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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재 시집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파란, 2019)

가짜시인! 2019. 9. 24. 15:28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

석민재

파란시선 0041∣B6(128×208)∣130쪽∣2019년 9월 20일 발간∣정가 10,000원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즐겁고 위험한 감각의 착란


“시마(詩魔)라는 강력한 살(煞)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시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의 「시인의 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가 되지 않게 내가 되고 있을게요”. 미국의 현대미술가 제니 홀저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 줘”라고. 내가 되지 않게 내가 된다는 것.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 달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 내겠다는, 즉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의미한다고 본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들마저 부정하는 나의 상태를 유지하는 일. 내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가혹하게 검열하는 일. “아직 돌아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며/당분간 안쪽은 비워 두기로 하자”(「세모의 안쪽」). 가혹하리만큼 스스로를 부정해 가며 나를 비워 둔 나의 몸에 시가 머무른다.

시인의 몸은 이런 것이다. 그들이 마음껏 유희할 수 있는, 그들이 몇 번이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고, 그들을 잉태할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 되는 일. 그리고 이 시를 읽는 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시인에 의해 탄생한 특별한 빨강. 그 어떤 빨강보다 선명한 빨강. 이제는 이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온갖 감각에 모두 이를 수 있는 시인의 빨강을 말이다. 이것은 시라는 붉은 광기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의 광기는 불온하고 명랑한 빛깔을 지니고 있다. 이 시집을 읽은, 앞으로 읽을 자들이 경험할 즐겁고 위험한 감각의 착란을 위하여. 이미 읽는 것만으로도 온갖 감각에 모두 이를 수 있는 시의 언어가 탄생하기를 기대하며. 이 불온하고 명랑한 시인의 첫 시집이 무한히 축복받기를.”(이상 전영규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석민재 시인은 1975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2015년 <시와 사상>, 2017년 <세계일보>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는 석민재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추천사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 그렇다면 석민재는 석민재에게 불법체류자이다. 이단이다. 석민재와 석민재가 서로 ‘모조품’이라거나 ‘사기’와 ‘조작극’이라 인식하는 시그널들이 눈에 띄는 바, 잠든 사이에 ‘석민재’를 갖다 버리는 것도, “손가락에 반지”를 몰래 빼 버리는 것도, “내가 나를 자꾸 잠입”하는 것도 모두 석민재‘들’ 사이에 일어난 희비극이다. ‘자화상’인 동시에 ‘초상화’인 이 양측의 불화와 긴장을 들여다보거나 조정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여러 시편들은, 스스로 행방불명된 이름과 아주 멀리 도망친 황폐한 시공간인 ‘복수의 석민재들’을 공유하는데, 이 강제와 분열에 깊이 관여한 ‘히틀러’라는 세계는 지금 여기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 “꼬리를 자른다고/지나간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 “만성적 슬픔”들은 전설도 소문도 아닌 실재인데 그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의외로 심각하지 않다. “꾹꾹, 숨겨 놓은 내가 터져 나와 웃지요”. “아이만 많이 낳아 미안”한 시인은 때로는 스스로 가볍게 천대함으로써, 때로는 노골적으로 “랄, 랄, 랄” 웃으면서 간결하고 빠르게 ‘히틀러’를 가른다. 명랑하지만 유쾌하지 않고 속이 빈 듯하지만 들어 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꼬리가 꼬리를 무는” 가편들은 어느새 우리 옆구리에 총구를 들이댄다. 시인은 말한다. “나랑 같이 걸어 주실 수 있습니까”. 러시안룰렛처럼 “절벽 끝에서” ‘노는’ 이것이 우리가 쓴 복면의 실체를 드러내는 시인의 방식이라면, 그 총구를 “핥아 보고 싶은 걸 참느라 안간힘을” 쓸 마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박지웅(시인)




시인의 말


아무것도 안 하면 미칠 것 같아요


제발요


내가 되지 않게 내가 되고 있을게요




저자 약력


석민재

1975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2015년 <시와 사상>, 2017년 <세계일보>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를 썼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011 비의 기분
012 줄줄이 비엔나
014 어차피 나쁜 말만 했겠죠
016 계통
018 본의 아니게
020 귀문관살
022 셔터를 누를 때마다
024 저건 나폴레옹이야
026 빅풋
028 코뿔새가 태양의 심장을 찔렀을 때
030 흑백사진
032 못
033 춘곤
034 발아
036 요코하마
039 양귀비를 보다


