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지명유래
■선도동
1986. 5. 1 서현동(서악동, 효현동)과 충효동, 광명동을 통합하여 仙桃洞이 되었으며, 4개 법정동별 연혁은 다음과 같다. - 西岳洞은 신라시대부터 西岳이라 불리었으며, 1895년 경주군 부내면 서악리, 1914. 4. 1 경주군 경주면 서악리, 1931. 4. 1 경주군 경주읍 서악리, 1955. 9. 1 경주시 서악동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음. - 孝峴洞은 신라시대부터 효현이라 불리었으며, 이후 연혁은 서악동과 동일함. - 忠孝洞은 조선시대에 松花村이라 불리었으며, 1914년 이후 연혁은 서악동과 동일 함. - 光明洞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갱빈(河川敷地)·괭미 등으로 불리다가 1914. 4. 1 경주군 서면 광명리, 1917. 10 경주군 경주면 광명리, 1931. 4. 1 경주군 경주읍 광명리, 1955. 9. 1 경주시 광명동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음.
■충효동 조선시대에는 松花村, 1914. 4. 1 面制실시로 忠孝里, 1955. 9. 1市制 실시로 忠孝洞이라 칭함 ○才洞마을: 기와를 굽고 대장간을 차렸다하여 재해골이라 하다가 고려시대에 청자를 구운후 재동이라함 ○下馬: 이마을에 아랫下馬와 윗下馬가 있었는데 아랫下馬에서 말에서 내 려 윗下馬까지 걸어 가야한다는 碑가 있어 마을이름을 下馬라함 ○彌 勒 동: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는 귀중한 彌勒佛像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짐 ○陵 南: 金庾信장군의 묘가 금산에 위치하고 興武王에 봉하므로 묘를 능이라 부르게 됨에 따라 능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하여 지어짐 ○也尺마을: 조선조 말기에 仙桃山줄기와 대문재 山사이의 山모양이 也字로 생겼다하여 부르게됨
■서악동 ○陵南마을: 태종무열왕능이 있는 산 능선 너머에 있다고 해서 붙여짐 ○路下마을: 신라때 능남과 소티고개를 연결하는 작은길이 었는데 그길은 고을 원님들만 다니는 길이었다고하며 그길아래에 생긴 마을이라하여 붙여짐 ○장매마을: 선도산 줄기가 길게 내려온 산줄기 모양이 노루꼬리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효현동 ○소티.소태: 마을의 뒷산이 소가 누운 형상이라하여 불렀다고하나, 고대삼한 이래 제사장인 천군이 주관하는 祭祀地域인 蘇塗에서 유래하는 마을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외외.외와: 옛날에 기와를 구웠다하여 마을이름을 기와 瓦자를 써서 와와라 고 한 것을 간단하게 외외라 부름
■광명동 ○괭미.광명: 이마을부근에 봉화봉이라는 산이 있어 光明이라 불렀다가 조선시 대부터 이곳이 갱빈(하천부지)라서 괭미라고도 하다가 일제시대에 광명이라 개칭했다 한다 ○고 란: 신라 이전에 이부락의 땅은 강이었으며 지금의 고란 서편 둑에 난초가 많았다고하여 붙여짐 ○새각단.新里: 이마을은 본래 개룡사밑에 있었는데 1910년경 이곳으로 옮겨 이룩된 동리라하여 신리라 이름이 붙었다 ○화 절: 신라때 이곳이 꽃이 많아 사람들이 꽃놀이를 즐기고 꽃을 꺾어가 기도하여 이름을 花折이라 부름
■보덕동
보덕동은 동쪽으로는 양북면과 포항의 장기면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월성동, 남쪽으로는 불국동, 북쪽으로는 천북면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7개의 법정동과 12개의 행정통 41개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구는 2,318명(2003년 10월 31일 현재)이며 면적은 80.94㎢이다. 매년 540여 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보문관광단지를 포함하고 있어 가히 「관광경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경주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종합휴양지 조성을 목적으로 개발된 보문관광단지는 전지역 이 온천지구 및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있고 한국관광산업의 1번지로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 수준의 종합관광 휴양단지입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및 『한국의 술과 떡잔치』를 보문관광단지에서 격년제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경주세계 문화엑스포는 1998년과 2000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전국민의 세계 각 지역의 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1999년에 이어 2001년에 개최하는 한국의 술과 떡 잔치는 중국, 일본등에서도 참가하여 '세계의 술과 떡잔치'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매년 4월초 보문단지 및 경주지역에 만개하는 1만여 그루의 벚꽃을 배경으로 동아국제마라 톤대회가 개최되고 있어 국내는 물론 일본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경주의 벚나무는 1967년부터 심기시작하여 이제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어 진해의 벚나무들 에 비하여 '싱싱하고 젊어 아름답다'고들 말한다. 보문호와 덕동댐을 거쳐 감포로가는 24번국도는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활엽수의 수려한 단풍으로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천군동 지역여건 보문호의 남쪽에 접해 있는데 동으로는 양장산의 도투락 목장이 솟아 있고 서로는 명활산이 둘러쳐친 평지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길게 골짜기로 들어가며 이루어진 남소북대의 지형으로 된 부채꼴 모양의 동이다. 유 래 천군(千軍) - 조선초기 마을의 내(川)가 활(弓)과 같이 생겼다 하여 川弓이라 칭했다 한다. 新羅 20代 慈悲王(458~479)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명활산성에 약 천명 의 군사가 주둔하여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성에 올라가 나라를 지킨곳이라 하여 千軍이라 한다. 본래 이름이었다는 川弓은 1913년경 일제 시대 천궁과 그음이 동일하다 하여 동명으로 적합하지 않다며 비슷한 千軍으로 개정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이 軍 자가 마을명에 좋지 않다고 여러차례 반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만약 일인들이 川弓을 千軍으로 개칭하였다면 일본의 적을 치기위해 신라때 군사가 주둔했다는 千軍을 썼을리 없다. 그렇다면 川弓과 千軍은 유이음이니 1914년까지 川弓에 가까운 발음으로 불리어오던 것을 千軍이라 했지 않을까?
피막(避幕) - 피막못의 안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며 서로 산을 넘으면 동방동이 된다. 이 곳은 안동권씨가 임진왜란때 피난와서 막을치고 살았다 하여 부쳐진 이름이 다. 유이음으로 필막 또는 필막골이라고도 한다.
청단(靑丹)마을 - 천군동의 북편 서쪽 명활산 아래있는 마을로 신라시대 숲속에 자리하고 있어 푸른마을이라는 뜻에서 靑丹이라 불렀다 한다.
강변마을 - 현재 경주월드 남편 길가의 마을로 신평천의 가에 자리하여 강변마을이라 한다. 현재는 경주월드와 보문관광단지 주차장에 편입되고 길 남편으로 수 가구가 있어서 식당등을 경영하고 있다.
천군 큰마을 - 피막골 입구와 구 동사무소가 있는 마을로 천군동에서 가장 많은 가구가 모여 살아서 큰마을 이라 한다. 서쪽에 청단마을과의 중간 지점에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 있다.
새마을 - 천군 마을에서 남쪽인 위쪽으로 들어가면 하천을 따라 동편으로 신축가옥으로 된 마을이 곧 새마을이며 근녀의 새마을 사업으로 취락구조가 개선되어 골기와 한옥으로 새단장되었다 해서 칭해진 이름이다.
하리(下里) - 새마을의 위쪽 마을로 아동을 중심으로 골짜기의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란 데서 따온 이름이다.
아동(牙洞) - 대덕산 서쪽, 형제봉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종전에 천군 1동으로 있던 지역이다. 약 300년전 김해김씨 김여양이 김해김씨의 김백진이 역적으로 몰려 김해김씨가 수난을 당할 때 고향을 등지고 피신하여 헤매이다 정착한 곳으로 마을의 둘레에 감싼 산세가 어금니처럼 생겼다하여 아동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리(上里) - 아동 윗마을 이라고도 하며 마을의 위쪽에 있다 하여 上里라 한다. 이곳에는 豊登地가 있어서 이 물로 농사를 짓고 있다.
특 성 동 제 (洞祭) - 천군동 큰마을에서는 당수나무 밑에서 매년 음력 9월 9일과 3월 3일 두차례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를 엄수해 오다가 요즈음은 3월 3일 한 차례만 지내고 있다. 제주는 마을 어른중 귀감이 되는 분을 택하고 있다.
전적지(戰跡址) - 명활산성은 신라시대 서쪽의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과 더불어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성으로 동쪽의 최후 보루였다. 이곳과 북군의 병사를 배치하고 지금의 보문지의 협곡에 침입하는 왜병을 무찔렀다.
보호수(保護樹) - 천군동 676번지의 느티나무가 시보호수 11-2-4로 지정되어 있다.수령500여년이 되는 이나무는 높이 20M 둘레 5.8M되며, 이곳에서 洞祭를 모시고 있다.
■신평동 지역여건 명활산의 옛 성터 아래에 길게누운 보문호의 1.62㎢의 넓은 호숫가에 위치한 마을로 북 으로는 손곡동과 접하고 동으로는 덕동호 서편의 해발 256m의 낮은 산이 감싸고 있으며, 남으로는 신평천을 경계로 천군동과 접해있다. 유 래 신평천의 지류호 1963년 9월 18일 보문호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황용.덕동에서 시작된 많은 물이 흘렀던 계곡이었다. 골짜기 북편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섶들, 즉 숲이 있는 들이란 지명으로 내려왔는데 천군동과 더불어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듯 하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때 경주군 천북면 천군리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신평리로 칭하다가 1955년 9월 1일 시제실시에 따라 신평동으로 고쳐 불렀다. 그후 1975년 10월 1일 천군동으로 편입되어 운영되었다.
섶들 - 마을앞 냇가에 울창한 숲이 있어서 숲이 들처럼 펼쳐졌다 하여 숲의 이곳 방언인 섶을 써서 섶들이라 하다가 1914년 일제시대때 동명을 한자화 할때 薪坪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그리 부르고 있다.
특 성 1970년대 후반에 조성된 보문호수 48만평 주위의 보문관광단지는 밝고 깨끗한 주변환경과 아름다운 조경은 다양한 관광편의 시설로서 국내외의 관광객을 맞고 있다. 호숫가에 마련된 산책로가 이색적이며 각종 체육시설이 있어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현재는 빼어난 지형과 보문호를 중심으로 보문관광단지가 들어서서 경주를 찾는 국내외의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북군동 지역여건 보문호의 서북쪽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길게 골짜기를 이루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동으로는 작은 구릉으로 보문관광단지와 접하고 북동으로는 경주시 물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으로는 멀리 덕산의 산줄기가 뻗어 북동까지 감싸고 있고 서로는 소금산의 북쪽산이 280여미터 높이로 막아섰으며 남으로는 보문호에서 시작되는 북천이 가로 흐르는데 그너머 명활산이 장중하게 우뚝 솟아 있다. 마을은 앞부분인 보문로변에 신택지를 마련하여 많이 거주하며 마을 북서편 골짜기엔 북군지가 있다. 유 래 수도의 중심부와 그리 멀지 않으며 신라때 마을 남쪽의 명활산성에 천여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협곡을 경계로 북쪽에 군사들이 주둔하였기로 지명이 북군이라 하는데 이로 미루어 그당시 촌락이 형성되지 않을까 한다. 1914년 4월 1일 면제실시때 경주군 천북면 북군리로 편제되었다가 1955년 9월 1일 경주시가 분리될 때 월성군 천북면 북군리로 되었으며 1975년 10월 1일 경주시로 편입되어 천군동에 속해서 운영되었다. 1986년 5월 1일 천군동이 인근의 암곡동,덕황동,정래동 일부와 더불어 보덕동이 되면서 현재 행정동인 보덕동에 속해서 운영되고 있다.
북군(北軍) - 신라시대 왜병을 막기위해 명활산성과 남북으로 대치하여 군사를 주둔시켰기로 북쪽에 있는 군사란 뜻으로 북군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북(上北) - 마을의 제일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으로 상북군의 준말이 상북이라 칭하고 있다.
중리(중리) - 마을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상북과 하북의 사이여서 중간마을이란 뜻이다.
하북(하북) - 맨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제일 아래쪽이기에 하북이라 한다.
강당골 - 옛날 청년들이 나무길에서 창을 쳐서 내기를 한 곳이라 한다
동령골 - 마을 동편에 고개가 있다하여 그 서쪽 골을 동령골이라 한다.
잠매산 - 옛날에 안개가 자주낀다 하여 잠매산이라 한다.
특 성 전적지(戰跡址)는 마을앞의 북천지역은 신라시대에 협곡을 이루는 장소로 명활산성과 이곳 북군에서 군사가 주둔하면서 동해로 침입하여 수도로 침입하던 왜병을 물리치던 장소이다.
■손곡동 지역여건 북으로는 경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동북으로는 해발 240m의 산이 온화하게 감싸안은 이 곳은 보문관광단지의 골프장과 경주시의 물천리와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산을 경계로 암곡동과 접해있어 동,남,북쪽이 산과 언덕으로 가려있고 서쪽과 서북쪽으로 골짜기를 이루며 트인 지형에 위치해 있다. 보문관광단지 동편 암곡으로 가는 어귀에서 시작된 폭10여 미터의 비포장 도로가 골프장을 끼고 돌아 마을앞을 지나 물천,동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 래 연정이 있는 동쪽 산기슭에 절터가 있었고 석재가 수습된 것으로 미루어 신라때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조시대 말엽인 지금부터 약300년전 손의일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할 때 풀이 많이 우거져 있다하여 자기의 성과 풀초(草)자를 연결시켜 孫室이라 칭했다 하기도 하고 풀이 많아서 풀손(蓀)자를 써서 손실이라고 했다고 한다. 1914년 면제실시로 손곡리로 개편되고 1955년 9월1일 시제실시때 월성군 천북면 손곡리로 있다가 1975년 10월1일 경주시로 편입되어 천군동으로 운영되었다. 덕황동으로 통합되었다가 1986년 5월 1일부터 보덕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손실 - 임진왜란때 피난하여 우거진 수목을 가리개로 삼고 최씨,박씨,고씨 세 성씨가 수목을 많이 키웠다 하여 풀많은 마을이란 뜻의 손실로 불리어지다가 나중에 손곡으로 칭했다.
연정 - 연지라고 도 하는데 조선숙종때 최지덕이라는 사람이 부친의 산소를 따란 이곳에 와서 제자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는데 서당과 정자앞에 연못을 만들었는데서 지명이 시작되었으며 아직도 연꽃이 살아있다.
