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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시의 현주소 / 김규화

가짜시인! 2016. 5. 12. 00:48

우리는 컴퓨터, 핸드폰, TV 등의 IT기기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생활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3차원의 현실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3차원의 현실 공간을 초월한(hyper) 고차원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이를 2의 현실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시는 당대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 시인의 오늘의 시가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2008년 봄, 타계한 오남구, 그리고 심상운, 내가 함께 전자 디지털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방법의 시를 쓰자고 합의하였다. 새로운 시의 명칭을 하이퍼텍스트시라고 하려다가 텍스트와 시는 같은 의미로서 중복이 되고, 또 사이버공간 안에서의 하이퍼텍스트시와도 같은 명칭이어서 우리는 그것들과 구분하기 위해 하이퍼시로 이름을 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전자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살리되 전자를 떠난 오직 종이 위에서 쓰는, 하이퍼텍스트성()이 있는 시를 쓰기로 한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란 말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hyper(건너편의, 초월과도한)text를 합성하여 만든 컴퓨터 및 인터넷 관련 용어로서 1965년 컴퓨터 개척자 넬슨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미국 브라운대 교수 P.란도도 그의 저서 <하이퍼텍스트>에서 하이퍼포엠이라는 말을 썼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텍스트에 그림이나 밑줄 친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연결되어 화면에 나오는데(그래서 하이퍼텍스트를 파상텍스트라고도 한다) 이렇게 다른 텍스트로 연결해주는 것을 하이퍼링크라 하고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쌍방향성 복수의 텍스트 전체가 하이퍼텍스트다. 일반 텍스트는 이용자의 필요나 사고의 흐름에는 상관없이 계속 일정한 정보를 순차적으로 쓰는 반면에 하이퍼텍스트는 이용자가 연상하는 순서에 따라 비순차적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 전자 상의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종이 하이퍼시에 어떻게 살려야 할까. 종이 위의 하이퍼시는, 컴퓨터 화면에서가 아니면 입력할 수 없는 그림, 소리, 동영상, 그래픽, 음악 등을 쓸 수 없는 대신 이들 요소를 언어로써만 표현해야 하는데, 물론 전자 하이퍼텍스트시에서 보이는 순차적 질서나 위계적 구조를 안 지킨, 혼란스럽기까지 한 비선형성어쩌면 인간의 사고 과정이나 의식의 흐름을 닮은과 그리고 수목(樹木)과 같은 논리적 체계가 아니라 감자 뿌리 같은 근경(根莖)처럼 사방으로 마구 이동하여 중심이 없는 그물 상태를 만들어내는 리좀(rhizome)성과, 그로 인한 일방향성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네트워크를 종이 하이퍼시에 도입하여야 한다. 하이퍼시를 이루는 마디(node단어, , )들은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존재하게 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무화하거나 초월(hyper)하여 무한한 상상공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야 한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의 창작 방법을 다음의 9가지 항목으로 요약하였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또는 사물)를 등장시킨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초월한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종이 하이퍼텍스트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발달된 컴퓨터기술의 특성을 종이 위의 문자면에서 살려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시 형태이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종이 하이퍼텍스트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고 심상운은 말하고 있다. 상상 혹은 공상의 확대로 인해 언어는, 기의가 아닌 기표로 흐르게 되고 기표는 소쉬르가 말한 시니피앙으로서 자연히 기존의 주제나 관념은 지워지게 된다. 아니 관념의 제로지대에서 시작한 하이퍼적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관념, 보다 신선한 사물과 정신이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하이퍼시의 주제라면 주제다.


2008년 봄부터 쓰기 시작한 하이퍼시는 기존의 3명의 동인으로 구성되었지만 그 중 한명은 병고에 시달렸고 사실상 2명의 시인으로는 동인 구성을 할 수 없어서 동인()의 울타리를 제치고 뜻이 있는 많은 시인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그리하여 하이퍼시 특집, 확산 하이퍼시 1,2,3, 새로운 시운동하이퍼시라 이름하여, 20명의 시인들이 도합 82편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시문학? 201011월호까지)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어서 그 중에서 2편만 언급해 보겠다.


