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편린들/버린 詩(발표)
헤르메스의 어느 날 _ 계간 창작21 2022년 봄호
가짜시인!
2022. 7. 10. 18:46
헤르메스의 어느 날
권 상 진
개를 웃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너는 최선을 다하는구나
간식과 포옹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웃음을 기다리는 자비로운 눈길은
재림한 예수 같구나 부처 같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너의 애인은 애매한 표정만 지녔으니까
그의 표정에서 개를 불러내는 일보다
개를 웃기는 게 쉬운 일이지
정말 웃겨서 웃을 때도 있고
웃어줘야 할 때도 있는 건데
시큰둥한 애인의 무릎에서 개만 웃고 있을 땐
먼 사람 같다고 했던가
헤르메스*의 어느 날처럼
너는 표정 속에 가라앉은 웃음을
개에게서 건져 올려 몇 번이고 애인에게 내민다
기억조차 어렴풋한 애인의 웃음에
녹이 슬고 이끼가 낄 때쯤
애인은 돌아앉아 자신의 표정들을
이리저리 맞춰보고 있었지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웃어야 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거야
기다려, 곧
개가 애인의 웃음을 물고 달려와
네게 안길거야
*이솝우화 ‘나뭇꾼과 헤르메스’ 에 나오는 신
계간 『창작21』 2022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