특 성 동제는 본래 갓안이라는 곳에 노송이 있어 예부터 마을의 재앙을 없애기 위해 지냈는데 지금은 마을 입구에서 정월 보름을 기하여 통장이 주축하여 흉일을 입지않는 깨끗한 사람을 선정하여 제관으로 삼아 동의 안녕을 빌고 있다.
■덕동 지역여건 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길에서 암곡동으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1977년 덕동호가 준공되면서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고 현재 호의 동쪽 가장자리 산 중턱에 20여 가구만 살고 있다. 덕동호가 약간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기울어 길게 남북으로 활처럼 동쪽의 산들을 감싸 안았고 그 가장자리인 동쪽의 기슭에 덕동교에서 암곡으로 들어가는 호안로의 길가에 마을이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다 해발 200여미터나 되는 이곳은 동쪽은 600여미터가 넘는 가파른 황용산이 남북으로 길게 암곡까지 뻗쳐있다. 이 지류인 괘정산이 500여미터로 깍아 세운 듯이 북쪽에 잇어서 암곡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산너머의 황용동과 산을 기점으로 나뉘어 있다. 서로는 호수 건너 낮은 약260m의 괘정산을 두고 신평동과 경계를 이룬다. 남쪽은 길게 호수가 끝나는 부분에서 촛대처럼 세운듯한 만호봉이 뾰족히 솟아 있다. 유 래 조선시대 중엽까지는 덕동과 암곡이 한 마을이었는데 그 후에 마을이 커지면서 분리되었다.이곳은 현재 수몰된 곳인 종전의 암곡마을에 고선사지탐이 있었고 신라시대 왕이 동해로 납시던 길목에 위치하는 관계로 신라가 통일되기 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고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1914년 4월 1일 면제실시에 의해 내동면 덕동리라 칭하다가 1955년 9월 1일 시제실시때 내동면 전성이 시로 편입됨에따라 경주시 덕동으로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법정동인 황용동과 더불어 덕황동으로 통합되어 운영되었다 1977년 5월 31일 마을어귀의 신평동과의 경계지점에 남북으로 댐이 막아지면서 대부분이 수몰되고 현재의 가구만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1986년 5월 1일 인근의 천군동, 암곡동과 더불어 보덕동으로 통폐합 되어 운영되고 있다.
덕골 - 덕동을 일컫는 말이며, 마을의 통칭이되고 있다. 이곳의 마을 사람들이 마음이 착하고 인심이 좋아 덕을 이룰 수 있는 고장이라는 뜻에서 덕골이라 불렀다 한다. 처음 엔 암곡 한 마을이었으나 규모가 커지면서 분리되었고 덕동이라고 요즈음은 칭하고 있다.
명실(明室) - 조선 중엽의 화봉괘정산 촛대와 같은 산에 불을 놓으면 괘등산 후면은 어두워 암곡이라 하고 전면은 밝아 명실이라 했다고 한다.
유리방 - 마을의 제일 남쪽에 위치하며 신라시대 유리보석을 캤다는 이야기와 혹은 유리를 구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로 인하여 유리방이라 칭한다. 아마도 유리방이란 지명은 마을 남편에 우뚝솟은 만호봉(470m)이 화산으로 이곳엔 화산재와 용암의 기포로 형성된 거품돌과 더불어 소금같은 작은 수정체가 붙은 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이것을 채집하는 마을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황용동 지리요건 경주시의 동중에서 가장 험준에 산골에 위치하고 있는 황용동은 경주에서 감포간 국도주변과 남북으로 길게 두 골짜기를 타고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해발 400여미터의 백두산 줄기 경주시와 경계지점인 추령의 서쪽에 해당된다. 시부 거리는 덕동호가 끝나는 지점에 있고 사시목은 서에 해발 650여미터 되는 동대봉산이 있어 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다시 산을 하나두고 동쪽으로 국도를 따라 모차골에 다르고 계곡을 따라 몇군데의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유 래 신라때 文武王이 동해로 오갈 때 이쪽을 이용했고 보면 그 당시는 적어도 길이 나 있었고 사람들의 거주내지는 왕래가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와서 경주시 구황동의 황용사와 다른 황용사가 있어서 황용이라 칭했다고 한다. 1914년 4월 1일 면제실시때 경주군 내동면 황용리로 되었고 1955년 9월 1일 시제실시에 의해 황용동이라 칭해 법정동화했으며, 1973년 7월 1일 덕동과 함께 덕황동으로 운영되었다. 1986년 5월 1일 천군동,암곡동과 더불어 보덕동으로 개편되어 오늘날 이르고 있다.
황용 -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신라시대 큰 사찰인 황용사와 동명의 다른 절이 이곳에 있었 다고 해서 조선시대 들어와서 황용이라 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新羅 30代 文武王이 동해에 왜구가 침입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탄식하며 귀로에 현재의 토함산 중턱에서 휴식하면서 산천을 관망하니 단풍이 황색으로 물든 절경과 산세가 용의 머리 같이 생겼다 하여 즉석에서 황용이라 칭했다 한다.
시부거리 - 마을의 맨 서쪽이며 경주에서 처음에 해당되며 오천정씨가 약 200년전에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곳에 진흙 구덩이가 있어서 이항이라 하다가 시부걸이라 개칭했다 한다. 현재 이 마을의 앞에 논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이 커다란 늪지대로서 이곳 방언으로 늪의 진흙땅을 시북이라 하고 구덩이를 구디라 하므로 시북구디라 칭하 다가 시북이 있는 거리란 뜻의 시북걸, 시북거리에서 그 유이음으로 와전되어 시부거리라 칭해지는 것이다.
사시목 - 獅時目이라 적고 있는 이 마을은 황용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신라시대 표충사 앞의 산이 사자목과 비슷하다고 하여 사시목이라 칭했다는 설과 옛날 이곳에 사슴이 많이 살아 사냥꾼들이 사냥을 할때 여기서 지키고 있다가 사슴을 잡는 길목이라 해서 사시목이라 하는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가내동(觀海東.楸院) - 신라시대 동해로 이곳을 거쳐 재를 넘었는데 그 산세가 너무 험하므로 1일 왕래가 불가능하므로 조정에서 院을 짓고 관리와 행인들이 숙식하고 다니게 했다고 해서 추원이라고 한다.
모차골(毛車谷) - 신라시대 왕의 수레인 마차가 이곳으로 다녔다고 해서 마차곡이었는데 세 월이 흐르면서 모차골로 발음되고 있다.
참나무정(참나무징이) - 옛날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참나무 숲이 빽빽이 우거져 있었다 하여 참나무가 있는 곳이란 뜻의 참나무징이로 불렀다 한다. 한자로 표기하여 眞木亭이라고도 한다.
절골(寺谷) -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건립한 큰 절이 있었으며 암자가 20여개소나 있었다 하여 절골이라 칭한다. 특 성동제는 2개 자연부락에서 지내는데 사시목에서는 원래 섣달 보름과 정월 보름날에 지냈는데 요즈음은 음력 6월 보름에 지내고 있다.
■암곡동 지역여건 동에는 해발 664m의 황용산이 자리잡고 서로는 334m의 왕산이 길게 북으로 누워 서쪽의 손곡동과 천북면,물천리,갈곡리,성지리와 경계를 이루고 동북으로는 대송면,오천읍과 맞닿아 있고 남으로 덕동호와 덕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남북으로 길게 골짜기를 이루며 내(川)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에는 맑고 깨끗한 냇물이 흘러 경주시의 식수원인 덕동호로 흘러들고 있는 조용하고 수려한 산들에 묻힌 아름다운 마을이다. 유 래 마을 남쪽 어귀였던 현재 덕동호 수몰지구안에 신라시대의 高仙寺址가 있었고 마을의 제일 안쪽에 무장사지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신라통일전후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았고 이때에 마을이 열리지 않았을까 한다. 조선초기에는 명곡이라 하다가 조선말엽에 암곡이라 하였다 한다. 1914년 4월 1일 면제실시에 의해 내동면 암곡리라 칭하다가 1955년 9월 1일 시제실시때 경주시 암곡동이라 칭했다. 1986년 5월 1일 덩황동과 더불어 천군동에 편입되어 운영되다가 보덕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암실 - 원래 깊은 산골짜기의 안쪽이라 어두운 마을이란 뜻에서 암실 또는 암곡으로 불리어 왔다.
왕생이 - 왕산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 왕이 난을 피하여 왕산 동편에서 피난중 왕세자가 탄생하였다 하며 왕이 피난하였다 하여 왕생이 또는 왕산이라 한다.
가와골 - 처음에 池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덕동호의 맨 북편에 처음있는 마을이며 마을명은 제골 또는 가와골,와동으로 불리며 이곳에 기와를 굽던 와요지가 있었기에 기와굴에서 와전되어 그렇게 부르고 있다.
계정 - 마을은 와동 동편 덕동호가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서편에 정각이 있고 그우편의 괴석에 계정이라 새겨져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계정이라 하며 1976년 덕동댐이 만들어 지면서 마을이 수중에 들어가서 산위로 마을을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음달말 - 왕산동편의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로 음지에 해당되어 음달마을의 줄임말로써 음달말이라 한다.
시랫골 - 풍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의 지형이 떡을 찌는 시루형국이라하여 시루골이라 한다가 유이음인 시랫골로 바뀌었다.
▶특 성 동제는 해방전까지는 매년 12월 그믐날에 동제를 지냈으나 요즘 매년 음력 보름날 새벽 0시를 기해 마을 입구에 있는 당숲에서 동제가 엄수된다.
■감포읍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6촌중 금산가리촌에 속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현종때 장기현에 포함되어 경주속현이 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경주군 동해면이 되었다가 장기군에 편입되었고 일제시대에 장기군의 폐지에 따라 경주군 양북면에 편입되었다가 양북면에서 분리되어 1937년 감포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경주시제의 실시로 군명칭이 월성군으로 개정됨에 따라 월성군에 소속되었다가 경주군으로 명칭이 바뀜에 따라 경주군에 속했다가 경주시군 통합으로 경주시에 속함.
감포라는 명칭은 지형이 甘자 모양으로 생겼고 또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가 음이 축약되어 감포라고 칭하게 되었음.
동해남부의 어업전진 기지로 9개 법정리, 20개 행정리, 111개반으로 구성되어있고 52개 자연부락이 있다.
31번 국도 남쪽 32㎞ 지점에 울산광역시가 있으며, 북으로는 32㎞ 지점에 포항시가, 4번국도의 서쪽으로는 경주시 보문관광 단지가 있으며 전촌ㆍ나정ㆍ오류 해수욕장과 횟집으로 유명함.
○ 감포리 본래 장기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감포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감포리와 전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감포리로 하였음.
○ 오류리 본래 장기군 내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오류, 연동, 척사리를 병합하여 오류리라 하였음.
○ 전동리 본래 장기군 내남면 지역으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전골, 전동이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전동리로 하였음.
○ 전촌리 본래 장기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전촌, 장진, 법동을 병합하여 전촌리라 하였다.
○ 호동리 본래 장기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호동리라 하였음.
○ 노동리 본래 장기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노씨가 많이 산다하여 놋골, 넷골, 닛골 또는 노동, 노당, 사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노동리로 하였음.
○ 팔조리 본래 장기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팔조, 매곡, 무제를 병하여 팔조리로 하였음.
○ 나정리 본래 장기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고라리와 상정리를 병합하여 나정리로 복원하였음.
○ 대본리 본래 장기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대본, 가곡을 병합하여 대본리로 하였음.
■양남면
▶연혁 ○ 신라6부시대 : 금산가리촌 ○ 고려(서기 987년) : 성종3년 삼경의 하나인 동경에 속함 ○ 조선(서기1413년) : 태종13년 경주부에 래속 ○ 서기 1895년 : 경부군 동해면으로 개칭 ○ 서기 1906년 : 경주군 지역편성시 장기군 양남면으로 개칭 ○ 서기 1914년 : 군부 통폐합에 따라 경주군에 귀속 ○ 서기 1955년9월1일 : 경주시제 실시에 따라 월성군 양남면 으로 개칭 ○ 서기 1987년1월1일 : 양북면 봉길리 일부(월성원전부지) 양남면 편입 ○ 서기 1989년1월일 : 법률 제 4050호로 월성군을 경주군으로 개칭 ○ 서기 1995년1월1일 : 법률 제 4774호로 도농복합형태의 경주시 양남면으로 개칭 ○ 경주시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동해(해안선 11.5km), 남은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 서는 외동읍, 북은 양북면에 접하고 있음 ○ 북서간에 동대산령이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며, 동으로는 하천변에 농경지가 산재되어있으며, 주로 임야가 79%를 차지하고 있음 ○ 지질은 주로 사질양토로서 주식작물 재배 적지임 ○ 하천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하므로 지하수가 부족한 편임
▶유래 ○ 하서(下西)리 마을의 자연환경 하서는 남은 수렴,북은 환서,동은 바다,서는 신서로 동해해변가의 온화한 기온에 옥토를 가진 농어업 겸업의 환경좋은 마을이다. 하서리는 애일.월아.오곡. 망정.진리.후리 등 7개이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1리,2리,3리,4리로서 신라때 부터 살던 육부촌중의 금산가리촌의 촌하서지 이다.
마을의 역사 하서리(下西里): 면소재지이며 농상권의 중심지이다 신라육부촌의 하나인 금산가리촌의 촌장인 00가 입주개척한 후 하서지라 칭해오다가 조선시대에는 경주부, 1895년 경주군 동해면에, 1914년 부군통폐합시엔 경주군 양남면 하서리, 1955년 월성군에 영속되어, 1989년경주군 양남면 하서리로 환원 되었다가 1995년 1월1일 법률제4774호로 도농복합형태의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로 개칭 됨. 애일(愛日): 하루종일 햇볕이 비치는 곳이라하여 애일리라 함. 월아(月牙): 마을 向背의 形谷이 초승달과 같다 하여 월아라 함. 오곡(梧谷): 오동나무가 많이 있었다하여 오곡이라 불림. 망정(望亭): 槐木나무의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그래서 그리워하는 의미에서 망정이라 부르게 됨. 진리(津里): 신라 눌지왕때 충신박제상이 왕명으로 왕자를 구하러 일본국으로 떠날 때 여기서 출범했다하여 票里라 해오다가 진리로 개칭 함. 후리(後里): 진리마을 또 뒷마을이라 하여 후리라 부르고 있다.
○ 환서(環西)리 마을의 자연환경 환서리는 남이 하서, 북이 나산, 서북이 기구리이고 동은 석읍 으로 동해안 지대로 일반영농과 함께 축산도 하고 있는 마을이다. 현재 전방, 송정, 구만 3개부락에 1리.2리로 형성되어 있는 토질좋은 곳이다.