잘 익은 부사를 깎는다

둥굴게 깎여나간 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이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굴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 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 등) 그리고 문장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


내가 깎아낸 부사 쟁반을,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송시월, 사과를 깎으며전문


이 시를 앞에 심상운이 말한 하이퍼시 창작 방법에 관련지어 보자. 사과 부사를 깎는 이미지와, 잘 깎여진 사과 껍질이 또아리를 트는 뱀 형상의 이미지, ‘부사라는 단어 검색의 이미지, ‘내 얼굴등의 이미지가 집합적 구현인 에 해당된다. 사과 부사에서 깎여나간 붉은 껍질은 의식 속에 잠재했던 꽃뱀으로 연관시키는(미끄러지는) 에 해당되고, 사과깎기, 꽃뱀, 부사(문장의 품사), 내 얼굴의 이미지는 다시점의 에 해당되고, 또아리를 트는 꽃뱀, 슬슬 기어다니는 꽃뱀은 ④⑤⑥, 시의 4연은 , 1연은 에 해당되겠다.


새는 공중에서 날지 않는다

새는 꿈을 좇아 꿈에서 날고 있다

그 어려운 주소

이룬 꿈은 보이지 않고

이루지 못한 꿈은 너덜너덜하다

너덜너덜한 옷감에는 때가 묻어 있다

헤진 꿈에서는 묵힌 빨래 냄새가 난다

묵힌 빨래에서는 새똥 냄새가 난다

새똥,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너덜너덜 헤진 채 나부끼면서

너덜너덜한 옷감은 쓰레기 썩는 내를 내면서

백주의 길 복판에서 쓰렉쓰렉 울고 다닌다

신진 (시문학 2010.11)에서


첫행과 둘째행은 상식을 깨뜨리는 과현실의 세계를 보여준다. “새는 꿈을 좇아 꿈에서 날고 있다는 둘째행은 가상의 현실이기는 하나 상상적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5행의 이루지 못한 꿈은 너덜너덜하다에서 꿈이라는 관념으로서의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와 그 꿈의 너덜너덜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상반되게 함으로써 이루지 못한 꿈을 더욱 참담하게 만들면서 계속하여 꿈을때묻은 옷감묵힌 빨래냄새새똥냄새쓰레기 썩는 냄새로 링크하여 너덜너덜이라는 형용사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꿈의 헤진 모습을 기표화 하고 있다. 또한 제11행에서의 쓰레기를 그 다음행에서 쓰렉쓰렉이라고 기표화 하여 역시 새의 날개 소리와 같이 쓰렉쓰렉꿈이 울고 다닌다고 말하였다. 하이퍼시에서 말하는 과현실과, 행에서 행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이미지의 링크에 따라 너덜너덜이나 쓰렉쓰렉의 기표의 사용이 흥미롭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 하여도 시작품으로서 형상화가 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형상화가 잘 된 작품일수록 독자와의 소통이 원활하다고 본다. 종이 하이퍼시는 전자 하이퍼시와는 달리 독자와의 참여가 불충분하여 호응을 얻기가 어려워진다. 하이퍼시는 기존의 해체시(포스트모더니즘의), 요즘 유행하는 미래시와의 변별성을 뚜렷이 해야겠다. 지난 세기의 이상(기호주의 시)이나 조향(초현실주의 시)과의 차별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다다이즘의 콜라주와 몽타주,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에서도 있었고, 상상 또는 공상으로의 시영역 확대,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의 이중구조 등은 초현실주의 시의 기법이기도 하다.


우선의 문제는 이제까지 발표한 2020의 소위 하이퍼시의 공통성을 찾아내어 그 범례의 시집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따른 시작법도 정석화 하여 다른 아방가르드시와의 대비에서 그 특징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특징을 명확히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생각으로는 모듈 이론이다. 앞에 든 심상운의 하이퍼시 창작 방법의 9가지 항목 중 항목에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기본으로 한다고 하는 이론에 부합되는 말인데, 그러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그것과 달리 하려면 가상공간(cyber space)과 인터넷 환경을 취급하되 강한 서사적인 이미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듈 이론의 모듈(module)이란 건축재료나 컴퓨터프로그래밍에서 사용하는 말로서, a)기준 치수, 기본 단위나 b)전자계산기우주선 따위의 교환 가능한 부분(단위)이라는 사전적 해석과 같이 하이퍼시에서 바꿀 수도, 따로 떼놓을 수도 있는 이미지나 연, 행 등의 단위를 이른다. 그러나 모듈이 모듈로서의 존재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다른 모듈과의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야 한 모듈이 자기의 의미 단위나 의미 특성을 비로소 드러내게 된다. 이 거리가 없고, 모듈로서의 존재성을 드러내지 못하면 하이퍼시의 의미가 없어진다. 심상운의 시 을 본다.


