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편린들/내가 읽은 詩
소줏병 / 공광규
가짜시인!
2013. 6. 8. 09:32
소줏병
공 광 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가짜시인의 단상
아버지는 언제나 소진되는 존재였다. 적어도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그래왔다.
돌본다는 말은 스스로가 아니라, 가족이거나 이웃이거나 나 이외의 무엇을 살피고 보호한다는 것이므로
아버지는 항상 자신을 뺀 모든 것을 위해 지금도 삭아들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관계들로 부터 버려지
지는 않지만 자주 버려진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작은 위로가 필요하다.
문 밖-모든 인연의 경계로 부터 벗어난 외로운 곳에서 쪼그려 울지 않도록 말이다. 진한 술냄새와 땀냄새
그리고 아버지가 아닌 사람에게서 한번도 볼 수 없던 표정과 어깨의 곡선들은 모두 아버지가 누군가를 위
해 하루를 소진하고 남은 증거물들이다. 마루끝에서 아버지를 찾아와야 한다.