마을의 역사 환서리(環西里): 1914년 부군통폐합 당시에 그 동네주위가 고리같다하여 고리환자 環西리가 되었다 하며 또는 옛날 김씨 노인이 입주정착 할 당시에 밭이 많은 곳이라 하여 전방 또는 화살전자 箭坊으로도 호칭 하였다. 전방(箭坊): 밭이 많은 곳이라하기도 하며 화살전자 전방이라고도 함. 송정(松亭): 소나무의 정자가 좋다하여 그이름을 따서 松亭이라 함. 구만(九万) : 약 400년전 윤씨가 개척한 후에 九万石이나하는 거부가 생겼다하여 九万里라 부르게 되었으며 역시 앞 평야들이 비옥한 점을 보아 개정자라고도 한다
마을의 전설 이내봉(里內峰): 이내봉에는 묘를쓰면 마을주민에게 큰 화가나서 동네가 문을 닫는다 하여 그 후손도 금한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마을산에 주민들몰래 묘를 쓴 구만석하던 거부가 화를 당하자 이장하였다는 말이 전해 지고 있다.
○ 수렴(水念)리 마을의 자연환경 수렴리는 경주의 최동남해안의 울산강 동면에 인접한 해변의 동해 마을이다. 서는 환서, 북은 하서리와 접하며 해안바위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배동향의 마을이라 관광촌이 대부분으로 수영포, 관성, 영암리, 지경리,등 4개리로 형성되고 1리.2리로 구분되었다. 어업이 주업이나 농경지가 좋아 농사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옛날 왜적의 침입이 많은 곳이라 성질이 강하여 성공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마을의 역사 임진왜란때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수병의 병영을 가졌던 곳이라하여 수영포리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리명을 수렴리 라 하였다. 관성(觀星): 옛날 시계가 없을때에 별을 보고 시간을 측정하는 첨성대같은 것이 있었다하여 관성 이라함. 영암(靈岩): 바위에 매년 무사고 제를 올린다 하여 영암인데 3년마다 별신굿도 한다. 지경(地境): 경상북도의 지경이라 하여 지경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굼바위. 그무바위 등의 주위의 바위를 이용하여 미역,전복 등의 양식업을 하고 있다.
○ 신서(新西)리 마을의 자연환경 신서리는 북에 대성광산, 남에 수렴리 그리고 서에 상계로 경계하고 동남해안에 위치한 광산마을로 자연환경이 좋은 마을이다. 범실,섬안,다곡,지수곡.고평,억수하리 6개마을이 형성되어 신서리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역사 1914년 부군통폐합시 행정리명이 신서리로 부르게 되었다 범실(凡室): 지형이 凡자라 하여 범실이다 섬안(島內): 옛날 주위가 하천이라 섬마을이다 신서 중심 마을이다 다곡(多谷): 마을 형곡이 多자형이어서 다곡이라 한다 지영곡(池永谷 : 옛날에는 기름이 났다하여 지름골이 池永谷이 되었다 고평(高坪): 높고 평평하여 고평이라 하였다 억수(億樹): 옛날 마을뒷산에 나무가 무성하여 億樹라 칭하였다
○ 서동(瑞洞)리 마을의 자연환경 서동리는 남쪽이 울산 강동면에 인접하고 북쪽은 신서리이고 서쪽은 상계리에 동쪽은 수렴리로 자연환경이 좋아 농촌으로서의 경치가 좋은 곳이다.
마을의 역사 장기군 양남면의 지역으로 서동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서동리라 하고 경주시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신라시대부터 서부상측에 위치하였다하여 웃서라고 하였고 또 서쪽 1.5km 지점에 관문성이 개축되어 있어 전시에는 군인들이 적을 방어하고, 평상시에는 군인들이 부락에 와서 영농을 하였다하여 屯田里라고 하여 오던중 1914년 부군통폐합시에 瑞里로 되어 지금까지 오고 있다.
마을의 유적 안산 - 서동마을 앞에 있는 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여인이 빨래를 하러 가다가 이산이 동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산도 걸어갈수 있느냐?"고 하자 산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마을의 지명 ▶ 고짓골 - 서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 광징이고개 - 광징이에 있는 고개로 광징이에서 울산광역시 강동동 신명리 로 넘어간다. ▶ 광징이 - 서동 남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 ▶ 당미기 - 서낭당이 있던 고개로 진등 남쪽에 있다 ▶ 덕골 - 과목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 못골 - 못이 있는 골짜기로 서동 서남쪽에 있다 ▶ 어구절골 - 어귀사라는 절이 있던 골짜기로 꽁꼬불 동남쪽에 있다 ▶ 절골 - 절이 있던 골짜기로 광징이 동쪽에 있다 ▶ 진등 - 못골 서남쪽에 있는 등성이 ▶ 피낫골 - 덕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상계(上溪)리 마을의 자연환경 상계리는 남은 서동, 북은 기구리, 동은 신서리, 서는 신대리와 접하고 있다. 대하천이 중심지로 흐르고 있어 영농의 적지이다. 특히 울산 강동면 지경에 화림, 양지, 서왕 3개 마을이 형성되어 상계리가 되었다.
마을의 역사 장기군 양남면의 지역으로, 위쪽 개울가가 되므로 상계. 상대라 불렀다. 1914년 부군통폐합시에 행정리명이 상계로 되어 화림,양지,서왕등이 상계리에 속하며 경주군 양남면에 편입 되었다. 화림(花林): 뒷산 이름이 화봉이고 마을앞 숲이 울창하여 화림이라 한다. 서왕(西王): 원래 昔씨 왕릉이 있어 昔王里 인데 마을이름에 그 왕명을 칭하는 것은 곤란하다하여 서왕리로 변하였다 양지(陽地): 해가 떠서 질때까지 마을에 햇빛이 오래 있다하여 陽地라 한다.
을의 유적 청수폭포 - 너비 2m, 높이 약20m의 폭포로 청숫골에 있다. 피부병에 좋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맏이를 하러 온다.
마을의 지명 ▶ 가리의골 - 맷돌배미 밑에 있어 가루가 된다는 뜻을 땄다고 하는 골짜기로 청숫골 남쪽에 있다. ▶ 꼬약나뭇골 - 꼬약나무(고염나무)가 있는 골자기. 밭무지기 동남쪽에 있다. ▶ 뒷골 - 맷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불멧골 - 불멧간(풀뭇간)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청숫골 남쪽에 있다. ▶ 숙재내골 - 쑥이 많다고 하는 골짜기로 술방골 남쪽에 있다. ▶ 지통골 - 한지를 뜨는 지통이 있던 골짜기로 청수폭포 서쪽에 있다. ▶ 청숫골 - 청수폭포가 있는 골짜기로 서왕리 서쪽에 있다.
신대(新垈)리 마을의 자연환경 신대리는 서쪽 삼태봉에 동으로는 상계리이며 남은 울산 농소 그리고 강동면의 경계점이다. 옛날 외동읍으로 가는 국도변이라 교통이 편리하고 또 만리성재로 통하는 재만리에 옛날 숯방이었으며 환경좋은 곳이다
마을의 역사 임진왜란후 파평윤씨가 입주개척 새로지은 집터라하여 신대라 하였고 이 성내에 於田里는 팔송지 라고도 하며 외동읍으로 갈려면 万里재를 넘기 위하여 어정거린다 하여 어전이고 옛날 소나무 8樹가 있었다하여 八松地라고도 한다. 건대(乾臺): 동네앞에 台라는 산이 있어 옛부터 乾台로 불리고 있다 숯방(炭坊): 옛날 숯을 생산하던 곳이라 숯방직,炭坊이라 한다 토방(土坊): 옛날 이동네의 흙을 가지고 솟뿌리공장을 하였다하여 土坊이다. 특히 신라의 성덕왕께서는 角平元眞을 시켜 鄕井 39,262명을 동원 海拔650m, 길이 2,039m의 城郭을 쌓아 왜적을 격퇴시킨 만리성이 바로 신대리이다.
○ 기구(基邱)리 마을의 자연환경 기구리는 남은 상계리. 북은 석읍리 이며 서는 신대리, 동은 서동리이다. 산세가 서에서 동남으로 동북향리도 있어 응달편의 동네가 기구리 이다
마을의 역사 조선선조때 박영남 이란자가 임진왜란때 크게 용맹을 떨치다 연전 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아버지 박인국 장군의 유해를 晉州 남사까지 운구해 가지 못하고 이곳의 북쪽산에 묘를 쓴 후 가까운 산의 두들에 정착하여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므로 "기구" 혹은 "텃두들" 이라 불렀다.
마을의 유적 ▶ 새한바위 - 기구리에서 하서쪽으로 약 1km정도 내려가면 새한바위가 있는데 약 230m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이바위는 옛날 海溢이 일어나면 제일 윗부분의 바위위에 새한마리가 앉을 정도만 남고 전부가 바다물에 잠겼다하여 그후부터 새한바위로 불리어 왔다. ▶ 만송재 - 증 좌승지 박인국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세운 재사이다. 매봉재 아래 있다.
마을의 지명 ▶ 갈골 - 기구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고사집골 - 고사집(상여집)이 있었던 골짜기로, 큰사낫골 북쪽에 있다 ▶ 논골 - 기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농바웃골 - 농바위가 있는 골짜기로, 점태골 북쪽에 있다 ▶ 농바우 - 모양이 농처럼 생긴 바위 농암.용암 이라고도 한다 ▶ 다앗골 - 기구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당숫골 - 당제를 지내던 나무가 있던 골짜기로 다밭밑 서쪽에 있다 ▶ 등잔골 - 돌산태말랭이 아래에 있는 골짜기 ▶ 미영밭골 - 미영밭(목화밭)이 있던 골짜기로 용솟골 북쪽에 있다 ▶ 부뭇골 - 불뭇간(대장간)이 있던 마을. 기구 서북쪽에 있다 ▶ 사낫골 - 기구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성낫골 - 쇠를 캤다고 하는 골짜기로. 용숫골 동쪽에 있다 ▶ 시붓골 - 시북(수렁)이 있는 골짜기 ▶ 메무골 - 기구 서북쪽 매봉제 밑에 있던 마을로 응곡,응곡리,매곡이라고도 불렀다 1973년 폭우로 큰 피해를 본 후 마을을 석촌리로 이주 하였다. ▶ 매봉재 - 모양이 마치 매처럼 생긴 산으로 , 기구리와 석촌리에 걸쳐 있다
○ 석촌(石村)리 마을의 자연환경 석촌리는 남은 신대리, 북은 효동리, 서는 입실쪽, 동쪽은 석읍리로 학전,명대,용암으로 형성되어 석촌리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역사 장기군 양남면의 지역으로 돌이 많았다하여 "돌촌", "석촌", "석을촌(石乙村) 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석촌리라 하고 경주시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학전(鶴田): 임진왜란때 수백마리의 백학이 이곳밭에 와서 피란하였다 하여 "세밭두들"이라고 불렀다고도 하며, 석촌 동남쪽 둔덕에 새가 많이 모여 들어 학전이라 한다 새마을(新村): 1973년 폭우때 피해를 당한 석촌리와 기구리 마을주민이 1974년 10월에 학전 남쪽에 이주시켜 만든 마을이다.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으므로 동네명을 새동네(新村)라 하였다 명대(名垈): 이마을을 개척할 당시 앞산 무덤에서 밤에 불이비쳐 마을을 밝게 하였다하여 '명대'라 불렀다 한다. 또 다른말로 이 마을의 동쪽산에 살던 초(혹은'최') 장군과 석읍 대현산에 살던 황장군이 서로 활로 싸워 '초전테', '최싸움테'라고 하다가, 피가 산에서 흘러 내려 왔으므로 산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를 피밭골 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후 마을은 평온해 졌고 해가뜨면 밝은 양지가 되는 곳이라 하여 명대(明垈)라 불렀다 한다. 용암(龍岩): 위산의 형이 용바위같아서 용암 또는 용골이라 하였다.
마을의 유적 초장군무덤 - 피밭골 등성이에 있는 초장군(혹은 최장군)의 무덤. 초장군과 황장군이 서로 활로싸워 피가 아래로 흘렀으므로 골짜기를 피밭골 이라 부른다고도 전한다. 초진지테 - 옛날 초장군이 이곳에 살면서 석읍 대현에 사는 황장군과 싸웠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터(들). 명대골에 있다
마을의 지명 ▶ 갓얖 - 말림갓의 옆이라하여 갓얖이라 부르는 골짜기 ▶ 개캣딩이 - 지형이 마치 개콧등처럼 생긴 등성이로 용바우 서쪽에 있다 ▶ 모르밭미기 - 모래밭이 있었던 골짜기로 용바우 복판에 있다 ▶ 반통골 - 이밭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용바우 - 마치 용처럼 생긴 바위로 용바웃골 동쪽에 있다.용암이라고도 한다 ▶ 응봉 - 기구리의 매봉재 ▶ 이밭골 - 용바우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점말 - 옹기점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용바우 남쪽에 있다 ▶ 피밭골 - 명대골의 초장군 무덤 아래쪽의 골짜기 ▶ 한밭장재 - 한밭골에서 효동리로 넘어가는 긴고개 ▶ 헹얏골재 - 행얏골에서 외동읍 모화리의 원원사로 넘어가는 고개
○ 석읍(石邑)리 마을의 자연환경 석읍리는 대천을 따라 북쪽의 牛山峰아래에서 남으로 기구리에 접하고, 서는 효동, 동이 상라리이다. 따라서 교통의 요지이며, 역내수력이 좋아 농사에 적합한 마을로서 대현,산림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의 역사 장기군 양남면의 지역으로 돌이많았다하여 돌골 혹은 석읍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경주시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석읍(石邑): 백씨에 석촌이란 선비가 입주개척 당시에 돌이 많다하여 돌골 혹은 석읍이라 하였다 대현(大縣): 약 500년전 황현장군이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됨에따라 마을이름을 "한티" 혹은 "大峴" 이라 부르다가 주민이 늘어나자 大縣이라 하게 되었다 산림(山林): 일명 두뭇골인데, 옛날 이마을 주민들이 지방관리에게 잘못보여 다른마을보다 세금을 두몫이나 더 냈다고 하여 "두뭇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이마을 뒷산에 숲이 울창하다 하여 '山林'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유적 대현봉수 - 대현의 한티재에 있는 봉수대로 동으로 하서지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동악봉수에 알리니 그 거리는 30리 이다. 소석정 - 석읍에 있는 정자로 최석곤이 노닐던 곳이었다 한다.