길이 1cm 쯤 될까 말까 한

배추벌레 한 마리가


퍼런 배추잎 위로

배밀이하며 올라가고 있다


자세히 보면

벌레가

지나온 흔적이 보일 듯하다


(배추잎에 붙어서 분비한듯)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분비물의 자국!


마추픽추의 무너진 벽돌계단 위에

노란 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다

-심상운 전문


여기에서 심상운(주체)과 마추픽추와의 거리, 배추벌레와 마추픽추와의 거리는 즉 모듈과 모듈의 거리라고 하겠다. 이 거리가 멀면 멀수록, 이질적이면 이질적일수록, 그리고 현실과 상상의 거리로 만들어줄수록 더욱 바람직하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예를 들어 등산용 모듈 찬기’(饌器 상품 이름)가 있다. 네모반듯한 정사각형의 적당한 크기의 플라스틱 그릇(frame)이 있고 그 안에 네 개의 작은 찬 그릇이 귀를 맞추어 들여 있다. 그 그릇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반찬이 들어가는 찬기이듯이, 그리하여 작은 찬기를 모은 한 개의 플라스틱 네모 그릇은 그대로 하나의 찬기의 구실을 한다. 한 개의 모듈은 하이퍼시에서 한 연이 될 수도 있고, 한 문장, 한 구절이 될 수도 있으며, 각자의 모듈은 그가 갖는 개체성이 크면 클수록 모듈 간의 의미(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 좋은 시가 될 것이다. 한 모듈(예를 들어 한 연)은 현실을, 또 한 모듈()은 사이버세계(환상공상의 세계, 가상의 세계), 또 한 모듈은 동영상의 이미지 혹은 무의식의 세계 등으로 각각 나누어 넣은 한 편의 하이퍼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리지는 이미지(비유)를 설명할 때 이질적인 사물의 폭력적인 결합이라야 좋은 비유, 좋은 시라고 했다. 물론 폭력적인 결합이라도 비유의 네 가지 요소에서 말하는 유사성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이퍼시도 각 연 간의, 혹은 행, 혹은 구절 간의 전혀 엉뚱한 이미지나 내용을 담더라도 모듈 찬기를 예로 든 큰 프레임 안에서는 반찬이라는 통합성이나 유사성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사성은 하이퍼시에서는 시인의 일관된 의식이나 중심된 초점이라 하겠고, 그것은 주로 시 제목에서 암시된다.


김규화 시인은 1966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원로 시인이다. 시집 관념여행』 『노래내기』 『평균서정』 『이상한 기도』 『망량이 그림자에게』 『멀어가는 가을』 『떠돌이배』 『초록징검다리등 여러 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김규화 시인은 동국대 문리대 국문과, 동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고교사와 대학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월간시문학발행인으로 1977년부터 지금까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문학을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시에 바쳤다.


날아가는 공은 하이퍼시 중에서도 소리기표의 흐름을 추적하여 독창적인 하이퍼시 기법으로 쓴 시다. 시집 시작노트에서 김규화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언어가 없는 시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언어의 두 요소 중의 하나인 시니피앙 즉 소리(청각영상)를 너무 홀대했던 것 같다. 과거의 내 시는 무거운 의미로 뒤덮였었다. 가령 고독, 불안, 생명 같은 관념 말이다나는 될 수만 있으면 모든 존재의 기표로 시를 쓰고 싶다.”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 시인과 함께 하이퍼시 창단 멤버로 활동하던 김규화 시인은 이 공로로 지난 2012년 제28회 펜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