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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가짜시인! 2011. 5. 12. 10:30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있다
빈 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 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로 말해질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겠다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 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다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 나절을 몇 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창비, 09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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