마을의 지명 ▶ 두만재 - 두산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두뭇고개 동북쪽에서 상라리 자부로 넘어간다 ▶ 두만바우 - 여러개의 바위가 송곳처럼 뾰족하게 솟아있으며 두만재에 있다 ▶ 섬안등 - 두뭇골 동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양쪽에 물이흘러 섬 안처럼 보인다 ▶ 소미기산 - 석읍,효동,상라,양북죽전리에 걸쳐 있는 높이 334m의 산. 효잠,우산,우잠 이라고도 한다. ▶ 웅굴골 - 웅굴(샘)이 있는 골짜기로 석읍 남쪽에 있다 ▶ 태산만딩이 - 동넷봉 남쪽에 있는 산
○ 효동(孝洞)리 마을의 자연환경 효동리는 남은 석촌, 북은 죽전,동은 석읍 으로, 서는 외동읍 개곡리쪽 嶺上에 孝嶺재가 있다. 효령,한량곡,중산,남전,어전,제원,월천리등으로 형성되어 1리, 2리로 구분 되었다. 농경지로서 환경이 좋은 곳이다
마을의 역사 효동(孝洞): 약 300여년 전 씨가 입주정착하여 효재 孝嶺이라하고 그 뒤 부락의 생긴모습이 소(牛)같다하여 소재라 하였는데 그후 孝婦가 나서 孝洞리라 하였다. 한량곡(漢良谷): 옛날 漢良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漢良谷이라 한다 중산(中山): 들 가운데 산이 있어 그산이름을 따서 중산이라 한다 남전(南田): 竹田의 남쪽 田里라 하여 남전이라 한다 어전(於田): 이곳에 僧女들이 쓰는 바랑갓을 만드는 늘이라는 다년생식물이 있어 於田이라한다. 제원: 옛날 원을 설치하여 동해쪽으로 가는 무인지에 留宿하던 곳이라 하여 유이라한다 월천(月川) : 다래가나는 골짜기라며 냇물이 맑고 깨끗하여 달이비치어 月川이라 한다
○ 상라(上羅)리 마을의 자연환경 상라리는 남쪽은 나산리이고,북은 송전으로 남북이 통한 마을로 동은 국립 공원인 봉길리이다.1914년 부군통합당시 상라리로 개칭되어 境內에는 상라리,자부리 등 2개마을로 형성되어있다.
마을의 역사 장기군 양남면의 지역으로 나아 위쪽이 되므로 웃나아,웃나,상라, 상라아지, 상내아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상라리로 하고 경주시 양남면에 편입 되었다
상라(上羅): 나아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웃나아", "웃나". "상내아", 혹은 상라아지 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부(自富): 옛날 이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모두가 의식주에 곤란을 받지않고 부유하게 살았다고 하여 "자부", 혹은 "자붓" 이라 불렀다 한다.
마을의 유적 상라지 - 상라소류지 라고도 하며, 저수량 150만톤에 몽리면적 45ha이다. 1976년에 준공되었는데, 상라 서쪽에 있다.
마을의 지명 ▶ 굴통골 - 굴이 있는골짜기로 자부 동쪽에 있다 ▶ 굴통골재 - 굴통골에서 양북면 구길리로 넘어가는 고개 ▶ 두만재 - 자부 서쪽에서 석읍리로 넘어가는 고개 ▶ 범방재 - 범바웃골에 있는 고개로, 상라에서 양북면 구길리로 넘어간다 ▶ 범바웃골 - 범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상라 동쪽에 있다 ▶ 자붓재 - 웃자부 서북쪽에서 양북면 송전리로 넘어가는 고개 ▶ 장고개 - 자부 서남쪽에서 석읍리로 넘어가는 고개 ▶ 화잠골 - 지형이 비녀처럼 생긴 골짜기로 상라 서쪽에있다(화잠곡)
○ 나산(羅山)리 마을의 자연환경 나산리는 동은 나아, 서북은 상라리로서 동북은 경주국립공원으로 동해안의 영농적지이다. 또 기후,토질, 기타 풍속 등이 예절바른 마을이다. 현 大里, 新里, 基腋, 池谷 등이 형성되어 나산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역사 나산(羅山): 신라육부촌인 금산가리촌장이 입주개척당시 나산리로 칭하여온 것이 마을이름이다 큰마을(大里): 옛날 나아골의 큰말,새말,지곡,웃라,자부,수아,장아,모포,송하, 죽전,읍천포 중에서 제일큰 마을이라하여 큰마을이라 한다 새마을(新里): 450년전 김녕김씨가 이마을에 정착 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 "새말" "신리" 라 부르게 되었다 기액(基腋): 12개 부락중에 가장큰마을옆에 생겼다하여 기액마을이다 지곡(池谷): 이 동네안에 못이있다하여 池谷이라한다
마을의 유적 국구암(國求岩): 신라말 경순왕이 망국시에 庵에가서 피신하였다하여 국구암이라 칭하며 그 庵 뒤쪽에 자연굴이 하나 있는데 3사람 정도가 들어갈만한 곳으로 당시에는 왕의 음식물과 일용품등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현재 이암자를 普德庵 이라 부른다 나산사(羅山祠): 큰마을 가운데에 있는데, 백촌 김문기를 제향하는 곳이다. 나산사는 정조 4년에 지어졌으나, 고종 5년 금령에 의해 헐리었고, 1936년 중건 복향 되었다. 김문기의 자는 여태이고 본관은 김녕으로, 관직을 두루 거쳐 단종 때에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단종복위 모임에 가담했다가 세조1년에 순절했으며, 영조7년 관직이 복구 되었고, 정조2년 익호를 내리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 되었다. 같은왕 15년 장릉 의 충신단에 배향 되었다.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한다. 밀양박씨 정렬각 : 최원태의 처 열부 밀양박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순조2년 정려하고 2년후 여각을 세웠다. 밀양박씨는 시부모를 지성으로 공경하고 남편을 섬겼는데, 남편이 죽자 시부모를 생각하여 곡성을 내지 않았으며, 훗날 3년상을 치른후 몰래 남편따라 목숨을 끊었다. 어사 박문수가 이 사실을 알고 조정에 품신하여 정려가 내려졌다. 현재의 비석은 1983년 문중에서 짓골 어귀에 건립한 것이다
마을의 지명 ▶ 굴골 - 옛날 어느 태자가 피난을 했다고 하는 바위굴이 있는 골짜기로 보덕암 서남쪽에 있다 ▶ 덕골 - 덕골재 밑에 있는 골짜기 ▶ 덕골재 : 큰말 서남쪽에서 환서리의 덕골로 넘어가는 고개 ▶ 마잿골 - 보덕암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재매기 - 보덕암 서남쪽에서 환서리로 넘어가는 고개
○ 나아(羅兒)리 마을의 자연환경 나아리는 남은 읍천, 북은 봉길, 서쪽이 나산이며 동은 바다이다. 서에서 동남으로 생긴 산맥의 陵谷이라 농어양업이 대부분이며 해변이 유원지화 되어 있다. 현재는 원자력발전소가 건립되어 옛모습은 거의 없고 시가지화 되어 상업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역사 장기군 양남면의 지역으로, 보리개 옆이 되므로 버릿개. 나아. 내아. 나아지.나아포.모포.모포리 혹은 아진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나아리로 하고, 경주군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수아(收兒): 신라 석탈해를 거두어 들인곳이라 하여 "수아" 혹은 "수애"라고 불렀다 하며, 나아천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수남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월성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장아(長阿): 석탈해왕이 장성하기까지 자라던 언덕이라하여 "장아"라 하는데 마을은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헐리었다. 모포(牟浦): 이마을에 보리밭이 많고 앞은 포구가 있으며 마을뒤에 작은 고개 가 있어 "보릿고개" "보리개" "버릿개"라고 부르다가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헐리었다. 송하(松下): 소나무가 많았고 소나무밭아래에 마을이 이루어져 있으므로 "솔밭" "송알" "송하"라고 불러 오다가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헐리었다.
마을의 유적 석탈해왕유허비 - 신라 석탈해왕의 탄강지에 세운 비로 조선 고종때 석씨(昔) 문중 에서 세웠는데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542-1번지에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옛날 왜국의 동북 1,000리에 다파나국(삼국유사에는 용성국)이 있었는데 왕인 함달파가 여국와의 딸을 왕비로 맞아 임신 7년만에 큰 알을 낳으니 불길하다하여 비단으로 싼다음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이 궤짝이 정처없이 흘러 금관국 바닷가에 닿았으나, 그곳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그대로 보냈다. 진한땅 아진포에 한 노파가 살았는데. 어느날 앞바다에 있는 홈바위에서 해초를 뜯고 있다가 해안으로 밀려오는 이상한 궤짝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는지라 데려와 길렀다. 이때가 혁거세왕 39년이다. 궤짝이 바다에 떠내려 올 때 많은 까치가 울며 따라 왔으므로, 아기의성은 까치 작(鵲)자에서 세조(鳥)자를 떼고 석(昔)이라 짓고, 궤에서 벗어났으니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탈해는 자라면서 신장이 9척이나 되고 학문과 지리를 익혀 인물이 출중하니 남해왕 5년(서기8년)에 부마가 되고, 유리왕의 뒤를 이어 신라4대 왕위에 올랐다.
마을의 지명 ▶ 동방굴 - 돌이 많은 골짜기로 송하 남쪽에 있다 ▶ 딱밭골 - 딱나무 밭이 있는 골짜기로 송하 남쪽에 있다 ▶ 지널골 - 땅이 매우 기름진 골짜기로 송하 남쪽에 있다 ▶ 홈바우 - 홈이 패어있는 홈돌이라고도 하는 바위로 장아앞 바닷가에 있다.
○ 읍천(邑川)리
마을의 자연환경 읍천리는 서가 환서, 북이 나아리로 동남이 바다이며 완전 해변인데 바위가 해변에 너무많아 항구역할이 힘드는 곳으로 1914년 부군통합당시에 읍천 1리,2리로 구분되어 지금까지 오고 있으며, 지금은 1종항구가 들어서 있다
마을의 역사 읍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읍천으로 된 이후 그대로 오고 있다. 미역,전복으로 소득이 증대되고 있다 죽전(竹田): 이마을 서쪽언덕에 대나무 밭이 있어 죽전이라 한다
■양북면
연혁 ○조선시대 -양남, 감포와 동일면으로 동해면이라 칭했음 ○1895년 -양남면과 분리되어 동해면으로, ○1906년 -광무10년(정일)장기에 편입 내남면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경주군 양북면으로 개칭 ○1937년 -감포읍 승격으로 월성군 양북면으로 개칭 ○1955년 -경주시 승격으로 월성군 양북면으로 개칭 ○1975년 -범곡리 일부(석굴암)가 경주시에 편입 ○1987년 -봉길리 일부(원전)가 양남면에 편입 ○1995년 -시군통합으로 경주시 양북면으로 개칭
▶유래 어일리(魚日里) 1600년경 정응서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앞산의 지형이 고기 한마리를 닮았다하여 魚一이라 칭하여 오다가 1900년 초기 이후부터 魚日로 개칭 俗稱 장터라고도 하며 양북면 소재지로서 5일마다 시장이 개설되며 상거래가 활발하여 동해 3개 읍면의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 하였다.
와읍리(臥邑里) 사발바위에서 동산으로 이어지는 바위가 길게 누워 있었으므로 "臥龍"이라 하였다 하며 혹은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왓골" 왯골"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중기리 등을 병합하여 와읍리로 하였다.
용동리(龍洞里)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龍頭 또는 龍洞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폐합에 의하여 龍洞里로 하였다.
권이리(權伊里) 權伊는 약 250년전 난을 피해온 權氏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權伊라 불렀다고 한다.
호암리(虎岩里) 마을 앞산에 마치 입을 벌린 범처럼 생긴 기이한 바위가 있으므로 그 바위의 이름을 범바위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호암" 혹은 범바우라 불렀다고 한다.
안동리(安洞里) 조선중엽에 姜讚成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지형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 장차 이마을이 평온하고 부유한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안동 안골로 불렀다고 한다.
장항리(獐項里) 마을 앞산의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목.장항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거 경주군 외동면 상신리 일부를 병합하여 장항리로 하였다.
범곡리(凡谷里) 옛날 석굴암 근처 사는 범이 자주 이 마을에 나타나므로 처음에는 虎谷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凡谷.범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입천리(卄川里) 형제봉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스무길이나 되며 내(川) 양편 하류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스므내" "이십천" 혹은 "입천" 이라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스무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내를 이루므로 스무내로 하는데 이 스무내의 아래쪽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그대로 스무내(卄川)하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송전리(松田里)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고 하여 "솔밭" 혹은 "송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죽전리(竹田里) 영월 엄씨(嚴氏)가 개척한 마을로 큰 대나무 밭 밑에 마을이 있어 "대숲" "대숲말" "대밭" 혹은 죽전(竹田)이라 불렀다. 또 마을 밑에 대수못이 있으므로 죽연(竹淵)이라 부른다고 한다.
두산리(斗山里)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으므로 乭山, 乭山里, 斗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용당리(龍當里) 신문왕의 부왕인 문무왕의 成龍護國의 유언에 의해 수중릉을 만들고 유덕을 기리기 위해 감은사를 창건하여 용이 출입할 수 있는 지하 수로를 만드니 수십길의 용소가 생겨나서 "용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龍堂", "돌담", 용담리( 龍潭里)라고도 하는데 "돌담"은 용이 못(潭)을 돌았다는데서 나온 말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龍潭里와 院堂里를 병합하여 龍堂里로 하였다.
구길리(九吉里) 구길(九吉)은 마을 앞에 대종천(大鐘川)이 흐르는데, 마을의 형태가 마치 거북이 꼬리 같다고 하여 구미(龜尾)라 불렀다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 지역의 산이 거북이 엎드린 모양 같으므로 水北 , 水南, 前飛, 下里, 德音의 여섯 부락을 합쳐 龜吉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쓰기 어려운 "龜"자를 "九"자로 바꾸어 九吉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봉길리(奉吉里) 慶州 崔氏가 이 마을을 개척할때 마을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鳳吉"이라 부르다가 조선 말기 부터 奉吉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면
沿革 ·고려태조 23年(1413)에 慶州府에 내속 ·조선말까지 內西面이라 稱하였음 ·1914년 府君廢合에따라 慶州郡 西面으로 改稱 함과동시에 19個里洞을 管割. ·1955년 慶州市제 가 施行됨에 따라 月城郡 西面으로 改稱. ·1973年 7月 1日 大統領令 第6543號에 의거 管內 11個里洞이 乾川邑으로 분리 나머지 8個里洞만을 管轄. ·1988年 12月 31日 法律 第4050號에 의하여 君名稱 慶州郡으로 改稱 現在에 이름. ·西面은 慶州郡의 西쪽단에 치우쳐 있고, 東으로 乾川邑, 西로는 永川郡 北安面, 南으로 山內面 北으로는 永川郡 古鏡面 과 接하고 있다.
