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국내 최고의 관광지인 제주도는 과거 큰 아픔을 겪은 지역이다. 해방된지 얼마되지 않아 ‘공산당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도민의 1/8 가량이 학살되는 말도 안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학살극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제주 4·3학살극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부마항쟁, 4.19혁명, 6월항쟁 등과 비교해보면 참담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고, 심지어 공교육에서도 언급되는 일이 적다. 그나마 지난 2003년에서야 정부차원의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어 노무전 전 대통령이 과거사 정리를 약속하며 사과를 한 게 ‘대한민국 정부 최초의 공식 사과’였다. 그리고 지난 2017년 4월8일 ‘제주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진상은 명명백백히 밝혀져야한다.
이승만 정권·美 묵인 하에 7년동안 벌어졌던 학살극
삼일절 기념 대회서 시작된 비극…경찰의 총격 참사
남조선노동당 활동시작…계엄령 선포로 시작된 학살
1/8 학살된 제주도민…역사에서 잊혀진 최악의 참사
▲ 사살되어 십자가에 내걸린 제주도민의 시신. <사진출처=4.3사건 진상보고서> |
제주 4·3사건은 지난 1948년 4월3일부터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로, 일본제국의 패망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 간의 충돌 과정과, 이승만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벌어진 초토화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단독으로 무장대 조직, 기습에서부터 시작됐기에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리지만, 그 날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1947년 3월1일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된,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매카시즘 시작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지난 1947년 3월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3만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이 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기백 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사건이 하나 터졌다.
오후 2시 45분 경, 기마경찰이 타던 말에 아이가 말굽에 채었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의 발포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 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고,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사망자들이 시위가 관련이 없으며 경찰의 발포가 과잉 대응이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이들의 발포를 비이성적이라 규정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경찰은 자신들의 이 발포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 관덕정 앞에서의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3월 1일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다는 미확인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흘렸다. 3월1일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이 제주도에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 명의 응원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여기에 3월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발포사건으로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노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남조선노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익 세력을 이끌면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여기에 호응했다. 거기에 3.1 발포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3월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3월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만1211명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이런 요구조건을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노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들을 좌익으로 몰아갔다.
미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좌익을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시키려고만 했다.곧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러면서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탄압으로 총파업은 3월 말부터는 가라앉았다. 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수용자들의 상태는 기본적으로 최악이었다.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1947년 유해진이 도지사로 부임했는데, 그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려고 애썼다. 그에 맞춰 도내 곳곳에서 서북청년회원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되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경찰에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에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달아 사망한 것이다. 경찰에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지속적인 탄압을 받던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은 이런 상황들을 놓치지 않았다. 1948년 초부터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남로당 중앙과의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 제주도 토벌에 나섰던 경찰과 군인 등을 격려하는 이승만. <사진출처=4.3사건 진상보고서> |
시작된 봉기
그리고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즈음,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곧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장봉기는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을 기습 공격한 것이기에 군경은 일동 긴장하였다.
이 날 봉기를 일으킨 무장대는 경찰과 군인에 비하면 상당히 약체였다. 처음 봉기에 참여한 대원들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제 99식 총, 권총, 수류탄, 칼, 죽창, 몽둥이이었다. 그것도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 물론 이후에 군경에 대한 습격과 충돌을 통해 무기를 보강하기는 했지만 인력과 무기의 부족은 여전했다. 한편 이들은 게릴라와 유격대 방식으로 운영된 일종의 ‘빨치산’이었다. 무장대는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군경과 우익 인사들을 괴롭혔고,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선동했다.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군경은 4월3일의 무장봉기를 ‘빨갱이들의 선동으로 이루어진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4월5일, 미군정은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곧이어 응원경찰들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됐다.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격렬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 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진압에 보다 소극적으로 나왔던 경비대를 의심하여 일부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출동시키려고까지 하며 광적으로 무장대 진압에 집착했다.
지속적인 갈등을 벌이던 중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계속 쥐게 되었다.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됐다. 그러는 사이 10월에는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 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낭설이 퍼졌다. 그리하여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0월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됐다.
잔혹한 학살극
10월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중산간마을(산쪽에 위치한 마을)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령 제31호로 계엄령을 내리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그런가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가 대신 죽여버리는 ‘대살(代殺)’과 마을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심지어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 이 말은 “토벌대에 끌려가는 사람 눈에 띄였다간 공연히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어 자신도 끌려가 죽을 수 있을테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전해진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악명높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9년 1월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부근의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이 시신을 싣고 직접 대대 본부로 찾아갔다.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무참히 살해한 후, 북촌리에 나타났다. 북촌리에 살고 있던 10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집결시킨 군인들은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 때 사격으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공포에 잠긴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명 씩 끌고가 마을 주변의 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 이 일로 300~40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고, 이 일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 현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놓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년 12월 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마을을 파괴시키고 제주도의 인구 수를 급감시켰다.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만4000명~1만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면서 그 참혹한 실상을 보고했다.
제주 4.3 사건 동안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재산 피해는 이 초토화작전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같은 학살극은 1954년 9월21일 마침내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완전 종료됐다.
▲ 제주 4·3 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사과는 50여년이 훌쩍 지난 노무현 정부때 이뤄졌다. <사진출처=유튜브 영상 캡처> |
학살극의 결과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명에서 최대 8만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평화포럼에서는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 발생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사건 희생자라는 뜻이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 칠 정도다. 심지어 그 사건으로 인해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 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사건 이후 19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오거나 장가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를 덧씌어 고생한 일이 많다고 한다. 그리하여 ‘레드 컴플렉스’가 극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제주도민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뭍으로 건너온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영도 쪽에 정착해서 살았다.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부산의 중심가가 아닌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영도에는 여전히 많은 제주 출신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 덤으로 제주도민회관도 영도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