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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양념들/경주

[스크랩] 경주서 황룡사 버금가는 신라 왕실사원터 나왔다

가짜시인! 2018. 1. 31. 11:19
경주서 황룡사 버금가는 신라 왕실사원터 나왔다
http://v.media.daum.net/v/20180131091605187

출처 :  [미디어다음] 문화생활일반 
글쓴이 : 한겨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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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서 황룡사 버금가는 신라 왕실사원터 나왔다

입력 2018.01.31. 09:16 수정 2018.01.31. 10:06
낭산서 대규모 유적..불상 7점·유물 1000점
국내 발굴사상 최대규모 대석단 기단 건물지
터 내부 회랑과 십이지신상 기단건물터 주목
전문가 "신라 불교사 다시 써야할 발굴" 평가

[한겨레]

 

경주 낭산 기슭에서 발견된 대형왕실사원 추정 유적의 일부인 대석단 건물터. 국내 발굴사상 최대규모의 기단부와 회랑을 두른 시설터다. 뒤쪽에 전 황복사터 3층석탑과 낭산 자락이 보인다.

국가사적인 경주시 구황동 낭산 기슭(전 황복사터)에서 대찰 황룡사에 버금가는 신라 왕실사원으로 추정되는 거대 사찰터가 발견됐다. 대형 왕실사원의 위세를 보여주는 국내 발굴사상 최대규모의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대규모 회랑(지붕이 있는 긴 복도)을 비롯해 정교한 십이지신상을 새긴 기단건물터 등의 크고작은 건물터들이 드러났다. 유적 안에서는 금동입불상, 보살입상 등 불상 7점을 비롯해 1000점 이상의 막대한 유물도 쏟아져 나왔다.

2년전부터 낭산 일대를 발굴해온 성림문화재연구원은 31일 이런 내용의 발굴성과를 발표하고, 이날 오후 현장을 공개하기로 했다. 연구원에 따르면, 이번 조사는 전 황복사터 삼층석탑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경작지에서 지난해 8월부터 진행됐으며, 발굴 과정에서 통일신라 시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기단 건물터와 대석단 기단건물터 및 딸림건물터, 회랑터, 담장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 왕실 사찰터임을 보여주는 대규모의 사찰 유적들이 확인됐다.

왕실사원의 성격과 관련해 주목되는 유적은 대석단 기단 건물터다. 이 건물터는 서쪽에서 확인된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터에 덧붙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남쪽 면에 돌을 다듬은 장대석을, 북쪽 면에는 자연석을 쌓아 약 60m에 이르는 대석단을 구축한 뒤 전면 중앙부 북쪽에 돌계단을 놓았다. 이 건물터는 내부에 회랑을 돌린 독특한 얼개를 갖고있는데, 경주의 신라 유적에서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색다른 가람배치 방식을 보여준다. 조사단은 이런 특징으로 미뤄 특수 용도의 건물이거나 이곳에 있었다고 추정해온 황복사터의 중심 건물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또 이런 대형 건물터 뒤에 기존의 황복사터 3층석탑이 있다는 점에서 문-탑-금당의 기존 가람 배치구도와는 크게 다른 문-금당-탑의 배치구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해지게 됐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터는 토끼, 뱀, 말, 양의 십이지신상 4구가 각각 조각된 석재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있는데, 대석단 건물터와 함께 사원터의 중요 전각터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노세 우시조라는 일본인이 십이지신상을 발굴조사했다가 다시 묻은 내력이 있는 곳이다. 지난해 5월 전면부의 십이지신상 4구를 90년만에 재발굴(<한겨레> 2017년 9월5일치 18면단독보도)한데 이어 후속발굴로 전체 터의 윤곽이 드러난 상태다. 이 유적의 십이지신상은 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과 함께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신라의 십이지신상 명품으로 손꼽히는데, 제작연대는 8세기 중후반께로 보고있다. 축조 당시 이 상들의 탱석(면석과 봉토가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돌)은 다른 왕릉에서 옮겨와 건물터 기단석으로 다시 사용한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조사구역의 건물터와 방형 연못터에서 나온 금동입불상 및 보살상들.

출토된 1000점 이상의 유물은 대부분 토기와 기와다. 대체로 7~9세기께 것들로 화려한 장식을 수놓은 신장상(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장)의 화상석, 치미, 기와 등이 확인돼 격조높은 건축물이 들어섰다는 것을 실증한다. 금동불 입상과 금동보살입상 등 불상 7점이 나온 것도 발굴지역인 전 황복사터 일대가 7~10세기 신라 왕실사원으로 맥을 이었음을 보여준다. 연구원 쪽은 “낭산 일대를 중심으로 거대한 신라왕실 사원이 조성돼 그 옆 평지의 대찰 황룡사와 쌍벽을 이루며 경주 왕경의 경관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절터에서 확인된 건물이나 주변 도로터 등의 배치 구도를 감안할 때, 남산의 동쪽에 해당하는 현재 보문동 지역도 통일신라 시대 방리제(바둑판 모양으로 설계된 도시구역)가 실시된 계획도시란 것도 알 수 있게됐다”고 평가했다.

 

발굴현장에서 나온 건물터 주춧돌과 부재들.

 

 

낭산기슭의 전 황복사터 삼층석탑 앞에 펼쳐진 발굴현장. 푸른 포대로 덮힌 부분이 대형 기단 건물터와 회랑터다.

발굴이 진행된 구황동 낭산 기슭은 황복사터 삼층석탑이 있어 전 황복사터로 불리워온 곳이다. 황복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덕여왕 8년인 654년 의상대사가 출가한 절로, 1942년 황복사터 삼층석탑을 해체수리할 당시 나온 사리함에서 나온 명문을 통해 신라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한 왕실사원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탑 안에서는 국보인 금제여래입상과 금제여래좌상도 나왔는데, 신라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최고명품들로 꼽히고 있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