▶유래 阿火里(아화1.2.3.4리) -水利施設이 좋지 않아 農事를 짓지 못 하였으면 夏節期에 草木이 枯死될 정도로 旱害가 甚하여 언덕에 불을 지르면 불이 꺼지지 않고 繼續탔다하여 阿火라 稱하였다 함.
道溪里 - 善山朴氏가 마을을 開拓하여 道音이라 하였고 그후 平海 黃氏의 선비 黃以根의 號가 溪隱公이라 好學多聞하고 德望이있어 平海黃氏 中始祖가 되어 一門이 推仰하고 있으며 溪隱公이 길을 열었다 하여 道音을 道溪로 改稱하였음
泉村理 -이 마을 개척당시 뒷산에 올라 마을 形態를 보니 마을 周圍가 흡사 井戶처럼 地型이 깊고 空谷에 물이 새어나온다 하여 샘촌(泉村)이라 名하여 왔음.
棲梧里 -善山朴氏가 이마을을 開拓할 당시 梧桐이 많은 것을 보고 民가 洞梧가 有實에 將棲鳳이라 하며 살아왔다. 그후 果然 어느날 鳳이 날아와서 梧桐가지에 앉아 울고갔다하여 洞名을 棲梧라 하였다함.
深谷里 -이마을 改拓당시 深室이라 하였고 임진왜란을 피해온 晋州河氏 景賢이란 선비가 골자기가 깊다하여 深谷이라 改稱하여 現在에 이름
道里(1.2리) -이 마을 개척당시 深谷이라 하였고 1914년 府郡廢合時 道里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름
舍羅里 -約1200年前 密陽孫氏가 이마을을 개척 마을이 繁昌하라고 舍羅谷이라 하였으며 그후 1914年 行政 舍羅里라 改稱함
雲臺里(운대1.2리) -군실/군곡(裙谷)(운대1리) 연대는 확실히 알수 없으나 옛날 月城金氏가 이마을을 開拓할 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용바위산의 모습이 옛여인들이 입던 한복의 바지처럼 생겼다하여 洞名을 군실 또는 裙谷이라 칭했다.
-부운/운곡/운대(운대2리) 浮雲臺 밑에 있는 마을로 新羅 善德(일설에는 眞德)여왕이 봉황이 날아들것같은 이곳의 산세와 그 아래 맑은 호수의 아름다움을 듣고 유람차 친히행차하시어 하루를 즐기셨다하며 뒷날이를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앞산에 浮雲臺라는 연꽃 무늬의 받침대를 받친 기념대를 세웠으며 또 여왕께서 행차하실때는 기이하게도 채색구름이 아름답게 떠있었기 때문에 浮雲臺라 부르기도 하여 동명을 부운(浮雲)또는 운곡(雲谷)이라 했다한다.
■외동읍
조선조 말기 경주부(慶州府)의 남쪽지방 남산(南山) 및 마석산을 중앙으로 양분하여 서쪽은 내남면(內南面), 동쪽은 외남면(外南面)이라 칭하고 190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남면(外南面)의 북부(北部) 일부를 제외하고 불국사(佛國寺)에서 경남도계(慶南道界)까지를 외동(外東)이라 칭하게 되었음.
- 개곡 : 오절이라는 이와 견천지라는 이가 약 660년 전에 개척한 마을로 처음에 개국(開局)이라 부르다가, 마을에 깊은 골짜기가 있어 개곡이라 불렀다. - 괘릉 : 능마을 능지촌(陵旨村), 괘동(掛洞)이라고도 하였다. - 구어 : 구어역이 있었으므로 구어-구어역-역촌-구역이라 하였다. - 냉천 : 찬 냇물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찬내-냉천이라 하였다. - 녹동 : 지형이 노루 형국으로 생겼다 하여 노리골-녹동이라 하였다. - 말방 : 숭복사터 어귀가 되어 마방(馬房)이 있었으므로 마방-말방이라 불렀다. - 모화 : 신라시대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이 모벌군성 성문에 이르러 삭발을(毛伐) 하고, 머리털을 불태운(毛火) 다음 불국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모아(毛伐) 혹은 모화(毛火)라고 하였다. - 문산 : 개척당시 돌이 많은 뒷산을 울산 사람들이 빼앗으려 하자 소유권 분령을 하면서 욕을 많이 얻어 먹었다고 하여 문산(汶山)이라 하였다. - 방어 : 신라시대 방어사(防禦司)라는 군영(軍營)이 있어 방어라고 불리었다. - 북토 : 토상촌 북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북토상(北吐上), 북토(北土)라 불렀다. - 석계 : 돌이 많은 거랑가에 위치하여 돌거랑, 돌계(乭溪), 석계(石溪), 도계(道溪), 석을지(石乙只)라 불렀다. - 신계 : 사드랫거랑가에 위치하여 사드래-서드래-서배(西培)-신계(新溪)라 불렀다. - 연안 : 연지(蓮池) 안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연안이라 불렀다. - 입실 : 신라때 불국사와 모화리의 원원사 사이에 작은 절 78개가 있어 절과 절 사이의 통로로 마치 복도와 같이 만들었다. 불국사에 들어간 사람은 미리 이곳의 작은절로 들어와 삭발을 하고 마을을 가다듬었다는데 불도(佛道)를 닦으러 오는 사람들이 실내로 들어오는 문이라 하여 입곡(入谷,立谷) '입실(入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제내 : '돌매', '토상촌(吐上村)', '석동(石洞)'이라고 부르다가, 마을 앞의 토성계(土城谿)에 못을 박고부터 '제내(堤內)', '못안'이라 불렀고, 해방후부터 '제내'라 고쳐불렀다고 한다. - 죽동 : 대나무가 많았다하여 대방-죽방(竹方)-죽전(竹田)-죽동(竹洞)이라 불렀다. - 활성 : 장이영(長以英)이라는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이곳에 장군수(長軍水)인 활수(活水)가 솟아났다 하여 활성이라 불렀다한다.
■산내면
朝鮮時代 太宗 13년 鷄林府를 慶州府로 개칭하였는데 지역은 慶州府에 속하였으며 - 高宗 32년 전국8도를 23부로 개편할 때 慶州郡 西山內面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이듬해光武元年(1896) 13道 제도 施行으로 慶州郡 山內面으로 개칭됨 - 1914年4월 1일 面制實施 行政區域 改編時 慶州郡 山內面 9個 里洞으로 改編되었고, 1943년에는 9개 이동이 分洞되어 19개 리동으로 됨 - 산내면은 가도가도 산이요, 봐도 봐도 하늘뿐인, 말 그대로“산속의 고을”입니다. 고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시청에서 약 26km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 9개 법정리와 68개의 자연부락, 19개 행정리, 71반으로 인구 4,177명이며 전체면적 142.25㎢중 임야면적이 전체의 84%를 차지하는 해발180-550m 고지대 산간 오지로써 밤낮의 일교차(5~7℃)가 심한 지역이다. 지리적으로는 남쪽으로 울산시 상북면과 연접하고, 동남쪽엔 내남면, 서쪽으론 청도군 운문면, 북쪽으로는 영천시 북안면과 이웃하고 낙동강 상류인 동창천이 면 중심을 관통 하고 대구시민의 식수원인 운문댐 상류에 위치한 산천어, 꺽지, 피라미, 빙어등 민물고기가 많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고장이다.
▶지역여건 및 특성 ○ 義谷1,2里 의곡 : 新羅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나 正確한 根據가 없으며 李朝中期에 月城李氏가 처음 開拓하였다고 한다. 驛으로 指定되면서 부터 어진 村長이 나타나 마을을 잘 統率하였다 하여 義谷이 라 부르게 되었음 임동 : 1730년境 金寧金氏 金先龍이란 사람이 처음 이 마을을 開拓當時 숲이 덮혀 있 었다 하여 林洞 또는 숲골이라 불리움
○ 乃日1里 본내일 : 마을 뒷산에 해가뜨고 달이 뜬다고하여 그 산봉우리를 日月峰이라 하였고 마을이름을 日月이라 하였는데 僧侶가 시주하러 왔다가 日月이라하면 큰 재앙이 닥 친다 하면서 乃日이라 고쳐주어 지금까지 불리우고 있음 회평 : 李川徐氏 가문의 서일범(晦川公)이란 사람이 開拓하였다 하며 회천공의 晦자와 마을앞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하여 坪자를 써서 晦坪이라 함 판교 : 마을 가운데 있는 작은 개울을 건너기 위해 널판지로 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다 하여 "판교" "널다리"라고 불리운다고 함.
○ 乃日2里 소태 : 壬辰倭亂때 月城李氏가 避亂와서 開拓하였다 하며 솥을 만드는 곳이 있어 솔터라 고 하던 것을 지명 표기시 소태(少台)라고 변하였음 상목 : 임진왜란시 유규화(柳圭化)선생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마을 뒷산이 누에같이 생겼다 하여 잠두산(蠶頭山)이라 하였고 누에는 뽕을 먹어야 잘 산다는 뜻에서 상목(桑木)이라 하였음 수의 : 신라때 화랑의 수련장이었던 守義池아래 생겼다하여 수의라고 부르고 있음 진목 : 부락 개척당시 참나무 숲이 많이 있었다 하여 진목정(眞木亭) 또는 참나무정이라 칭함
○ 大賢1里 : 1480년 밀양박씨 경보(慶輔)란 사람이 처음이마을을 개척하여 회곡이라 칭하였고 그 후 어진 사람이 9명이 태어 났다하여 구현동(九賢洞) -노곡또는 노계(盧溪)로 불리였음. 그후 큰 재가 많아 대현(大峴)으로 불리우다 일제시 박재연이 이왕이 면 峴자를賢으로 고쳐 대현(大賢)이 됨 서편 : 동창천 서편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서편"이라 불리움 범곡 : 월성김씨 호(虎)란 사람이 처음 개척하였다 하며 이마을 앞 산이 범의 머리같이 생겼다 하여 호곡(虎谷)이라 부르다가 후손에 와서 범의 배가 고프면 산림(재물) 이 늘어나지 않는다하여 "범곡(凡谷) 범골이라 부름. 고강리 : 개척당시 마을에 고씨(高氏)가 살다 차례로 강씨(姜氏), 이씨(李氏)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어 고강리(高,姜,李)라 칭함
○ 大賢2里 시다 : 1570년 월성이씨가 개척하였으며 대한(大旱)에도 골짜기 물이 마르지 않고 절후 에 맞게 농사가 잘되어 힘 들이지 않고 농사를 잘 지을수 있다하며 고려유신들이 피난와서 후사와 평화가 오기를 기다렸다하여 시다(時多)라고 칭함 태종 : 이조삼대왕(芳遠)이 고려 유신들의 군을 전멸하고 태종왕의 이름을 따서 태종이 라 불리움 동편 : 동창천 동쪽에 있다하여 동편(東片)으로 불리움
○ 大賢3里 동곡 : 마을의 북쪽 산에 그리(銅)가 나왔다고 하여 동곡(銅谷)또는 쇠동골이라 칭함 중리 : 동곡과 와항 중간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리(中里)라 칭함 와항 : 태종 이방원이 고개마다 진지 번호로 일항(一項:외항) 재항(再項:소호)으로 정한 이름이 그대로 불린다고 하고, 마을 형태가 기와처럼 생겼다 하여 "와항"또는 "외항만디" "기와목"이라고도 칭함 귀농지 : 1961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재임시 실업자 구재책으 로 산을 100町을 개간 50세대를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하여 귀농지라 칭함 (A지구, B지구, C지구)
○ 日富1里 : 1720년경 밀양박씨 문용(文溶)이란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여 이후 12대에 걸쳐 장인(匠人)으로 이어 오면서 상거래가 빈번하여 날마다 한집씩 부자가 생겨날 정도 로 많은 돈을 벌었다하여 일부(日富)라 부르게 됨 심천 : 옹강산에서 신원리에 이르는 골짜기가 깊다하여 "지푼내" 또는 "심천(深川)이라 부르게 됨. 거산 : 골이 좁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큰산 밑에 마을이 있다하여거산이라 부름 산수 : 마을 가운데 묘가 있었다 하여 산소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산수(山水)라 칭함 제궁 : 마을에 큰 재실이 있었다 하여 재궁(齋宮)이라 하던 것이 지명 표기시재궁(才宮) 으로 불리움
○ 日富2里 상신 : 어느해 홍수가 나서 마을 전체가 떠내려 가고 새로운 마을을 일궈"새말"이라 하였 는데 윗쪽에 있는 마을을 "웃새마을" 상신(上新)이라 칭함 하신 : 마을 유래는 상신과 같음 장척 : 괘일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골자기가 긴자와 같이 일자형으로 생겼다 하여 "장척" 또는 장자골이라 부름 괘일 : 인근 마을에서 해가 제일 늦게 지므로 "해를 공중에 매달아 넣은 듯하다"하녀 괘일이라 부름.