제2부
045 돌의 감정
048 삼각김밥이 유통기한을 넘길 때
049 상상임신
050 그나마 이게 정의에 가까워요
054 마카로니웨스턴
056 액션
058 그녀는 말했고 우리는 웃었죠
060 스위치
062 오리는 가오리 옷을 입고
064 세계는 나중에 구하고
066 온다
068 이렇게 많은 기형은 처음입니다
070 이렇게 따뜻한 날인데도
071 다다익선
074 유야무야


제3부
079 비는 구두를 신고 온다
080 뼈 자르는 소리가 좋았다
082 세모의 안쪽
084 세븐
086 라이프 오브 파이
088 갈치, 여인
090 물메기
091 고등어
094 라스트 크리스마스
096 겨울 왕국
098 은하
100 쥐라도 물고 오든가
102 개 좀 빌려 줘 봐
103 로데오, 진주
106 데글라세 조리법
108 내 이름에 침을 뱉었다


113 해설 전영규 시인은 이단(異端)의 피를 지닌 빨강




시집 속의 시 세 편


계통


이건 빨강 네가 아무리 우겨도 빨강


파랑 같아도 이건 빨강


노랑 같아도 이건 빨강


오렌지 같아도 바나나 같아도 이건 빨강


지금 이게 빨강이라고요?


네 얼굴이 아무리 붉으락푸르락 해도 이건 빨강


나는 빨강이 싫어요! 그래도 너는 빨강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그래도 너는 빨강


노랗게 생리통이 와도


청바지에 검은색으로 슬쩍 비쳐도


나는 여자가 싫어요!


그래도 너는 빨강


이건 빨강, 정말 빨강! ***

 

 


코뿔새가 태양의 심장을 찔렀을 때

 


껍질째 감자를 볶으며 왼쪽 신장에 박혀 있는 일곱 개의 이빨을 만졌다 물을 자주 마실수록 이빨은 점점 더 아프게 물어뜯었다


부리가 심장을 향해 자라는 새가 있었다


더 이상 전설의 고향이 무섭지 않았을 때 우리는 할아버지가 붙여 준 일곱 난쟁이식 이름을 버렸고 내 몸엔 피 대신 바닷물이 흘렀다


이단(異端)이라고 불렀다
나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다녔다


겨울의 뼈가 태양의 왼쪽 옆구리를 하얗게 찔렀을 때 세상은 투석(透析) 중이었다


더 이상 부리로 먹이를 먹을 수가 없게 된 코뿔새가
심장을 쪼아 먹으며 죽었다


이갈이를 시작했을 때 갓난아이 잘 재우는 법과 형제들에게 총 겨누는 법을 동시에 가르쳤다


죽은 것은
코뿔새였을까, 정오의
심장이었을까


감자는 이빨이 박혔던 곳마다, 싹이라고 부르는 푸른 독을 틔웠다 ***


 

 

그나마 이게 정의에 가까워요


1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랑 똑같다고 했습니다


워낙 특이해서 바로 알아볼 수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포크를 꽂고 계속 돌리다가
입에 쑤셔 넣었는데


저만 그런 식으로 먹는 줄 알았는데


다 그렇게 먹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그걸 알고서 아주 많이
속이 상했습니다


2


난초를 좋아한대서 꽃 사러 갔었는데
다 시들시들해서
장미를 사 왔습니다


3


이해라는 말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팔을 물고
내가 나의 팔을 물어뜯고


4


얼마 전에 초경한 딸과
겨드랑이에 털이 난 아들이 앉아 있습니다


우리 개가 다른 개랑 싸움이 붙으면 떼어 내야 하는데
그게 무서워 산책을 하지 못합니다


5


제사상에서 사과가 굴러떨어졌습니다
우리 모두
약해질 때가 있잖아요, 하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6


당신은 시체 앞에서 연주합니다
나는 조용한 청중 앞에서 연주합니다
세상은 쉬지 않아요, 어머니


7


벽에 공을 던지는 느낌으로 말하다 보면
냉정해진다고 했습니다
모르는 건 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8


여성스럽잖아요, 하지만 여자는 아니고
남성스럽잖아요, 하지만 남자는 아니고
그래서
우리가 이토록 한 방에 잘 수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