픔에 눌려
낮게 가라앉아 있는지 안다
익숙하게 지상의 공허를 찾아 메우는
한줄기 비
마음도 더러 수평을 잃는다
날마다 다른 각도를 가지는 삶의 기울기에
가끔 빗물 아닌 것이 가서 고인다
얼마나 단단히 슬픔을 여몄으면
방울방울 매듭의 흔적을 지녔을까
가늠할 수 없던 슬픔의 양
그 자리에 울컥 눈물이 고이고 나서야
참았던 슬픔의 눈금을 읽을 수 있다
허하던 마음에 고여 든 평형수
기울어진 어제의 날들은
눈물 이후에야 비로소 균형을 잡는다
―「눈물 이후」 전문
이 시는 눈물이라는 문장이 바닥이라는 차원에서 어떠한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지를 집약해 보여준다. 시는 “슬픔”의 차원으로 흘러들고 스며드는 “빗물”에 대해 노래하면서 시작된다. 눈물이자 빗물인 이 물방울들은 “단단히 슬픔을 여”민 물방울들로 “방울방울 매듭의 흔적을 지녔”다. 그러기에 이 물방울들은 ‘바닥’을 향해 간다. 여기서 ‘바닥’은 “날마다 다른 각도를 가지는 삶의 기울기”로 인해 높이에 대한 지향을 갖게 되면서 바닥이 지닌 근본적 가능성을 잃었다. “평형”을 잃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바닥이라는 말」에서 “계급”으로 표상되었던 것의 다른 표현이다. “삶의 기울기”로 인해 “계급”화된 ‘바닥’은 그런데 슬픔에 의해 본래의 ‘바닥’이 지닌 가능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슬픔의 양”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이 “슬픔의 양”은 눈물의 주체적 차원과 타자적 차원이 모인 것을 의미한다. 슬픔은 ‘눈물’로 인해 그 자체가 구체화된다. ‘눈물’은 슬픔의 깊이마저 읽어낼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 눈물은 더 나아가 바닥의 가능성인 “평형”을 회복하도록 이끄는 물로 작용한다. 여기서 눈물은 “평형수”이다. 균형을 이끌어내는 이 “평형수”가 바로 눈물의 다른 이름이다. 눈물은 이때 균형을 기점화한다. 권상진은 이를 ‘눈물 이후’라고 노래했다. 그런 점에서 권상진은 틀린 문장에서 끌어낸 ‘눈물’을 ‘바닥이란 말’의 차원에 들여놓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눈물’의 가능성을 새롭게 기점화했다. 이제 우리는 이 이름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대의 문제들을 다르게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 것이다.
3. 이후를 현재화하는 힘
권상진의 시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그가 말하는 ‘눈물’이 문장이자 말이며 동시에 이름임을 알 수 있었다. 눈물이란 동일한 기표로 포착되고 있지만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가시화되는 가능성의 차원이 달랐다. 눈물은 주체의 차원에서 희박한 주체의 문제적 상황을 나타내주며 타자를 향해가는 언어로 감지된다. 그리고 그것이 확장되어 양을 가질 정도가 될 때 그것은 세계에 균형을 가져다주는 힘의 이름이 되었다. 이를 최대한 확장시킬 때 우리는 권상진이 노래한 눈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가 눈물을 흘리는 순간을 인간적인 순간으로 노래했던 것을 기억하라. 그에 따르면 눈물은 여러 이름으로 변신해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하나의 이름을 가진다. 그것은 인간의 이름이다. 그는 이러한 이름 찾기의 도정을 눈물에 대한 언어적 사유의 흐름으로 우리 앞에 가시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아감벤은 “시인이란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이름으로 변신하는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권상진의 시편들은 이름을 찾아 뛰어드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이름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가 살아가는 바닥에 균형이 도래한다고 노래했다. 눈물은 이후를 연다. 그리고 이 이후를 여는 힘이 눈물인 까닭에 그 힘은 늘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한다. 권상진이 눈물만이 아니라 눈물 이후를 강조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후를 여는 힘은 우리 자신을 기점화한다. 그 기점은 늘 이후를 환기한다. 가능성의 차원을 우리 앞에 나타나도록 이끄는 기점의 시작이 바로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후라는 기점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현재화하도록 이끄는 힘을 지닌다. ‘눈물 이후’는 이러한 기점화 작업이었다. 권상진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눈물 이후’를 깊이 있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이런 맥락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는 인간의 이름을 외면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촛불 혁명 이전의 우리를 기억해보라. 용산에서, 진도에서 우리는 인간의 눈물을 외면했던 적이 있다. 그 외면 이후 우리가 그 눈물을 다시 마주했을 때 우리는 적어도 다시 우리의 가능성을 우리 앞에 촛불로 밝힐 수 있었다. 앞으로 마주할 시대에도 이러한 위기가 오지 않으란 법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인간인지 되물어야 할 사건들 앞에 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에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능력을 현재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권상진의 시편들을 읽어두어야 한다. 권상진은 시인의 말에서 “솔직히 말하자면/나는/아직 한 번도/시의 한가운데에 가닿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이후가 열어 놓은 가능성의 차원에 대한 그 나름의 시적 윤리를 표현한 것이다. 그의 시 작업은 우리의 이후를 여는 시적인 힘을 우리의 한가운데에 두도록 이끄는 작업이었다. 그의 첫 시집은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이름인 인간의 이름, 눈물을 다시 마주하도록 이끄는 데에 바쳐졌다. 우리가 앞으로 이어질 권상진의 시들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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