○ 新院1里 덕동 : 개척 당시 마을 윗쪽에 절벽이 있고 시내가 흐른다 하여 암계(岩溪)라 부르다 뒤 에 덕(德)이 있고 훌륭한 후손이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1618년 김중보란 사 람이 덕동(德洞)이라 개칭함 옷밭 : 마을 개척 당시 옻나무가 많아 "옥밭" 또는 칠전(漆田)이라 불리움 박다 : 개척 당시 박달나무가 많았다고하여 "박달"이라 부르다가 그후 박씨(朴氏)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박다" "박다동"으로 불리움
○ 新院2里 문산 : 마을에 서당이 많아 글공부하는 선비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하여 글메라 부르다 문산(文山)이라 칭함 세원 : 1760년경 남평문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하였다하며 인가가 드문곳에 원(院)을 새로 지었다 하여 "새원" 또는 신원(新院)이라 칭함 멧골 : 마을을 개척 할 당시 매화가 많았다하여 "매골" 매곡(梅谷)이라 칭함
○ 外七1里 :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옷밭의 바같쪽으로 되므로"바같옷밭" 혹은 외칠 전(外七田)이라 부르다 골짜기 바같에 7개의 마을이 있다하여 외칠로 개편 방동 : 마을에 방화사(芳花寺)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하여 방화동(芳花洞)이라부르다 마을이 꽃처럼 아름답다는 뜻과 방화사의 절 이름을 따서 방동(芳洞)이라 부름 원두 : 원님이 관내 순시때 유숙하던 원집이 있었다 하여 원두(院頭)라 칭함
○ 外七2里 월천 : 마을 뒤에 "달산" 이라는 산이 있어 산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달랫골" "월천 (月川)이라 칭함 지리 : 후손들에게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지례(智禮), 지리(智里)라 불 리움
○ 內七1里 : 골짜기 안에 일곱 동네가 있다하여 내칠(內七)리라 불리움 직현 : 일자산(一字山)아래 마을이 일자형으로 취락 하였다 하여 "곧음터" 직현(直峴)이 라 칭함 교동 : 마을 가운데 세천이 흐르고 있어 집집마다 세천을 건너 다니는 다리가 여러개 놓 여 있었다 하여 "다릿골", 교동(橋洞)이라 칭함 개현 : 개척 당시 주민들이 한곳에 집단적으로 모여 살지 않고 흩어져 살았다고 하여 "개 터" 개현(個峴)이라 하다 근래에 와서 개현(介峴)이라 함 의동 : 마을 지형이 개미와 같이 생겼다 하여 "개미골" 의동(蟻洞)이라 칭함
○ 內七2里 안옷밭 : 옷밭의 안쪽에 있다하여 "안옷밭"이라 불리움 산저 : 개척 당시 딱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산저(山楮)라고 하며 위, 아랫마을 구분을 위하여 상산저, 하산저로 구분함 월항 : 마을 지형이 반달모양으로 생겼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달 보러가는 첫째 동네"라는 뜻에서 "다라미기" 월항(月項)이라 칭함
○ 牛羅1里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산 지형이 우형(牛形)을 이루고 있다하여 우라로 칭함 수피 : 마을 개척 당시 피나무 숲이 있었다 하여 수피(禾皮)라 칭함
○ 牛羅2里 중리 : 개척 당시 동쪽 산정에 산성(山頂)이 있어 성촌(城村)이라 하였고 산에서 우렁이 소리가 들린다하여 명라동(鳴羅洞)이라 칭하다 자연부락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중리로 칭함 상리 : 우라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리"라 부름 지경 : 수피와 중리의 경계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경(地境)이라 칭함 시루미기(생식촌) : 골짜기의 지형이 시루와 같이 생겼다하여 "시루미기 마을"이라함
○ 甘山1里 : 타 이동에 비해 산이 높지 않고 아름답게 생겼다하여 감산이라 칭함 감존 : 개척 당시 밤나무와 감나무가 많아 마을 이름도 감존(甘存)이라 함 어두 : 신라때 전란으로 왕자가 피신하고 있던 곳으로 황자동이라 하다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지형이 물고기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어머리" 또는 어두(漁頭)라 칭함 원동 : 이조 순종때 원의 지방 순시때 기거하던 집이 있었다 하여 원동(院洞)이라 함 탑동 :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탑거리 탑동(塔洞)이라 함
○ 甘山2里 장사 :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 긴 뱀처럼 생겼다 하여 장사(長蛇)라고 하던 것이 조선말 기에 정선비가 벼슬에 오르자 장사(長仕)로 부름 방터 : 마을의 형태가 꽃같이 생겼다 하여 "방터" 또는 방기(芳基)라 칭함 소목 : 마을 앞에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 마을에 재앙이 온 다하여 손목(損木)이라 하였다 하고, 혹은 고을이 좁아서 "소목"이라 불렀다는 이 야기도 있다. 회골 : 마을에 큰 회나무가 있었다 하여 횟골이라 불렀다 하며 혹은 마을에 큰 불이나서 잿더미로 변해 새로 마을을 일으키고 난 다음"횟골" 회곡(恢谷)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임.
■천북면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때 신라왕조의 도읍지인 경주의 北川을 경계로 북쪽에 위치하여 천북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고 1955년 경주시제 실시로 인해 경주군이 월성군으로 군명이 바뀜에 따라 동천, 황성, 용강이 경주시로 편입되었고 1989년 명칭 환원에 따라 다시 경주군 천북면으로 불리다가 1995년 시·군 통합으로 인해 지금은 9법정리 17행정리 74개반을 가지고 있는 도농 복합형의 경주시 천북면으로 되었다.
동쪽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동대봉산이 자리하고 서쪽은 고요한 형산강을 끼고 교통망 또한 잘 발달되어 시 중심부에서 15분 거리이며 동남에는 5분 거리에 보문관광단지가 (문화엑스포행사장, 골프장, 위락시설 등) 위치하고 있으며 지형 또한 야트막한 야산이 많아 개발여지가 많으며 전형적인 농, 축산분야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경주시지정 「화산불고기단지」청정지역에는 순수 한우만을 고집하는 한우 특유의 맛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신선한 채소로 담근 무쌈이 일품이다
명칭유래
新羅王都인 慶州의 알천 또는 慶州의 北川 북쪽에 位置하여 川北이라 칭함
동산리 ○ 동산은 최현익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음 ○ 당시 마을 가운데로 개울물이 흘러 늪을 이루고 있었음. ○ 약 280년전 유한지란이가 늪 아래쪽에 다시 마을을 개척하여 "늪마을"이라 부르다가 1914년경부터 동산이라 부르게 되었음. ○ 『새터』는 조선중기에 대홍수로 말미암아 마을이 폐허가 되었는데 조선 현종때 김씨성을 가진이가 새로 마을을 개척하여 새터 또는『신기』, 『새각단』이라고 하였다함
덕산리 ○ 덕산은 약 1,000년전 황씨성을 가진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불방』또는『화방』이라 불러왔음. ○ 마을의 화재가 잦아 화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덕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함. ○ 덕산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마을뒤의 산이 마치 『노적』처럼 산세가 평탄하므로 마치 한국인의 덕스러운 모습을 느끼게 한다고하여 『덕산』이라 불렀다고함
신당리 ○ 신당은 신라무열왕때 원효대사가 이곳에 신당사라는 절을 지었는데 거기에 연유하여 『신당』이라고 하였음 ○ 『대밑』은 조선 태조때 허성구라는 선비가 대나무가 울창한 산 아래에 마을을 일구고 『대밑』『대하』라고 하였음.
모아리 ○ 『모아』는 옛날 이 마을에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몸에는 털이 유별나게 많고 체구가 컸으며 금방 걸어다녔고, 말을 할줄 알았는데 어느,날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오므로 뒤에 이름을 『모아』또는 『모의』라고 부르기도 함. ○ 『사잇골』은 모아와 배락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사잇골", "새골",또는 "간곡"이라 부름 ○ 『배락골』은 옛날 이마을 한 가운데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있었는데 매년 많은 열매가 달리나 결실기가 가까워 지면 항상 익지못하고 낙과가 되므로 "배락골" 또는 "이락곡"이라 부르게 되었음 ○ 『노린골』은 비만 오면 모래가 흘러내려 황토물과 토사가 이 마을의 들을 덮었는데 노리미기 아래에 있었다고 하여 "노린골" 또는 "황곡", "황동"이라 불렀음 ○ 『새터』는 일제시대 신작로가 생기면서 그 도로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 또는 "신기"라고 부르게 되었음.
오야리 ○ 『오야』는 마을앞의 넓은 평야가 매우 기름지고 비옥하여 "옥야"라 부르던 발음이 변하여 "오야"로 바뀌어 불리게 됨. ○ 『외실』은 오야남쪽에 있는 마을로 신라때 기와를 굽던 기와굴이 있었으므로 "와실"이라 불러오다가 발음이 변하여 "외실"로 불러지게 됨. ○ 『서평』은 옥야들 서쪽에 있다하여 "서평"이라 불렀음. ○ 『한백이』는 옛날에 한발이 극심했던 곳이라 하여 "함백이", "한박"이라고 부름.
물천리 ○ 『물천』은 "무내" "물천" 혹은 "퇴산"으로 불렀으며 옥동, 용락, 무내, 목실 4개 자연부락을 병합하여 물천리로 하였음 ○ 『용락』은 신라경순왕 때 이 마을 깊숙한 곳에 조그마한 못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뱀이 용으로 변하여 등천하면서 꼬리를 치니 못이 터지고 계곡이 생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하여 "용내기" "용락" "용락곡"이라 함. ○ 『목실』은 옛날 대낮에도 사나운 짐승이 출몰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울창한 수림을 없애고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여 "목실" 또는 "목곡"이라 부르게 되었음. ○ 『옥동』은 신라때 이 마을의 앞산에 옥정암이라는 암자가 있었고 그 계곡에서 옥이 많이 출토되어 "옥골" 또는 "옥동"이라 부르게 되었음.
갈곡리 ○ 『갈곡』은 신라무열왕때 칡넝쿨이 우거진 산간의 땅을 개척하여 마을을 일구었다고하여 "치실"또는 "갈골" "갈곡"이라 불렀음. ○ 『삼막골』은 옛날 이마을에 막집 3개가 있었다고 하여 "삼막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큰 골짜기 3개를 밭으로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해서 "삼밭골" "삼박골"이라 부르다가 발음이 변하여 삼막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함. ○ 『남아골』은 신라때 이 마을에 부처가 있는 방향이 남쪽이라하여 "남아골"로 불렀음 ○ 『양지마을』은 마을이 햇볕이 잘드는 남향 양지편에 있다하여 "양지마을" "양지촌"이라고 부르게 되었음
성지리 ○ 『성지』는 신라시대에 "광곡"이라 부르다가 조선초기 소리지라는 작은 못이 생긴후 이 못 둑에 올라서면 봉덕사 종소리가 잘 들린다고 하여 조선 정조때의 선비 손여원이 못 이름을 성지로 바꾸게 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소리못" "성지" "소리지"라 부르게 되었다함 또 황곡택이 있었으므로 "광곡역"이라 불렀는가 하면 손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소리지리, 소오리라고도 한다. ○ 『중방』은 제방을 따라 형성된 세 개의 자연부락중의 하나로 성지와 강정의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방"이라 부르게 됨. ○ 『강정』은 물맑은 냇가에 경주최씨 문중의 정각이 있었으므로 "강정"이라 부름
화산리 ○ 『화산』은 마을동쪽에 있는 연화봉에 올라가 보면 분지를 중심으로 둘러져있는 산들이 마치 꽃잎처럼 보인다고하여 "화산"이라 하였다고 하며 주위의 산에 계절마다 많은 꽃들이 피어 "화산" "꽃뫼" "곶메" "곶마"라고 부르기도 함 ○ 『용사골』은 이 마을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보면 깊은 웅덩이가 많은데 생긴 모양에 따라 "칼용치" "호박4용지" "길용치" "함용치"로 부르고 있으며 제일 큰 웅덩이인 길용치에 살던 숫뱀과 그 아래 호박용치에 살던 암뱀이 서로 만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추곡" "용사골" "용사곡" "용소곡"이라고 불렀다고 함. ○ 『흥림』은 이 마을의 산에 검은 바위가 많다고 하여 "먹방골"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에 있는 소나무숲이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조선철종때부터 흑림이라 불렀으나 이 마을이 쇠잔해 갔으므로 다시 마을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일제시대부터 "흥림"으로 불러오고 있음. ○ 『새터』는 약 80년전부터 화산 남쪽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생겼으므로 "새터" 또는 "신기"라 부르게 됨. ○ 『나리』는 신라시대 라씨성을 가진 선비가 이곳에 난을 피해왔다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난이 평정된 후에 그 선비가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므로 뒤에 사람들이 그 선비의 성을 따서 "나리"라 부르게 외었다고 하며 혹은 "나리밭골"이라고도 부름. ○ 『진대땅』은 마을을 싸고 있는 산의 모양이 길고 야트막하게 뱀처럼 누워 있으므로 "땅 긴 대망이 땅" "긴대땅" "진대땅"이라고 불러오고 있음
■강동면 신라시대 비화현, 고려현종때 경주 도독부 안강현, 1895년 경주군에 속했다가 1914년 경주군 안강현에서 11개리 29개동의 강동면으로 분면되었으나 1959년 경주시제 시행으로 월성군 강동면으로 되었다가 1972년에 안계댐 수몰로 2개동이 댐에 흡수되어 11개리 27개동으로 줄었고 1989년 군명칭변경으로 경주군 강동면, 1995년 시군통합으로 경주시 강동면,동년 5월27일 안강읍 갑산리의 일부가 강동면 모서리에 편입되었고 1997년 유금5리 분동으로 11법정리, 28행정리동으로 되어있다. 경주에서 20㎞지점, 시의 동북단에 위치,동북은 포항시,남은 천북면,서는 안강읍과 접하고 있으며 동.남을 관통하고 있는 형산강과 남북으로 흐르는 기계천을 중심으로 평야지대가 형성된 저지대로 매년 우수기가 되면 홍수로 인하여 침수피해가 심하며 경주-포항간 7호선 국도와 안강,영천 방면의 국도28호선 분기점으로 교통이 편리하며 주민생활권은 경주,안강,포항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역으로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양동민속마을에 문화재를 40여점이나 보유하고 있으며 전국민속마을 4개소 중 원형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관광객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연혁 국당리 : 옛날 이곳에 신당이 있었다 하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마을에서 국 화재배가 잘 된다고 하여 국당리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산리 : 다산,다질 혹은 단구리의 아래쪽이 된다하여 하단구라고도 불렀 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천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강 동면 다산리로 하였다
단구리 : 붉은더기 밑이 되므로 붉은디기,단구,달성이라 부르며 혹은 다산 리의 하단구 위쪽이 된다하여 상단구라고도 불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의하여 천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강동면 단구리로 하였다
모서리 : 모암산 서쪽 아래가 되므로 모서라 불렀다
안계리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사곡리,심동,구경리,초감리 일부 를 병합하고 마을앞에 안락천이 흐르므로 그 뜻을 따서 안계리 로 하였다
양동리 : 조선시대에 이르러 어진 선비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 하여 양 좌동 또는 양동이라 불렀다
오금리 : 마을 뒷산이 다섯골짜기로 이루어져 마치 거문고처럼 생겼다고 하여 오금이라 불렀다
왕신리 : 옛날 이곳에 왕기(王氣)가 있었다 하여 왕신이라 불렀다 전한다 혹은 조선 선조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주 둔하여 왜군을 물리쳤으므로 믿을 만한 곳이라 하여 왕신(王信)이 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유금리 : 옛날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형산강 가에서 한 소녀가 슬프게 울고 있음을 보고 지나던 과객이 이름을 물으니 유금이라 하였다고 하 여 불리워진 이름이라 하는 이도 있다
인동리 : 약 500년 전 경주손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경주부윤이 이 마 을 못에 와서 뱃놀이를 하였으므로 어진 원님이 놀았다는 뜻으로 인좌골, 인좌곡, 또는 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호명리 : 깊은 산골이라 범이 울고 다녔다 하여 범어리,범우리,호명이라 불렀다.
■건천읍
▶유래 건천리(乾川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마을은 약 150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번창하였다. 마을옆 건천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여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태종 23년에 경주 대도독부, 조서조때는 경주부에 예속,1895년 경주군 서면에 속해 오다가 1914년 부군통폐합시 마을 이름을 건천(乾川)이라고 하였고 1973년 읍(邑)으로 승격하면서 건천읍 소재지가 되었다.
건천 1.(乾川)[마을] ; 거치내,건치내라고도 하며, 천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건천 2.(乾川)[내] ; 거치내,건치내,건천내라고도 하는 건천 앞으로 흐르는 내. 건천교(乾川橋)[다리]; 건천 앞 국도에 있으며, 모량과 아화를 잇는 다리이다.
건천읍장(乾川邑場)[장]; 건천에 있는 건천읍의 시장으로 건천장,서면장이라고도 했다. 예전에는 3일,8일에 섰으나 지금은 5일, 10일에 장이 선다.
작원(鵲院): 신라 제29대 무열왕때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제를 정복하고자 군사 5만을 인솔하여 왕성을 떠나 30리 쯤 되는 이곳에서 첫날 진을 치고 있을 때 서쪽에서 까치 한 마리가 느닷없이 날아와 진영의 상공을 날다가 대장기 끝에 앉았다. 군사들은 그것이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여 진중(陳中)이 어수선해지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김장군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고 까치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니, 까치는 땅에 떨어지면서 홀연히 여자로 변신하였다. 그 여자는 다름아닌 백제의 공주였다. 김유신의 군사가 백제를 침공한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까치로 변해서 염탐코자 신라군의 진지로 날아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장군은 까치가 이미 백제의 공주임을 알고 소리쳤다.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빌었고 이런 까닭에 이곳을 작성(鵲城)이라고 불렀고 마을 이름을 작원이라고 하였다.
고지[마을] ; 고지(高旨)마을이라고도 하며,건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김유신장군 기간지주[기둥] ; 건천2리 206번지 안 기복(安基福)의 집 앞뜰에 있는, 화강석으로 된둥근 사다리꼴의 기간지주이다. 전설에 의하면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작성(鵲城)에 주둔시킬 때 이곳에 기(旗)를 달기 위해서 세운 것이라 한다.
덕고개[고개] ; 건천의 동북쪽에서 대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숨은도랑[보] ; 건천의 서남쪽에 있는 봇도랑으로, 은보(隱洑)라고도 한다.
잘감[들] ; 건천 북쪽에 있는 들.
잘감보[보] ; 잘감에 있는보. 이후의추가자료는 편집중에 있으며 건천에는 리동별로 건천의 역사,문화가 방대하게 널려져있다. 건천에는 찬란했던 신라시대의 역사와 문화그리고 선지자들의 얼이 곳곳에 배여있다.
금척리(金尺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금척(金尺)은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에게 금자(金尺)를 주었는데, 꿈을 깨 보니 손에 금자가 쥐어져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꿈에 가르쳐준 신인의 말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나았다. 소중하게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唐)의 황재가 사신을 보내어 이 신기한 금자를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이를 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38기의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후 이 금척고분(金尺古墳)의 이름을 따서 '금척'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웃말 : 곡산한씨(谷山韓氏)가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금척의 위쪽에 있으므로 '상리(上里)' 혹은 '웃말'이라고 한다.
아랫말 : 영천이씨 집성촌으로 금척의 아래쪽에 있으며, '하리(下里)' 혹은 '아랫말' 이라고 한다.
새각단 : 순흥안씨(順興安氏)가 모여사는 마을 아랫말 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 '신리 (新里)' 혹은 '새각단' 이라고 한다.
오방골 : 약 70년전 이곳에 사과밭이 일구어지면서 생긴 마을로, 이 마을에서 다섯 갈래의 길이 통하므로 '오방곡(五方谷)' 혹은 '오통곡(五通谷)' 이라고 부른다.
대곡리(大谷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약 400년 전 형성된 마을로 골짜기가 매우 크다고 하여 '한실' 혹은 '대곡(大谷)'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나주임씨(羅州林氏) 집성촌.
숲리 : 신라때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하나 크게 발전하지 못하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야 개척되었다.마을 옆에 큰 숲이 있다고 하여 '숲리''숲각단' 또는 '신리(新里)'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제내(堤內) : 마을 앞에 신라때 만들어진 줄못이 있었는데 줄못이라는 이름은 못에 줄풀 (水草)이 많이 나서 부른 이름이라고 한다.이 때문에 마을 이름도'줄못안', '못안마을''못안제내(堤內)'라고 불렀다는데,지금은 그못은 보이지 않는다.
수미리 : 숲리마을과 서로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숲의 가장 아랫쪽인 꼬리 부분에 있다고 하여, '수미리' 혹은 '수마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리(邱里) : 300여년 전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언덕 위에 마을이 있으므로 '구리' 혹은 '군말' '군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당(新堂) : 한실 서쪽에 있는 양지바른 마을로, 구리가 번창함에 따라 약200년전 하나 둘 이주해 온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일구어 '신당'이라고 하 였다. 다른 이야기로는 마을 앞에 연못이 있으므로 연당가에 새로 집을 짓고 마을을 일구었다고 하는 뜻으로 '신당'이라고 했다고 한다.
오통곡(五通谷) : 조선조 중기 마을이 처음 생길때 다섯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혹은 마을로 다섯 갈래의 길이 통하므로 '오통곡' '오통골'로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갈전(葛田) : 양 300년전 나주임씨(羅州林氏) 성을 가진 어느 이가 무성한 갈대밭을 치고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그 후 '갈전','갈밭'이라고 부르게 되었음
모량리(牟梁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신라 六部村 중 세번째 茂山大樹村에 속했으며 '점량부(漸梁部)','모량부(牟梁部)',라 불리었고,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1280년경)에는 '장복부(長福部)' 이라고도 불러왔다.이곳에 보리가 잘 되었다고 하여 모량(牟良)이라고도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1914년 일본인들의 나쁜 의도로 행정구역 통합시에 모량(毛良)으로 불리었다가,1998년에 지역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확실한 考證과 史料를 바탕으로 모량리(牟梁里)로 변경되었음
행정(杏亭) : 약 300년 전 마을 주민들이 살구나무를 많이 심어 마을이 살구나무숲을 이루었는데 그때 살구나무 정자가 있다고 하여 '행정'혹은 '살구징이'라고 하기도 한다.
삼교(三橋) : 이 마을에 3개 방면으로 통하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하여 '삼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모량(內牟梁) : 모량리 서쪽산의 기슭에 있는데, 모량리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안모량' 혹은 내모량(內牟梁)이라고 한다.
방내리(芳內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마을이 단석산(斷石山) 기슭에 있는데, 산에 둘러싸인 품이 마치 방안에 있는 것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방내(房內)' 라고 불렀다고 한다. 단석산 속에서 꽃다운 화랑들이 수련을 하였다고 하여 '방내(芳內)'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큰마을 : 방내를 구성하는 본마을로서 가장 주민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큰마을'혹은 '중리(中里)', '중마을' 이라고 부른다.
모시밭각단 :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 모시를 많이 재배하였으므로 '모시밭각단' 이라고 하였으며, '저마전(苧痲田)' 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고양터 : 신라시대 불교가 융성할 즈음 절이 많던 곳으로 백성들이 부처님께 공양을 많이 바치던 곳이라고 하여 '공양(供良)터' 라고 하다가, 세월이 흐르게 되니 '고양터' '괴양테'라고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말암(馬岩) : 말을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던 때에, 이곳에 말을 많이 먹였다고 하여 '마전 현(馬轉峴)' 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며, 말을 매어 두던 바위의 이름을 따서 '말암' 혹은 '말바우' '두암(斗岩)'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송선리(松仙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약 400여년전 임진왜란 후에 오천정씨(烏川鄭氏)가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소나무밭을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송전(松田)' 이라 하였다고 한다.
선동(仙洞) : 옛날 복두암 선인대(仙人臺)에 8선녀가 매일밤 내려와 중업암(中業岩) 용정(龍井)에 목욕하며 놀다가 올라갔다라고 해서 '선동' 이라 불려졌다함
달천창(達川倉) : 신라 때 병사들이 주둔했으며 병기(兵器)를 보관하고 창고를 지은 자리라 하여 '창리(倉里)'라고 하였다 한다. 혹은 '창터''말천''달래' '달래창(達來倉)'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성(山城) : 약 150년 전부터 화전민들이 나무를 치고 이 마을을 개척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1300여년 전 신라가 백제의 침공에 대비했던 산성(山城)이 이곳 에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산성' 이라고 했다.
절골 : 약 300년 전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마을을 개척할 때, 신라시대의 절터가 있었다 하여 '절골' 혹은 '사곡' 이라고 불렀다 한다.
우중굴(雨中屈) : 신라 때 위증이라는 당 태조의 신하가 이 마을에서 수도하였다고 하여 '우중골' 이라고 부르다가, 송산(松山)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인 고로, 구름이 덮히고 어두워지면 곧잘 비가 몰려온다고 하여 '우징곡(雨徵谷)','우중굴'이 되었다.
신평리(新坪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약 400년 전 이덕유(李德裕)라고 하는 이가 마을을 일으킬때 지형을 보니, 마을 뒷 능선이 마치 울타리 같이 둘러싸여 있는 고로 '신기촌(薪基村)' 이라고 부르다가, 그 후 못을 막고 '못밑', 제하(堤下)' '부아미' 라고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수룽굴 : 약 200년 전 경주정씨(慶州鄭氏)성을 가진 한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여 못을 막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느날 못에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끼여 용이 이곳에서 등천을 하였다고 해서 '수룡(水龍)'또는'수렁''수룽굴' 이라고 한다.
돈지(敦地) : 약 300년 전 박춘(朴春)이란 이가 야산에 마을을 세웠다고 하여 '둔지'라고 부르다가, 약 150년 전 돈제라고 하는 선비가 유림계(孺林契)를 시작하여 '돈지(敦地)'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원신(元薪) : 마을을 개척한 지 300년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 마을을 일굴 때 인근의 들에 섶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섶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 못이 생기면서 새로 이들이 생겼다고 하여 '새들'이라 불렀고,'셉들'또는 원래의 신평이란 뜻으로 원신평(元薪坪) 이라고 불렀다. 드물게는 이웃마을 사람이 이 마을 사람들을 놀릴 때 여근곡(女根谷) 마을 아래 있다고 해서 '십들'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길(模吉) : 약 450년 전 처음 마을을 개척한 사람은 손씨(孫氏)였으나, 파평윤씨(坡尹氏) 가문의 선강(善康)이라고 하는 이가 가척(加尺)에서 이주하여 마을 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그 후 이 마을의 어떤 과부가 수절하여 다른 사람의 본보기 즉 모범이 되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모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마골 : 약 100년 전 김씨(金氏)성을 가진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는데, 골짜기의 형상이 마치 '가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곡(釜谷)' '부동(釜洞)'이라고 이름 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가잣골 : 약 450년 전 파평윤씨가 개척한 마을로, 어떤 모녀가 못 밑에서 여기까지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오다가 이야기를 채 다 끝맺지도 못하고 마을에 닿게 되었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가척(加尺)'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조선 연산군때 갑자사화를 피해 이곳에 온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의 조카 윤신(尹信) 이라는 이가 가랑사라고 하는 절 옆 지척 거리에 살았다하여 ' 가척'이라 불렀다고 한다.
가랑골 : 약 100년 전 가척 마을이 번창함에 따라 주민들이 이곳까지 이주해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때 이곳에는 가랑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가랑골' 이라 했다고 한다.
용명리(龍明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장승(長承) : 약 100년 전 과수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마을 남쪽 큰길 거리에 돌로 만든 장승이 있었다고 하여 '장승(長承)'혹은 ' 장생이'라 불렀다. 지금은 장승의 행방은 알 수가 없고, 마을 이름만이 ' 장승'으로 남아 있다.
새마을 : 약 370년 전 임진왜란 때, 경주김씨(慶州金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 성을 가 진 두 사람이 마을을 새로 일구어 '새마을' '새마실' 이라고 한다.
밀구(密耳) : 구미산으로 용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용암(龍岩)이 있었던고로, 용암 의 용(龍)자와 명장(明莊) 마을의 명(明)자를 따서 '용명(龍明)'이라고 불렀다 한다. 혹은 귀가 없는 미륵불이 있었다고 하여 '밀이촌(密耳村)'또는 '밀귀' 라고 부르던 것이 그 후 '밀구'로 바뀌어 불려졌다 한다.
명장(明莊) : 파평윤씨(坡平尹氏) 성을 가진 한 선비가 마을을 일구었다고 하였다. 깊은 산골이라 산나물이 많아 부근에 명성이 났다고 하여 '명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깊은 산골에 마을이 있어서 호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탑골(塔谷) :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불타버리고 그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신라 때의 3층석탑이 마을옆에 있었으므로 '탑골' 혹은 '탑리(塔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웃명장 : 명장부락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상명장(上明莊)' 이라고도 하였는데, 6.25동란으로 민가가 철거되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조전리(棗田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약 400년 전에 백이소(白以昭)의 후손이 개척한 마을로, 이 마을이 시작당시 이 일대가 야생 대추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대추밭' '조전(棗田)' 또는 대수촌(大樹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길각단 : 1919년 중앙선 철도와 함께 국도가 개설되고, 대곡리와 연결되는 길목에 과수 원이 조성되면서 마을이 생겼다고하여 '길각단''도변(道邊)'이라고 불렀다.
강당(講堂) : 백대청(白大淸)이란 선비가 개척을 하였는데 대추밭에 딸린 마을이다. 증참판(贈參判) 백이소(白以昭)를 추모하기 위해 광산사(光山祠)를 세웠다 고 하였다. 그래서 '강당'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곳에 글을 가르치는 강당(講堂)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그대로 '강당'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박실 : 박호(朴浩)라는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그 이름을 따서 '박실' 혹은 '박곡(朴谷,珀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천포리(泉浦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하천 가에 마을이 있어 '천리(川里)' 라고 하다가, 논에 도랑보를 만들고 나서 '도랑목'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천포(泉浦)'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부산(富山) 밑에 있으므로 '부산촌(富山村)', '부산(富山)', '덕산(德山)' 이라고 불렀다.
역전(驛前) : 경주에서 영천간에 철도 중앙선이 놓이고 건천역이 생기면서,역을 중심으로 해서 생긴 마을이다
■안강읍
▶유래 원래 안강은 무인 하천 지역이었으나 칠평천 유수의 변천으로 민가가 형성되었고 신라 경덕왕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는 뜻에서 “안강”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함.
안강리 신라 경덕왕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여 안강이라 부르던 것을 그대로 읍 소재지 마을명칭으로 부르고 있음.
양월리 신라 시대에는 양월방이라 하다가 약 70여년전 마을 주위에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달을 보면 마음이 쾌활하였다고 하여 양월이라 칭하게 되었음.
구강(자연부락) 조선태조가 안강현을 구성현으로 개칭할 때 마을의 동남쪽에 거북을 닮은 산이 있어 마을을 구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말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익재 이재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구강서원을 세워서 이마을을 구강이라 불렀다고 하며 거북은 물이 있어야 산다고 믿어 마을 앞에 연못을 파고 항상 물을 가득 채워 두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일부에서는 마을을 구강(江)이라 부르기로 함.
창마을(자연부락) 신라시대부터 이마을에 군량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창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월성이씨가 많이 살아온 마을인데 이마을에는 용두지란 큰 연못이 있었다. 그 용두지로부터 수로를 만들기 위해 창석을 파헤치니 붉은피가 솟아 올랐다는데 그 후로는 월성이시 가문에 벼슬길이 막혔고 자식이 성하지 못했다 한다. 그 이유는 용두지의 수로를 파헤칠 때 솟은 피는 용의 머리가 잘린탓이었다고 한다.
칠평 옛날 큰 홍수가 져서 안강전역이 침수된 일이 있었다. 그때 현 양월6리의 칠평 정도의 땅이 물에 잠기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그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의 땅모양이 칠자형(七字形) 이었다고 하여 그 넓이와 모양을 따서 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새각단, 신평, 양월 옛날 신라때부터 수양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양월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곳에 집이 들어서고 주민이 늘어나 새로 생긴 마을같다하여 새각단 혹은 신평이라 불렀다. 이곳은 광복전에 없었던 시장이 새로 생기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현재 안강읍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북부리 안강읍 소재지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북부리라 부르게 되었다.
개버들 현 안강2리와 안강3리 사이 근계 도로변에 개버들이란 지명이 있었는데 옛날 웅덩이 옆에 버드나무가 있어 개버들이라 불렀으 며 대추밭 각단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이 웅덩이로 들어와 수리 시설이 없던 시대에는 벼농사의 샘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볼수 없음.
대추밭 각단 현 안강5리의 사과밭 주변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한일 합병으로 일제가 경주군 강서면 안강리를 설치하여 행정을 할때 신사를 이곳에 두고 일본 천황에게 참배케한데서 유래됨.
육통리 옛날 대표적인 6개 자연부락(능골, 원당, 존당, 못밑, 학지, 거리) 마을을 통칭하여 육통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당 서기 1500년경 월성김씨가 개척하여 족친간 집단 부락을 형성했 는데 인근부락중 제일위쪽에 있다하여 으뜸원(元)자를 붙여 원당이라 칭함. 일설로는 고려시대때 이 마을에 원절이라고 하는 큰절이 있었는 데 그 이름을 따서 원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능골 신라 흥덕왕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능골이라 부르게 됨.
존당 고려대 존재선생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존당이라 하였는데 조선 말엽부터는 서당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존당이라 개칭하였다.
못밑 신라 42대 흥덕왕릉을 축조할 때 지관이 능 앞에 못이 있어야 좋다고 하여 육곡 앞에 못을 막았다. 그 못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는 그 못이 존재하지 않는다.
황새말 · 학지 조선시대 정재우라고 하는 선비가 처음 개척 할 당시 마을에 참 나무 2그루가 있었는데 황새가 이 참나무에 와서 서식하였다고 하여 학지라 부르게 되었다.
소평 약 100년전 윤씨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넓은 평야 중앙에 있는 작은 구육이라 하여 소평이라 부르게 되 었다.
거리동 · 거리마을 신라시대 의창군과의 인적왕래가 많았다고 하여 거리동이라 칭하였음.
노당리 신라이후 조선시대까지 오래된 집이 많다하여 노당이라 칭함. 신라시대부터 안강에서 의창군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신라이후 조선시대까지 오래된 가옥이 많다하여 노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산대리 이조 정종때 권사악 선생이 처음 개척할 때 황지에 암석과 오대가 산과 같다하여 산대(山垈)라 불러 왔다.
셋터 · 새태 · 신기 원래는 홍천을 통털어 불리었고 마을의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새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도 늘어나서 마을이 새로 하나 더 생겼다하여 이조 말엽부터 새터라고 불렀다.
홍천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전 임진왜란 뒤 이 마을에 홍씨가 들어와 개척하였다고하여 홍천이라고 불리어졌다. 또 이마을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큰 개울이 흐르고 있어 비만 오면 큰 피해를 입었다 한다. 현재는 그때의 큰 개울이 없어졌지만 당시에 심어 두었던 개울가의 나무들이 고목이 되어 지금도 서 있다.
김생 · 김신이 · 금성 병자호란때 충청도 지방에서 거주하던 청아인 金城公 李地가 난을 피하여 영남으로 내려 오다가 이곳을 개척하여 지명을 금성이라 불렀다.
수일(水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전 청안 이씨와 설씨가 이 마을을 개척 하였다. 이곳은 안강읍에서 가장 물이 맑은 마을이라하여 수일(水一)이라 불리어 왔으며 현재는 공장이 들어서서 주민 모두가 이주하였다.
구부랑 피일동 앞에 위치한 마을로 논에 물을 댈수 있게 만든보가 굴곡 이 많으며 마을길의 모양도 꼬불꼬불하게 생겼다하여 구부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피일 임진왜란 당시 울창한 숲으로 싸여 있던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하였으며 피난중 식량이 부족하여 피를 흘려 먹으면서 지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피일이라 불리어 왔다.
석정 300여년전 홍대명이란 선비가 이마을을 개척하였을 때 여기 장 군수라는 큰 우물이 있었는데 이를 칭하여 석정이라 하였다.
중말 · 중리 23여년전 밀양박씨가 개척하였으며 마을이 넓은 들판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리(中里)라 불리었음.
화전이.화전(花田) 100여년전부터 빅토에 목화재배가 성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눈 송이처럼 흰 목화가 만개하였기 때문에 花田이라 불렀다.
옥산리 자옥산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玉山이라고 불렀으며 원래 옥산 서원이 있는 골짜기 안의 마을을 지칭하였으나 현재 인근지역으 로 팽창 영,포 국도변까지 포함하는 큰마을이다.
민내 약 200년전 해발 300m 산에서 김씨성을 가진 사람이 산약을 구 하다가 실신하여 냇가에서 며칠동안 잠을 자다가 깨어났다. 깨어나자 곧 이곳을 개척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개척한 마을 이라 하여 민내라 부르게 되었다.
계정마.계정 조선시대 영남 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 선생이 학문을 하면서 유생을 모아 강론한 독락당내에 계정을 두어 소요하며 즐겼다하여 계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곡리 지형이 火字의 형국이라 초기에는 마을 이름을 赤化五里라 불렀 다. 그런데 불이 자주나므로 불의화를 면하기 위해 마을 앞에 못을 축조하니 주산인 삼성산에 항상 안개가 끼어 있어 노실이 라 했는데 1914년 하곡리라 개칭함.
절곡 400년전 절이 많이 건립되어 있던 골이라하여 절곡이라 전해오 며 빈대가 너무 많아 현재는 절이 없어졌다고 함
삼거리 자옥산, 어래산, 무학산 3개의 산이 보이는 중앙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며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원다골, 원당골 옛날 원씨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하였다 하여 원당골이라 함.
서원마을, 섬마을, 서원촌 선조7년(1574) 이언적 선생을 추모여형하는 옥산서원을 하사 받은후 이곳을 서원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봄, 여름, 가을로 많은 관광객이 모여 들기도 한다.
중보 400여년경 설씨가 옥천에 보를 막고 정혜들이라 칭하였는데 그후 못을 막고 중곡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강교리 개척 당시부터 너더리, 양곡등으로 칭하다가 1780년경 권성이란 선비가 주산인 서쪽산이 이끼야(也)자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也日로 칭하다가 섬촌과 계곡마을을 건너다니는 교량을 널빤지 로 설치하였다하여 강교라 부르게 되었다.
두류리 현재 두류2리의 저수지 주위를 말하며 딱나무로 많은 종이를 만 들었다고 하여 딱실이라 불리어졌다.
화산골, 화산곡 마을의 산천경계가 빼어나고 봄철 산야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여 아름답기가 이를데 없다하여 화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박골 1580년경 우봉이씨가 처음 개척하였고 선비가 많이 났다고 하여 士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널기미 마을 뒷산의 산세가 거북등과 같이 생겼다하여 판구미라 부르기 도 하고 주위에서 가장오래된 마을로 산밑에 신령님께 제사지내 는 풍습이 있으며 오래지속되는 좋은 마을이란 뜻에서 널기미라 부르게 되었다.
점말 신라때부터 옹기굽는 마을로 조선을 거쳐 광복직전까지도 옹기굽 기가 성행했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근계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시내의 근원이라고 해서 근계라 칭함.
가마실, 금곡 조선조 추화씨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의 위치가 가마같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하여 가마실이라 하였음.
곤실 안강읍 칠평천 이남을 수남이라고 하는데 수남지역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닦은이가 많다고 하여 책권(卷)자와 열매실(實) 자를 써서 권실이라 하는데 차차 곤실이라 불리어지게 되었음.
갑산리 신라때 甲山寺의 이름을 따서 갑산이라 칭한 자연부락 명칭을 그대로 사용함.
대마을, 댓마, 죽촌 백제군이 침입하여 왔을 때 신라군이 패하자 말을 대밭에 숨겨서 피신하였다고 하여 죽촌대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들, 사평 홍수가 나면 이 마을에 모래가 많이 쌓인다고 해서 조선 순조때 박종식이라는 선비가 사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대동리 개척당시 골짜기라 넓다하여 한골이라 칭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동리라 칭함.
박동 한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박이 잘 되는 곳이라하여 박동이라 불렀다하며, 일설로는 박氏가 많이 살고 있다하여 박동이라 칭함.
검단리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솥모양 같다하여 금당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검단리로 개칭.
검단 약수탕 약 100년전 대 가뭄시 창씨성을 가진 사람이 개울따라 우물을 팠는데 청석에서 물이 솟는 것을 발견하고 더 많은 물을 얻고자 깊이 팠지만 그 깊이 외에는 물이 나지않았으며 거품이 섞인 물이 나와 그때부터 약수라 했으며 그 후 탄산수로 편성되었는 데 떫은맛이 있고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안태봉 안강읍과 현곡면 경계지역으로 신라때 한발이 극심하여 어느 임산부가 이 봉우리에 올라가서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왔다고 하여 안태봉으로 불리고 있으며 현재도 그 제단이 남아 있음.
사방리 형산강에서 범람하는 홍수를 막는다는 뜻에서 사방이라 불리어 오다가 그 후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士方里(사방리)라고 개칭함.
청령리 신라시대 처음 개척 당시 산골짜기마다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청령이라 불렀다
■현곡면
신라육부촌중 모량부의 무산대수촌으로 현실이라 칭하였으며 고려시대 계림부에 속하였다가 1906년 경주군 현곡면으로 칭함. 남동부의 형산강을 경계해서 경주시와 접하고 서부는 어임산과 구미산의 준령을 경계로 해서 건천읍, 서면 및 영천군 고경면과 접하며 북부는 금곡산 준령을 경계로 해서 안강읍과 접하고 있다. ▶유래 金丈里 - 金丈은 金臟落雁이라하여 신라때부터 3기 8괴의 하나로 경치가 빼어나 기러기도 경치에 취하여 쉬어갔다고 하며, 이곳에 금장대가 있어 '금장'이라 불렀다 한다, 또한 암자에 한 스님이 살고 있었는데 금 지팽이가 움직여 혼자 시주를 해 왔다고 하여 금장이라 한다고 함
金丈2里(옹기골)-약100년전부터 옹기를 많이 생산한 지역임
金丈2里(가삼동)-약250여년 전까지 가삼재배지였다고 한다.
上邱里 -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상이라 구미산이라 하였고 마을이 이산 위쪽에 위치한다 하여 상구미라 했다.
下邱1里(하구미)-구미산의 아래쪽이라 하여 하구미라 한다.
下邱2里(고천)-산의 형세가 한자의 川자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어 고천이라 칭하였다 한다.
下邱3里(다경)-일제시대에 생긴마을로 자연스럽게 생각 것이 다행스럽다 해서 다경이라 한다.
柯亭1里- 정자나무 마을이라하여 이름이 붙었다.
柯亭2里(갓질,지곡)-갓과 같고 그 밑마을이라 해서 갓골이라 했다. 또 여강 이씨의 할아버지 이름자인 芝자를 따서 芝谷이라 했다.
柯亭3里(마룡골)- 현용담정 위에 용치에서 용마가 났다 해서 용마골이라 한다. 일설에는 이곳에 龍처럼 생길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전한다.
南莎1里- 마을 앞 가마들에 잔디가 많았고 마을이 남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여 남사라 했다.
南莎2里(북골,종동)- 전설에 의하면 孫順이란 사람이 신라 흥덕왕때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린 자식이 노모의 반찬을 먹어 그 부부는 자식을 생매장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마을 남쪽산에 가 땅을 파니 종이 나왔다. 그종을 치니 소리가 궁성까지 들렸다. 왕이 손순을 효자라 표상하고 종을 얻은 산을 북골이라 하고 마을을 鍾洞이라 명명했다 한다.
來台1里(나태)-산림이 우거져 하늘에 별만 보인다해서 마을 이름이 됐다.
來台2里(곰바우)- 어느날 뒷산 바위에 곰의 몽둥이가 비쳤다 해서 그 바위를 곰바위.熊岩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여기서 왔다.
武科里-신라시대 武科시험 장소로 이용했던 곳이라 한다.
小見1里-신라도성에서 마을이 조그마하게 보인다 해서 소현이라 했다 한다.
小見2里(智日)-마을의 동쪽산이 높아 해가 뜬 것을 알려면 한나절이 지나야 알수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五柳里-마을앞에 버드나무 다섯그루가 있었다 해서 마을 이름이 됐다.
羅原里-신라헌덕왕때 건립한 蘭原寺터에 이해 난원이 됐다가 나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